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방 김정란 눈물 속으로 들어가 봐 거기 방이 있어 작고 작은 방 그 방에서 사는 일은 조금 춥고 조금 쓸쓸하고 그리고 많이 아파 하지만 그곳에서 오래 살다 보면 방바닥에 벽에 천장에 숨겨져 있는 나지막한 속삭임 소리가 들려 아프니? 많이 아프니? 나도 아파 하지만 상처가 얼굴인 걸 모르겠니? 우리가 서로서로 비추어 보는 얼굴 네가 나의 천사가 내가 너의 천사가 되게 하는 얼굴 조금 더 오래 살다 보면 그 방이 무수히 겹쳐져 있다는 걸 알게 돼 늘 너의 아픔을 향해 지성으로 흔들리며 생겨나고 생겨나고 또 생겨나는 방 눈물 속으로 들어가 봐 거기 방이 있어 크고 큰 방 삶이 감동만 이어지는 게 아니라는 건 학교를 마치고 사회로 나와 한두 달, 혹은 결혼 후 몇 년 살다보면 알게 된다. 감동과 서러움과 기쁨과 후회와 서글픔이 섞어찌개처럼 한데 섞여 우리와 한 방을 쓰며 살아가듯이, 그 맵고 씁쓸하고 달콤하고 아린 것들의 궁극에는 눈물 방이 있다. 슬퍼도 눈물이 흐르고 기뻐도 눈물이 흐른다. 사랑하는 이가 떠나도 눈물,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도 눈물, 슬픈 영화를 보다가도 눈물을 흘린다. 눈물은 강물처럼 흐르나 그 시작도 알 수 없고 끝도 알 수 없다. 우리
주먹 이시가와 다쿠보쿠 나보다 부자인 친구에게 동정 받아서 혹은 나보다 강한 친구에게 놀림 당해서 울컥 화가 나 주먹을 휘둘렀을 때 화나지 않는 또 하나의 마음이 죄인처럼 공손히 그 성난 마음 한편 구석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웅크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미덥지 못함. 아아, 미덥지 못함. 하는 짓이 곤란한 주먹을 가지고 너는 누구를 칠 것인가 친구인가, 너 자신인가 그렇지 않으면 또 죄 없는 옆의 기둥인가 산다는 게, 살아가는 게 죄 짓는 일의 연속이다. 둥근 엄마 뱃속에서 열 달을 보내고 처음 이 세상과 조우할 때, 인간이 손에 쥔 것은 두 주먹밖에 없다. 아프락사스, 부리 대신 주먹으로 한 세계를 깨부수고 다른 세계를 만난 것이다. 인간은 두 주먹 불끈 쥐고 험난한 가시밭길 세상을 헤쳐 나간다. 배고플 때 주먹을 깨물었다는 말, 그건 살아남고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리라. 그런데 세상은 주먹만 가지고서는 살 수가 없다. 요즘엔 돈이 주먹이고 권력이 주먹이고 학벌이 주먹이다. 주먹이 변변치 못해 마음속에 세상을 향한 분노의 카운터블로를 숨기고 다니는 사람이여, 당신의 적은 당신이 아니다. 당신의 적은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의 연약한 이웃이 아니다.
폭염 박성현 아버지가 대청에 앉자 폭염이 쏟아졌다. 족제비가 우는 소리였다. 아버지는 맑은 바람에 숲이 흔들리면서 서걱서걱 비벼대는 소리라 말했다. 부엌에서 어머니와 멸치칼국수가 함께 풀어졌다. 땀을 말리며 점심을 먹는다. 아버지의 눈을 훔쳐본다. 여자의 눈을 쳐다보면 눈이 뽑힌다는 아랍의 무서운 풍습을 말한다. 석류가 터질 때 아버지는 다시 아랍으로 갔다. 그리고 어머니는 빗장을 단단히 채우고 방을 나오지 않았다. 세밑까지 어머니는 화석이 되어 있을 것이다. 기다리면 착해진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다. 내게는 마음이 없고, 문도 없었던 겨울이었다. 아무 말 없이, 소처럼 묵묵히 밥만 먹던 시간이 있었다.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제 살(肉)을 베어 먹이던 어두컴컴한 시절이었으리라. 그리하여 어떻게든 살아지던 시절. 중동(中東)에 보내진 아버지들은 사막 위에서 길을 잃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돌아온 아버지가 가끔은 침묵의 밥상을 뒤집기도 하던 폭염의 시절이 있었다.
꽃의 탄생 윤의섭 불면이란 밤새 벽을 쌓는 일이다 감금, 꺼지지 않는 가로등처럼 뜬 눈으로 견디는 밤과 새벽 사이의 생매장 길 잃은 바람이 어제의 그 바람이 같은 자리를 배회하고 고양이 울음은 있는 힘을 다해 어둠을 찢는다 이 터널은 출구가 없다 어떤 기다림은 질병이다 간절한 소식은 끝내 오지 않거나 이미 왔다 가버리는 것 그러니 너는 얼마나 아름답단 말인가 머리를 남쪽으로 두고서야 겨우 잠이 든다 어떤 묘혈은 땅 속을 흘러 다닌다는데 머리맡에 꽃향기가 묻어 있다 첫 매화가 피었다고 한다 꽃 피는 시절이다. 기다리지 않아도 너는 온다. 와서, 한 시절 웃고 떠들다 흔적도 없이 돌아가는 게 꽃의 생이다. 사람들아,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다. 뭐 좋은 꼴 보겠다고, 모래알만도 못한 것들이 수만 년 정기 서린 바위를 뚫고 쪼개고 그 난리들인가. 초조하게 밖을 내다보는 꽃봉오리의 심정으로 살아갈 일이다. 조금은 겸손하게, 또 조금은 비밀스럽고 조심스럽게 생을 보낼 일이다. 어느 날 와락, 하고 열리는가 싶더니 벌써 지는가? 아, 꽃 같은 게 인생이다. 아무렴, 꽃 같은 인생이다.
감기 김어영 토요일 오후 감기가 찾아와 붙어 지내다 함께 의사를 찾아가 독한 알약을 처방받았다 집에 돌아와 혼자 방에 누웠는데 어느새 뒤쫓아 온 감기가 곁에 눕는다 할 수 없이 밤새 같이 앓았다 늘 곁에 두긴 했으나 20여 년 가까이 깊이 모르고 지내던 감기가 찾아왔다. 모르는 척, 몸 돌보지 않는 내가 괘씸했는지 이번에 나갈 기미가 없다. 열흘째 전신을 앓고 또 앓는다. 아예 몸속에 살림을 차린 모양이다. 아, 아프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좋다는데 당분간 안고 살아가야지. 감기 쫓아낸다고 내 몸을 새벽 문밖에 내놓을 수도 없고, 그래 가는데 까지 가보자. 아직 갈 길 먼 저 혼절의 시간들을 보듬으며. 박후기 시인 hoogiwoogi@gmail.com
■ 울림을 주는 시 한 편-79 천천히 먹어, 라는 말은 이인원 팔팔 끓어오르는 된장국 속 건지들처럼 모처럼 일찍 귀가한 네가 무지 반갑다는 말, 혼자선 슴슴했던 두부 부침을 넌 천배백배 더 구수하게 느끼기를 바라는 말 생선가시 하나하나 발라주며 낮에 있었던 일을 살짝살짝 염탐해 보려는 말 볼이 미어터지는 네 허겁지겁을 코앞에 붙어 앉아 은근히 즐기고 싶다는 말 네가 밥 한 숟갈 먹는 동안 나는 고팠던 너를 두 숟갈은 떠먹겠다는 말 물바가지에 띄운 버들잎 대신 시시콜콜 내 간섭을 숭늉처럼 후후 불어가며 마시라는 말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밥을 지어본 적 있는 사람은 알 수 있지. 밥과 함께 제 마음도 구수하게 익어간다는 것을. 밥이 뜸 들기를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에도 뜨거운 마음을 참지 못하고 사랑하는 이가 걸어오고 있을 창밖을 내다보며 손짓하던 사람들이여! 어느 날 갑자기 밥하는 일이 귀찮아지거든 밥통을 들여다보시라. 당신 마음이 밥보다 먼저 식지는 않았는지, 사랑을 속삭이던 뜨거운 입김이 벌어진 마음 틈새로 밥물처럼 빠져나가진 않았는지. 박후기 시인 hoogiwoogi@gmail.com
■ 울림을 주는 시 한 편-78 당신 김도언 당신은 지구에서 가장 친절한 사람의 목소리를 갖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을 들었던 사람이 오래 전 죽은 것은 온전히 당신의 불행이다. 매일매일 당신은 무릎 아래에서 올라오는 동생들의 저녁을 돌보고 어머니의 길고 긴 목을 닦아주었다. 오랫동안 배를 타다가 육지로 돌아온 거친 사내들은 당신의 생밤 같은 얼굴을 만지고 싶어 했다. 당신은 그 중 한 사내의 힘줄을 아무도 몰래 끊고 싶었다. 숲 쪽으로 세 번, 바다 쪽으로 두 번 울었던 여름, 당신은 정갈하게 애인과 헤어졌다. 피로 쓴 편지를 주고받은 적 없었으나, 심장에 그어진 파문 때문에 당신은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당신은 애인의 허리가 가르쳐준 굴욕을, 손톱을 베어내며 조금씩 떠올렸다. 하얀 종아리를 가진 애인을 죽이지 못한 것이 후회됐다. 달도 뜨지 않은 밤이 깊어, 마당에 매어둔 자전거들이 말처럼 휭휭 울었다. 당신은 관대한 사람들의 생애가 종종 실패하는 것을 목격했다. 별과 비와 시, 눈을 감아도 너무나 잘 보이는 것들만이 문제였다. 어머니의 배꼽을 베고 눈을 감은 아버지의 싱거운 모험을 생각하기도 했다. 동생들은 더디 자랐고 당신은 오랫동안 당
나의 고아원 안미옥 신발을 놓고 가는 곳. 맡겨진 날로부터 나는 계속 멀어진다. 쭈뼛거리는 게 병이라는 걸 알았다. 해가 바뀌어도 겨울은 지나가지 않고. 집마다 형제가 늘어났다. 손잡이를 돌릴 때 창문은 무섭게도 밖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벽을 밀면 골목이 좁아진다. 그렇게 모든 집을 합쳐서 길을 막으면. 푹푹, 빠지는 도랑을 가지고 싶었다. 빠지지 않는 발이 되고 싶었다. 마른 나무로 동굴을 만들고 손뼉으로 만든 붉은 얼굴들 여러 개의 발을 가진 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이 이상했다. 집을 나간 개가 너무 많고 그 할머니 집 벽에서는 축축한 냄새가 나. 상자가 많아서 상자 속에서 자고 있으면, 더 많은 상자를 쌓아 올렸다. 쏟아져 내릴 듯이 거울 앞에서 새파란 싹이 나는 감자를 도려냈다. 어깨가 아팠다. 불우(不遇)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이제 이 불우라는 말을 남의 것으로만 알고 산다. 살림이나 처지가 딱하고 어려움이란 사전적 의미를 우린 이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불우, 하면 불우이웃돕기란 말이 먼저 떠오르는 건 나이 30~40대를 넘긴 모든 이들의 공통된 감정이리라. 그런데 이 나라의 산업화가, 자본의 글로벌화가 정말 저 불우로부터 우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