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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녀가 권력을 잡고 국정에 개입했다

오룡의 역사 타파(108)

 

무녀가 권력을 잡고 국정에 개입했다. 진령군에게 홀딱 빠진 중전 민씨

 

1882, 분노한 군인들은 경복궁 담장을 넘었다. 13개월의 급료를 빼돌린 중전 민씨를 죽이겠다는 군인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었다. 장호원으로 탈출한 중전 민씨는 절망했다. 권력을 빼앗긴 그녀에게 희망은 없어 보였다.

 

그런 민씨에게 무녀(巫女)가 찾아왔다. 무녀는 꿈에 신령님이 나타나 중전이 장호원에 있다고 알려 주었다는 것이다. 민씨는 무녀에게 지금 궁궐로 돌아갈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무녀는 지금은 때가 아니지만 얼마 후에 돌아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약속한 환궁일은 정확했고, 중전 민씨는 청나라를 이용하여 권력을 회복했다. 무녀는 이후로도 민씨의 아픈 곳을 어루만져서 증세가 호전되도록 곁에서 보필했다. 중전 민씨는 무녀에게 진령군(眞靈君)이란 봉작을 내렸다. 진령군은 아무 때나 고종과 중전 민씨를 만날 수 있었으며, 만날 때 마다 엄청난 재물까지 받았다. 진령군이 된 무녀는 관우 복장을 하고 다니면서 자신을 신비화했고, 국정 전반에 두루 조언했다. 그녀 의 요구에 따라 재상들이 임명되고 파직되기도 했다.

 

무녀 진령군의 아들 김창열은 붉은 옷에 옥관자를 단 당상관의 복장을 하고 다녔다.무녀의 아들로 천민인 김창열은 조정의 숨은 실세로 활약했고, 고위 관리들은 진령군과 남매를 맺고, 의자(義子)를 자처했다.

 

중전 민씨에게 근심이 있었으니 허약한 세자(순종)였다. 진령군이 세자의 병을 고친다고 굿판을 벌여 금강산 12000봉에 쌀 한섬과 돈 천냥, 무명 한필씩을 얹은 것도 이때 일이다.

 

1893년에 전() 정언(正言)이었던 안효제가 상소를 올렸다. ‘요사스런 무녀 진령군을 죽일 것을 주청하는 상소였다. 승정원의 승지들은 상소문을 놓고 망설였다. 민씨 세도가 민영주가 나서서 이렇게 흉악한 상소를 어찌 가히 올릴 수 있느냐.”며 화를 냈다. 이를 지켜본 박시순이 민영주에게 말했다. “이 상소는 전 언관이 올린 것인데 어찌 우리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이오.” 옆에서 지켜보던 정인학이 도승지와 상의하여 결정하자고 제안했다. 도승지 김명규는 결정하지 못하고 또 다른 민씨 세도가 민영준과 상의했다.

 

민영준의 대답은 분명했다. “봉소(奉疏:상소를 받들어 올리는 것)를 하든지 말든지 결정권은 도승지에게 있는데 도승지조차 결정을 내리지 못하면 도도승지에게 물어보시오.” 도도승지가 있을리 만무했으니 민영준은 중전 민씨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라는 것이다. 결국 도승지 김명규는 상소를 올리지 못했다.

 

() 형조참의 지석영의 상소는 절규에 가까웠다. “신이 온 나라의 백성을 대신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요사스런 여자 진령군은 온 세상 사람들이 그의 살점을 먹고 싶어 하는 자입니다. (‧‧‧‧) 죄를 따져 묻지 않으시어 마치 사랑하여 보호하듯 하셨으니, 백성의 원통함이 어떻게 풀릴 수 있겠습니까.”

 

중전 민씨의 수호신을 자처하며 온갖 세도와 특혜를 누리던 무녀 진령군의 권세는 13년이 지나서야 끝났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민씨가 죽은 후 그녀의 재산은 모두 몰수되고 북묘에서도 쫓겨나 삼청동 골짜기에 숨어 살다가 죽었다.

 

무녀가 봉군(封君)을 받고, 무녀의 입김으로 주요 대신들이 바뀌고, 나라의 세금은 무녀에게 전달되었으니 조선의 망국은 당연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최순실은? 무녀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오룡 (오룡 인문학 연구소 원장, 경기도립 중앙도서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