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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신문이 만난사람

“집착 벗어난 삶…장욱진을 그리며”

천재 부인의 운명…장욱진 회고의 글 집필 중박숙현의굿피플/| 장욱진 미망인 이순경 여사

   
 

올해 90세인데 누가 그 연세로 볼까. 고 장욱진 선생의 미망인 이순경 여사.
천진무구한 그림으로 보는 이들을 동심으로 이끌었던 장욱진 선생의 말년 화실 마북동 고택에서 이 여사를 만났다. 그녀는 현재 장욱진 선생에 대한 회고의 글을 집필 중이라고 했다.

평소에 불교 공부를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이 여사는 무릎 관절 때문에 분당 서울대 병원에서 수중 운동하는 외에는 건강하단다. 기거는 역시 마북동에 있는 작은 한옥에서 불교 공부를 하며 머물고 있다. 1986년 용인에 처음 내려와서 마북동 고택(화실)이 수리중일 때 한 달 여를 장욱진 선생이 작업실로 사용했던 화실이다.
“화실이 없다고 그러니까 두손 화랑에서 지었어요.”
이 여사는 고택에 매주 일요일 들른다.

“일요일에는 애들이 모이니까.” 5남매를 뒀는데 장욱진 선생이 유독 아꼈던 맏딸 장경수씨는 현재 경기여고 경운박물관 운영을 책임지면서 장욱진미술문화재단 운영을 위한 공부중이라고 했다. 경수씨도 아버지를 무척 따랐다. 조용한 것을 좋아하던 장욱진 선생은 경수씨가 조잘조잘 수다를 떨면 “배먹은 것 처럼 시원하다”며 좋아했단다.

혹시 자녀 중에는 화가가 없을까. 둘째딸 장희순씨가 염색을 하고, 셋째 혜수씨가 섬유예술을 하는 외에 화가는 없다. 나머지는 과학을 전공했다.

“재료나 사줘라. 제 속에서 우러난 그림이어야지 학원에서 선생보고 흉내 내는 것은 예술이 아니다. 그림은 자기가 절실히 느낄 때 하는 것이다.”
생전 장욱진 선생은 절대 외향으로 시키지 말고, 강제로 하게 하지 말라고 했단다.

# 세상을 심플하게 살다 간 장욱진
장욱진 선생은 마북동 양옥 화실에서 작업하던 시절인 1990년 12월 27일에 돌아가셨다. “새벽 2시면 일어나서 패치카에 불을 지피곤 했는데(명륜동 자택), 그날도 불을 지피고서는 자꾸 엎드리며 쇼킹이 오는 것 같다고 했어요. 천식이었거든요. 1년 괜찮았는데, 점심 식사를 비원 앞에서 하고 또 쇼킹 오는 것 같다고 해서 그저 평생 술 좋아하시던 분이라 한국병원 응급실에 가서 주사기 꽂고 누워있으면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4시에 돌아가셨어요. 애들과 전화통화를 하면서 나는 아버지가 숨을 안 쉰다고 했을 뿐이에요. 너무 어이없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 순간이 믿기질 않았어요.”
“시집을 갔더니 작업실이 한칸 반이에요. 옷도 한 벌이면 족했어요. 새옷을 사다주면 입던 옷은 내다가 없는 사람 줘버렸어요. 두개를 못 보는 거에요. 집착에서 벗어난 것이죠.”
작품도 30호 이상이 없다.
“왜 크게 안 그리냐고 했죠. 그랬더니 작은 게 재밋다고 했어요. 원래 그래요. 30호 이상은 싱겁다는 게 지론이에요. 덜 신경이 간다는 것이죠.”
뭐든 큰 게 부담이라고 했던 그는 그가 아끼던 물건도 모두 작았단다.

# 용두산 방랑이란 말이 나왔어요
당시 그림을 그려서는 밥을 굶기 꼭 알맞던 시절, 일본 동경 제국미술학교를 나온 장욱진 선생과는 아버지(이병도 박사)의 중매로 만났다. 6.25때 부산 피난 시절, 외자청 부산사무소 소장으로 있던 장욱진의 큰 형 집에 머물렀다. 그런데 장욱진은 형님 집에서 숙식을 하지 않고 소주 대병을 하나 들고 배회했다. “용두산 방랑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 거에요. 영도에 도자기 공장이 큰 것 있었는데 거기가 예술인 집합소였어요. 거기 아니면 혼자 방황했어요.”
왜 그랬을까. “원래 심플하잖아요.” 피난시절인 51년 두달 간 고향에 올라가서 말라버린 에나멜을 석유에 찍어 갱지에 그린 게 보리밭이다. 원래 성격이 말수도 적고 남과 잘 어울리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직관과 위트가 무척 뛰어났다.

# 말 실수로 비싸다고 소문만 났었죠
64년에 반도화랑(지금 현대화랑)에서 처음 개인전을 했다. 그때 한 장이 팔렸다. 그림을 사 간 사람이 놓고 간 명함이 일본면화주식회사 전무였는데, 그림을 찾으려 했으나 못 찾았다. 담배갑 만한 크기의 가족도였다. 74년에 공간화랑에서 두 번째 전시를 했다. 기자들이 왔는데 그림을 왜 안파느냐고 하길래 “요만한거(손바닥 반을 내보이며) 팔면 얼마 받아. 잘 못 그리면 긁어내고 다시 그리고 해서 긁어낸 가루가 한 웅큼인데, 그 애쓴 것을 어떻게 파느냐. 많이 주면 모를까 안판다”며 안판다는 뜻을 강조한다고 했던 말이 신문에는 그림 비싸다고 보도됐다. “내가 말실수를 한거지”라며 웃는다. 두 부부는 그림 팔 생각도 안했고 팔지도 않았다. 화가 중에서 가족들이 그림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경우에 속한다. 총 700여점 그린 가운데, 100여점을 가족이 소장하고 있다.

# 이 여사가 서점 운영해 생계
“그림을 전혀 판다는 생각도 못하고, 그때 누가 사.” 외향적인 성격의 이 여사가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혜화동 로터리에서 동양서림을 했다. 교과서 공급권을 따서 신학기에는 4톤 트럭으로 40차를 납품했으니 생활이 어렵지 않았다. 명륜동 자택을 떠나 12년간 덕소 화실에 머물 때 장욱진 선생은 직관력이 뛰어나서 아이들이 조금만 아파도 슬리퍼를 신고 달려왔다. “아무도 연락하지 않았는데도 직관이 그만큼 뛰어났어요. 원래 부드러운 사람이고 고운 것을 좋아했어요.”

# 천재의 마누라는 힘들겠다
선생이 술을 좋아했기 때문에 이 여사는 바짝 긴장했다. “술 한번 마시면 얼마나 길어. 처음에는 심심해서, 그다음에는 술이 술을 마셨어. 물론 작품이 안되면 마셨지. 그게 계속이어져서 죽기 살기로 마셨어. 길면 20일이었어. 처음엔 안주를 들었지만 나중에는 소금만 찍어 먹었어. 나는 술이 시작될까봐 제자들을 못 오게 했어. 아이템이 떠야 할 게 아냐. 안되면 그렇게 몸부림친거야. 작품 구상 떠올라야 종료됐어. 술을 마시면 점점 예민해지는데 그림 그릴 때면 딱 끊었어.” “천재가 딴 게 천재가 아니더라. 전생에 하던 것 다시 하는 거야. 내려오는 재주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냐. 한 붓에, 기가 막혀 그게. 제자들이 스케치할 때 경치 보고 그릴라치면 뭘 끄덕끄덕 하냐며 한 붓에 한 선이야.”

# 생전에 집을 7채 짓다
1호는 1960년에 명륜동에 초가를 사서 양옥으로 지었다. 1963년에는 덕소에 17평짜리 화실을 창고처럼 지었다. 12년을 그곳에서 혼자 지냈는데, 이여사와 아이들이 일주일에 한번씩 반찬을 해들고 찾았다. 3호는 명륜동 집과 바로 붙은 집이 고종황제 사촌집이라고 해서 궁집 혹은 나랏집이라고 했는데 판다길래 담만 헐어 고쳤다. 연못을 파고 옛집 부엌을 화실로 꾸며 초미니 화실을 만들었다. 4번째는 수안보시절인데, 그때는 집을 짓지 않고 농가를 샀다가 팔았다. 5번째가 용인이다. 현재의 고택이 그것인데 당시 기둥만 남았던 집이라 수리했다. 사랑방에 앉아 앞산 진달래 핀 것을 보는 것을 그렇게 좋아했다. 6번째는 고택 옆에 지은 양옥 화실이다.

# 장욱진이 가장 아꼈던 그림
장욱진이 가장 아꼈던 그림은 1939년 작 ‘소녀;다. 얼굴이 투박하게 생겼는데 피난갈 때 이것 하나만 품고 갔단다. 좋아하던 소녀였나보다며 질투나지 않냐고 했더니 아니라며 웃는다. 질투 날 얼굴은 아닌 것 같다.

# 시골만 다니다
“그이는 시골만 다녔어. 왜 그랬냐면 화가가 어느 정도 그리면 화랑이 전시하자고 그냥 안두기 때문이야. 신문 보면서 이런 거 때문에 시골에 있는다고 했어. 1년에 서너번씩 어떻게 전시하냐며. 벌거벗고 평가 받는건데 몇 년 그려서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지.”

이 여사는 밤에 도망가야지 하는 생각을 숱하게 했단다. 그러다 다음날 아침에는 내가 도망가면 저이가 죽지라는 생각에 도망도 못가고 살았단다.

7번째 집인 집운헌에 앉아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듣다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 초당을 좋아했던 장욱진은 이곳 초당에 명륜당 초당에 걸렸던 현판 관어당을 떼어와 달아놨다. 관어당은 이 여사의 아버지가 연못의 잉어를 바라본다 하여 지어준 이름이다. 한때 소방도로다 개발이다 하면서 시끄럽던 일이 어제 같다. 지난해 6월에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이 돼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