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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룡의 역사 타파(106)

오룡의 역사 타파(106)

 

조선의 사대교린(事大交隣) 정책의 수혜자와 피해자는...

분명한 것은 여전히 국민은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

 

강대국인 중국엔 사대하고, 여진과 일본과는 우호관계를 맺는다. 중국을 어버이처럼 모시고 여진과 일본은 형제처럼 지낸다. 사대교린(事大交隣)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의 대외정책 원칙이었다. 원칙은 변함없이 지켜졌다. 고집스런 원칙이 가져온 폐해는 백성들의 몫이었다.

 

황족의 생일(성절사, 천추사)과 연말연시(정조사, 동지사)에는 정기적인 사신을 보내고 필요에 따라 부정기적으로 임시 사절을 보냈다. 사대의 나라에 가는 사신은 공물을 가지고 조공(朝貢)을 바친다. 조공을 받는 중국은 보답으로 선물을 회사(回賜)한다.

 

경제의 논리로 본다면 조공하는 품목과 회사하는 물품 사이의 가치를 따져보면 되지만, 이면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사신들이 가져가는 품목은 인삼과 모시, 화문석과 말, 문방구 등 다양하지만 가장 중요한 목록은 금·은과 환관·처녀의 요구였다.

 

환관으로 들어간 이들이 명의 사절단으로 들어와 무리한 요구를 일삼은 것은 또 다른 골칫거리였다. 처녀들의 혼인을 막기 위한 금혼령과 딸들을 혼인시키기 위한 백성들의 입장은 각자의 위치에서 힘들었다. 이러한 중국의 금과 은, 처녀의 조공을 다른 특산물로 대체한 세종은 당대의 백성들에겐 체감으로 와 닿는 성군이었을 것이다.

 

정성을 다하여 공물을 싸 보낸 조선에게 중국은 어떤 선물을 안겼을까? 회사품은 비단, 약재, 서적, 도자기가 대부분이었다. 백성들의 살림살이에 보탬이 될 수 없는 품목이었고 수량도 적었다. 조선의 지배층들에게 선진 문물을 받아들인다는 명분을 준, 서적을 빼면 만성적인 무역 적자였다.

 

사대정책으로 발생한 무역의 적자를 보충하지 못한 게 조선의 불행이었다. 일본과의 무역은 심각했다. 왜관에 머무는 일본인들이 소요하는 비용의 부담은 조선의 재정을 압박했다. 조선이 근대화로 진입하지 못하고 일본에게 강제병합 당한 이유 중의 하나는 재정 부도를 막지 못한 탓도 있다.

 

교린정책을 취한 여진에게는 함경도 경성과 경원에 무역소를 만들었다. 이곳에선 여진의 말, 산삼, 모피를 받고 조선의 면포, 소금, 농기구 등을 주었다. 오늘날의 개성 공단과 같은 모양새지만 개성은 북한 땅이니 남북한은 서로 윈윈이다. 조선의 국경을 자주 넘어오는 여진인을 위해 회유책의 일환으로 토지와 가옥, 노비까지 마련해 주었으니 손해보는 장사였다.

 

조선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나라들과의 무역은 각기 다른 목적으로 맺어졌다. 중국에게는 정치적으로 종속하고 싶어서 비용지출을 감수했고, 여진과 일본은 정치적으로 종속시키고 싶어서 비용을 부담했다. 중국에게는 자발적으로 사대한 것이고, 여진과 일본과의 교린은 어쩔 수 없어서 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 모든 비용의 부담이 커진다는 것이다.

 

17세기 이후 조선의 정치는 서인의 일방독주였다. 견제 세력이 없는 서인의 노론은 오직 성리학만을 외쳐댔다. 사대와 교린을 통해 얻은 대가로 권력을 쥔 그들로 인해 등골이 휜 백성들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관가에 가서 억울한 사정 호소하재도 범 같은 문지기 버티어 섰는데/ 이정은 으르렁대며 외양간의 소마저 끌어갔다오/ 남편이 식칼 갈아 방안으로 들어가더니 선혈이 자리에 낭자하구나 (····) 말이나 돼지 거세함도 가엾다 이르는데/ 하물며 대를 잇는 사람에 있어서랴/ 부자집들 일년 내내 풍악 울리고 흥청망청/ 이네들은 한톨 쌀 한치 베 내다 바치는 일 없거니/ 다 같은 백성인데 이다지 불공평하니

 

정약용이 <애절양>을 쓴지 200여년이 흐른 지금도, 결국 죽어나는 건 국민들뿐이다.

 

오룡 (오룡 인문학 연구소 원장, 경기도립 중앙도서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