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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을 주는 시 한 편-31|야구공을 던지는 몇가지 방식|하린

야구공을 던지는 몇가지 방식

하  린

 

직구 - 아버지
소속팀을 또 옮겼다 군내 버스가 하루에 두 번만 들어오는 동네에서 우루과이라운드라는 새로운 규칙이 발효되자 방어율이 형편없었던 아버지가 마지막 생산의 밭을 자르고 도시 변두리로 이적료도 없이 옮겨갔다 주물공장으로 빨려 들어간 건조한 어깨가 은퇴를 예감하게 했다 뜨거운 쇳물에 발등이 데인 후 공의 구질이 너무 단순한 게 문제였다고 실토했다 직구만을 던지던 습성은 시즌 내내 흥행 없이 끝나고 말았다 아버지의 낡은 감독은 재래식 화장실에서 똥닦이로 사라져간 윤리교과서였다

슬라이더 - 어머니
원래 직구를 가장 잘 구사하는 사람은 어머니다 술 취한 아버지에게 얻어맞고도 끈질기게 땅만 팠다 논과 밭에 구사하는 느리고 정직한 구질은 진딧물 탄저병 태풍에게 쉽게 홈런을 허용했다 어머니도 변두리 식당으로 소속팀을 옮겼다 뻔한 직구 대신 반찬에 미원을 쓰며 변화구를 구사했다 손님들의 혓바닥은 방망이 한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어머니의 구질에 속아 넘어갔다 어머니는 한동안 집안에서 A급 선수로 인정받았다

포크볼 - 형
왼손잡이였다 형이 마운드에 들어서면 출루하는 놈들이 많았다 1군들만 모인다는 S대학교 도서관에서 철학책이나 들추다가 약삭빠른 놈에게 안타를 맞고 도루까지 허용했다 졸업도 하지 못한 채 강판 당했다 형은 소속팀을 떠나 지리산과 인도에서 전지훈련을 했다 6년 동안 형이 사라진 후 ‘제 3의 물결’이 밀려와 새로운 구질을 가진 젊은 선수들이 주목받았다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광속의 구질을 형은 구사하지 못했고 2군으로 밀려나더니 결국 면사무소 말단 직원으로 떨어졌다

커브 - 누나
누나는 일찌감치 포수로 돌아섰다 인기가 많은 투수를 거부한 채 마을금고의 포수가 되었다 마을금고의 감독은 자꾸 변화구를 받아 내라고 주문했다 VIP 고객들은 누나의 미끈한 다리 사이에 입금하길 원했고 누나는 승률을 위해 적당한 편법을 동원했다 야간 경기도 서슴지 않았다 누나의 실적은 높아졌고 승진하여 곧 코치가 될 거라고 했다

마구 - 나
나는 실업팀에 무명선수가 되었다 임시직을 반복하다 30대 중반을 넘겼다 아무리 기다려도 스카우트 제의는 없었다 정식 선수가 되는 걸 보지 못한 채 아버지가 죽던 날 승리의 기쁨인지 패배의 억울함인지 어머니만이 눈물을 흘렸다 형과 누나는 벌건 육개장 국물에 지루한 감정을 휘휘 저어 먹었다

 

 

 

이쯤 되면 ‘눈물의 코리안 시리즈’다. 야구와도 같은 ‘그것이 인생’이라고 담담한 어조로 말하고 있음, 이라고 말하면 윗글에 알맞은 주제가 될까? 삶을 살아가는 ‘몇 가지 방식’을 아주 장황하게 풀었지만, 하린 시인은 평소에 말수가 적다. 미소만 살짝 흘릴 뿐, 감정의 기복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다. 대개 마운드에 오른 투수들이 그러하듯(하긴, 타자에게 표정을 읽히는 순간 지는 거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투수가 있다. 9회 마지막까지 던지고 내려오는 자, 혹은 게임 중간에 강판 당하고 쫓겨나는 자. 어차피 언젠가는 둘 다 생이라는 마운드에서 내려와야 하는 것을……. 어쨌거나 하린이 얼마 전 3회말 투아웃 풀카운트까지 가는 접전 끝에 회심의 일구를 던졌으니, 바로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이라는 제목의 첫 시집이다. 그는 얼핏 기교파 같아 보이지만 정통파 시인. ‘칠 테면 쳐 봐라!’ 누군가의 가슴에 ‘뻥’ 소리 나는 직구를 뿌릴 줄 아는 자다. 한 가지 구질만 고집하면 ‘약삭빠른’ 사람들에게 두들겨 맞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시라는 묵직하고 단조로운 구질만을 마구 던진다.       <박후기 시인 hoogiwoogi@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