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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신문이 만난사람

“용인의 도자기 역사 살리는 게 꿈”

Close up | 도예가 마순관 (백암도예연구소장)

   
 
20대 때부터 도예가의 길…’달항아리’ 고(故) 한익환 선생이 그의 스승
호암미술관, 한신대 팀과 50여개 가마터 발견 … 용인 도자기 재조명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사암저수지 앞에 위치한 백암도예연구소. 그곳에는 사람들에게 도자기를 만드는 법을 가르치기도 하고, 직접 도자기를 만들기도 하는 도예가 마순관 씨가 있다. 도예가라고 하면 폼 나게 수염을 기르고 한복을 입은 채 무게를 잡으며 말을 시켜도 묵묵부답으로 사람을 대할 것만 같은데, 마순관 씨는 소탈한 생김이며 말투가 고향에 사는 이웃아저씨 같다.
소박한 외모나 겸양하는 태도에서 눈치 채기어렵지만 사실 그는 이름이 꽤 알려진 중진작가다. 올해로 55세인 그는 20대 때부터 도예가의 길을 걸었다. 백암면에서 태어난 용인토박이인 그는 그가 살던 지역의 흙을 도자기 회사에서 가져갈 만큼 도자기를 만들기에 좋은 흙이 있는 곳에서 자랐다.
무언가를 만드는 일을 좋아한 그가 흙이 좋은 곳에서 자랐으니 도자기 만드는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군 제대 후 백암에 있던 한국고미술자기연구소에 연구생으로 들어갔다. 달항아리로 유명한 고(故) 한익환 선생이 그의 스승이다. 스승은 백자로 이름을 날렸지만 그는 분청사기 쪽에 더 관심이 많다.
“저도 처음에는 백자를 많이 만들었죠. 그리고 청자에 관심을 가졌다가 분청으로 기울었어요. 기법이 자유분방하거든요. 그렇지만 꼭 분청사기를 고집하는 건 아니에요. 옛날 것을 답습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보기 때문에 다양한 방법으로 창작을 하죠. 현대적이지만 전통을 바탕으로 해서 누가봐도 국적을 알 수 있는 것, 그런 작품을 만들려고 해요. 요즘은 도자기의 조형성을 중시해서 기능성보다는 조형성만 갖춘 작품들이 많은데 저는 생활에서 쓸 수 있는 기물, 쓰임새까지 고려하는 공예품을 만들려고 하죠.”

# 도자기 강좌로 도예 대중화
그에게 도자기 만드는 법을 배우기 위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백암도예연구소로 온다. 교육방송에서 생활도예 강좌를 맡아 몇 개월 동안 방영이 돼서 그런지 도자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인지도도 높고 그에게 도예를 배우겠다며 찾아오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래서 백암도예연구소에는 회원이 500명이나 된다.
이들은 이곳을 찾아와서 자유롭게 도자기를 만들고, 연습한다. 도예를 배우는 사람들끼리 서로 가르쳐주고 배우기도 한다. 어떤 회원은 회사 일을 끝내고 저녁에 찾아와 밤새도록 만들기도 하고 주말에 가족과 함께 오는 사람들도 있다.
마순관씨는 회원에게 강습료를 따로 받지 않는다. 재료비 정도를 받을 뿐이다. 그것도 처음엔 받지 않다가 회원들이 스스로 재료비를 걷기도 하고 연구소 이용에 서로 불편함이 없도록 규칙을 정해 내는 것이다.
마순관 씨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백암도예연구소를 방문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다. 연꽃마을 노인들과 영보자애원 원생, 용인정신병원 환자들과 상현동 주민자치센터 도예반, 대안학교 헌산중학교 학생들 등 다양하다. 연꽃마을과 영보자애원 장애우의 경우도 흙값만 받고 가르친다.
정신병원이나 서북부 장애인복지관에서 도자기 만드는 것을 미술치료로 해보았는데 참석율도 좋은데다 흥얼거리며 노래도 하고 흙을 만지며 진지하게 무언가를 만드는 체험이 안정감을 찾고 작품을 완성하는 성취감을 이끌어내 좋은 치료가 되는 것 같다고. 영보자애원의 자활프로그램이나 중학교의 특기활동, 정신지체 장애우의 미술치료, 어느것 하나 쉽지 않다.
번거로운 일도 그렇고 그가 부담해야하는 비용이 더 크지만 도자기를 만든다는 것이 그들에게 마음의 치료가 되는 것을 아는 터라 강의를 거절하지 못한다.
그는 도예가로 유명하지만 용인의 가려진 도자기 역사를 알리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온 향토학자이기도 하다.
“일본은 3~400년 된 가마를 가지고도 관광지화해 도자기 만드는 시범을 보이면서 도자기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도자기 하면 여주, 이천, 광주를 꼽지요. 우리 용인은 더 좋은 기반을 갖추고 있는데도 그걸 못 살리고 있습니다. 너무 안타까워요.”
그는 용인의 서리 백제 요지를 비롯해 용인의 도자기 역사를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 해왔다.

# 용인 도자기 역사 부흥에 전력
“제가 서리 백자요지와 관련해서 학술대회도 참여하고 연구도 했어요. 도자기 엑스포 때 저보고 광주, 이천 쪽으로 오라고 했지만 가지 않았습니다. 용인에서 들꽃과 도예의 만남이라는 축제를 열기도 했고 서리에서 막사발 장작가마 축제를 열기도 했죠. 서리 요지에서는 도공들을 위한 진혼제도 지냈어요. 지금 서리 백자요지에 컨테이너 박스가 현장 박물관식으로 있는 데 그나마 그것도 제가 얘기해서 만든 거예요.”
용인시 서리에 위치한 백자요지는 고려시대 가마터로 백자, 청자, 도기 조각과 도자기 작업에 관계되는 건물터가 조사됐다. 특히 가마는 벽돌로 된 가마와 진흙으로 지은 가마가 확인됐는데 벽돌 가마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밝혀진 것이고 진흙 가마는 길이 83m의 대형가마로, 출입구가 27개나 확인됐다.
벽돌·진흙 가마의 존재와 두터운 퇴적층은 우리나라의 도자기 발생과 변천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역할을 한다.
“일본에는 천년된 가마가 없어요. 그런데도 도자기로 관광지화 하지요.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도자기 엑스포를 해 봐야 입장료 수입밖에 없어요. 사람들이 보고 가면 그만이죠. 용인은 서울과 가까워서 숙박을 하지 않지만 에버랜드나 민속촌 같은 곳과 연계해서 도자기 역사 상설전시관, 체험관을 만들면 많은 사람들이 올 수 있어요. 다른 곳이 아니라 용인에 도자기를 판매, 전시하는 곳을 만들어야 해요. 우리가 갖고 있는 자원에 연계한 관광 사업이 필요하다는 얘깁니다. 서리가 고려 백자 가마터라고 사적 지정이 됐지만 막상 그곳에 가도 사람들이 체험할 수 있는게 없어요. 그곳에 문화 공간을 만들고 현장을 복원하고 실습장을 만들어야 해요. 서리 가마터 복원을 하고 도공들이 도자기를 만드는 것을 보여주면 여주와 이천의 도공들도 많이 올 겁니다. 용인의 도자기 문화를 제대로 이어갈 수 있어요. 1천년된 가마터가 다른 데는 없습니다. 용인 사람이면 용인이 도자기 발원지인 것을 알아야 해요. 저렇게 사적으로 지정만 해둬서야 누가 알겠습니까. 다들 여주, 이천, 광주만 알잖아요. 그건 산업도로가 그렇게 연결되면서 근래에 교통이 좋아지면서 개발한 거예요.”
서리 백자요지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할 애기가 많았는지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역사성이 있는 가마가 용인의 도자기 역사를 증명해주고 있어 이를 살리면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는데도 서리 백자요지가 용인에 사는 사람들에게 조차 알려지지 않고, 가려져 있는 것이 안타깝다는 것이었다.
그가 호암미술관, 한신대 등과 팀을 이뤄 용인 곳곳을 조사한 결과 용인에만 50여개소의 가마터가 있다고. 즉 다른 곳에 비해 용인이 도자기를 만드는 입지 조건이 돼 있다는 것이다.
“서리 복원 얘기는 제가 용인에서 15년간 했어요. 그러면 뭘 해요. 될 듯 하다가도 시장이 바뀌면 흐지부지 돼버리는걸.”

# 도자기 도시 용인 가능성 살려야
용인에서 도자기 역사를 다시 살려보겠다는 꿈은 반쯤 접은 채 그는 대신 다른 노력으로 꿈을 키웠다.
“도자기가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고 사랑받으려면 대중화돼야 해요. 일본은 대중화 돼있기 때문에 도자기 문화가 꽃필 수 있는 겁니다. 일본은 오래 전부터 주민센터 등을 통해 강습이 일반화 됐어요. 도자기를 배운 사람들이 도자기에 관심을 갖게 되는 법이니까요.”
그래서 그는 열심히 강의를 한다. 도자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키우는 것이 도자기 문화를 대중화하는 것이고 그의 낙이고 보람이라고.
가르치는 중에 즐거움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고민도 많다. 창작에 대한 갈증때문이다. 1998년 초대 용인예총 회장을 맡아 4년간 일하기도 했지만 예술인들의 창작활동 권익을 보호하는 활동을 하는 사이에 자신의 작품을 만들 시간이 없었다.
용인의 도공 후예로 그가 자신이 용인에서 해야할 일은 용인의 도자기 터를 복원해 용인이 도자기의 도시로 다시 제 위치를 찾는 것이지만 이 조차 오랜 노력이 여러 차례 수포로 돌아가면서 작품 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만 간절해졌다. 예총 회장을 그만둔 것은 작품을 하기 위해서였지만 강의를 소화하고 연구소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다보면 작품에 전념할 시간이 부족한 상황이다.
“이제는 그간 제대로 하지 못한 제 작품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2년 후에 강원도 양구로 떠날까 생각도 하고 있어요. 양구엔 왕실도자기를 만들던 흙이 있거든요. 그쪽은 지자체에서 없는 형편에도 도자기 박물관을 지었더라구요. 그쪽에서 오라고도 하고. 그래서 산에 들어가 제 작업을 할까하는 생각도 합니다.”
용인의 도자기 역사를 연구하고 만들며 서리 요지 복원을 위해 십 수 년을 뛰어 온 그가 용인이 도자기의 도시로 다시 피어나는 날을 만나길 기원한다.

글|유성민 객원기자/ 사진|김호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