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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룡의 역사 타파(107)

오룡의 역사 타파(107)

 

독립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실패한 외교론을 붙잡고 6년을 허송세월한 이승만은 탄핵됐다.

 

19194,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반에 이승만을 선출하겠다는 참석자들에 실망한 신채호는 분노했다.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 먹었다.” 상하이의 회의장을 박차고 나온 신채호는 1923년 의열단 선언문을 썼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9118, 파리에서 개최된 강화회의에 미주의 최대 항일 한인 단체인 대한인 국민회 중앙 총회는 이승만과 정한경을 파견하기로 했다. 하지만 일본을 의식한 미국이 여권 발급을 보류하여 이승만은 파리에 가지 못했다. 이 무렵 신한 청년단 대표로 파리에 가 있던 김규식은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그는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위임 통치 청원을 요청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이유를 해명해야 했다.

3·1운동 이후 서울의 한성 정부, 연해주의 대한 국민 의회, 상하이의 임시정부가 통합하여 세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을 상대로 한 외교활동에 온 힘을 쏟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파리 강화 회의에 임정 대표 자격의 참여는 거절당했고, 조선 문제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192111, 워싱턴에서 열린 태평양 회의도 마찬가지였다.

이때 새로운 독립운동의 방향을 정하기 위해 국내외의 항일 대표 100여명이 모여 국민대표회의를 열었지만, 창조파와 개조파의 대립은 극복되지 못했다. 항일 운동가들이 하나 둘 떠나가버린 임시정부의 위상은 사라졌다. 독립운동의 첫 번째 원칙이 실패했으면 그 다음 목표를 바로 세웠어야 했지만 임시정부는 방황했다. 1925311일에 이르러서야 임시의정원은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했다.

임시 대통령 이승만은 시세에 암매하여 정견이 없고, 무소불위의 독재 행동을 감행하였으며, 포용과 덕성이 결핍하여 민주주의 국가 정부의 책임자 자격이 없음을 판정함.

임시 대통령 이승만이 대한민국 임시 헌법을 기탄없이 저촉하였고, 국정을 혼란시켜서 국법의 신성과 정부의 위신을 타락하게 하였음을 판정함. 임시 대통령 이승만의 범과 사실을 심리하고, 대한민국 임시헌법 제4장 제21조 제14항에 의하여 탄핵 면직에 해당함을 판정한다.’는 탄핵사유는 엄중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은 미국의 조선위임통치안을 주장하는 이승만을 탄핵하여 대통령에서 해임시키고, 임시대통령 박은식의 지휘 아래 대통령 중심제에서 국무령 중심의 내각책임제로 개헌하는 동시에 무장운동 노선으로 전환하면서 만주 무장운동의 상징적 존재인 이상룡을 국무령에 추대했다.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주요 강대국들은 임시정부의 합법성을 승인하지 않았다. 미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은 이유는 임정의 합법성 인정은 일본에게 불안감을 일으키게 할 뿐만 아니라, 이 때문에 일본과 협력하여 안정을 꾀하려는 동양 평화가 방해받는다.’는 것이다.

이승만의 대통령 선출을 강력하게 반대했던 신채호는 1923조선 혁명 선언에서 외교 독립론이 아닌 무장 투쟁을 역설했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암살·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서 인류를 압박지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평생을 현장에서 활동한 신채호는 1936년 뤼순 감옥에서 옥사했다.

 

 

 

오룡 (오룡 인문학 연구소 원장, 경기도립 중앙도서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