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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룡의 역사 타파(109)

오룡의 역사 타파(109)

 

최악의 오보(誤報)라 알려진 동아일보 기사, 언론은 받아쓰기와 베껴쓰기를 하지 말아야 한다.

 

194599일 미군은 서울에 들어왔다. 38도선 이남 지역에 군정을 선포한 미군은 조선총독부 정문에 걸린 일장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게양했다. 할복을 시도했지만 살아남은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는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살아서 돌아갔다.

 

일본을 몰아내 준 미군에 대해 한국인들은 해방군으로 여겼다. 하지만 미군은 점령군으로서 한국인을 대했다. 미국인 기자 마크 게인은 우리는 해방군이 아니었다. 우리는 점령하기 위해서 한국인이 항복 조건에 복종하는가 않는가를 감시하기 위해서 왔다. 상륙 제1일부터 우리는 한국인의 적()으로 행동했다.”고 썼다. 점령군 사령관 하지는 일제의 통치 기구를 그대로 활용해 남한을 통치했다. 일본에서 군주(君主) 행세로 세월을 보내고 있던 맥아더에게도 한국 문제는 안중에 없었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절차를 거쳐 한국을 독립 시켜 준다던 약속에서 적당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미국의 루스벨트는 19452월에 얄타에서 만난 소련의 스탈린에게 20~30년간 한국을 신탁 통치하자고 제안했다.

 

미국은 2차 대전이 끝나고 식민지에서 해방된 국가를 신탁 통치하려 했다. 미국에게 정치적·경제적인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19451216일 모스크바에서 미··소의 외상이 모였다.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미국은 신탁 통치 안을 제출하였고, 소련은 임시 정부 수립을 내용으로 하는 수정안을 제출하였다. 결국 소련 안에 미국 안을 절충하여 민주적인 임시 정부 수립과 이를 위한 미·소 공동 위원회의 설치, 새로 수립된 임시 정부와 협의를 거친 최고 5년간의 신탁 통치 등이 결정되었다.

 

회의의 결과는 곧바로 한반도에 전해졌다. 석간이었던 동아일보는 19451227일자(발행은 26) 1면 기사 제목으로 소련은 신탁 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을 냈다. 조선일보도 27일자에 조선의 자주 독립은 어데로, 독립 신탁론 대립,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이라고 보도했다. 원래 기사의 소스였던 UP(United Press·UPI)에도 같은 기사가 남아 있다. 남한의 신문들은 워싱턴에서 전해온 미국의 입장을 그대로 받아쓰기한 것이다. 이 기사는 1946124일 소련이 타스통신을 통하여 모스크바 3상 회담의 경과와 탁치안의 원래 제안자가 미국이라는 사실을 공개함으로써 오보임이 밝혀졌다.

 

38선 이남을 지배하며 언론 검열에 철저했던 미군정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기사에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았을까. 미국에 쏟아질 비난을 소련 탓으로 돌리게 하려는 의도였을까.

 

신탁 통치 소식에 전 국민은 너나없이 분노했다. 신탁 통치 반대는 애국 운동의 상징이었다. 그동안 어둠속을 전전하던 김창룡·노덕술 같은 친일파들은 거리를 활보하며 반탁을 외치는 반공 투사 애국자로 행세했다. 모스크바 3상 회의를 지지하는 좌익에겐 매국노란 꼬리가 붙었다. 신탁 통치 오보사건은 남한을 극렬한 혼란과 대립으로 이끌었다. 동아일보 사장인 송진우는 오보를 인정했지만 반탁 세력들은 그마저도 암살한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안을 제대로 보도했더라면, 우리가 겪고 있는 현재의 모순은 존재하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미래의 모순을 막기 위해서라도 현재의 언론이 해야 할 일은 분명해 보인다.

 

오룡 (오룡 인문학 연구소 원장, 경기도립 중앙도서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