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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을 주는 시 한 편-32|집시의 침대|오주리

집시의 침대

오주리

 

서울은 시민들에게 잠자리를 주지 못한 죄의식으로 신도시라는 새로운 죄를 짓기 시작했다 서울의 변두리를 벗어나 언저리에 소외된 그림자들이 걷듯 아파트들이 서고 탈주의 끝이 철조망이듯 도로는 8차선이나 자유는 없다 그럼에도 집시들은 시민이란 이름과 잠자리에 감격하여 자유와 평등 그리고 투표권을 예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집시들은 투표일에 꼭 주민등록증을 잃어버리거나 술 때문에 일어나지 못한 날이 하필 투표일이거나 한 것이었다

신도시의 시멘트 냄새는 냉동실의 공기처럼 신선했다 그러나, 완성되지 못한 그림의 유화 물감 냄새 위로 제 때 가리지 못한 정액 냄새가, 완성되지 못한 노래의 오선지 위로 제 때 치우지 못한 토사 냄새가, 완성되지 못한 원고의 잉크 냄새 위로 제 때 숨기지 못한 대마초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수돗물을 얼린 얼음처럼 무균질의 시민 의식을 지닌 시민들은 집시들로부터 시민이란 이름을 박탈하고 그들의 침대를 위생처리 하기로 할 수밖에 없었다

집시들은 침대가 놓여 있던 도시를 잊고 다시 주민등록증이 필요 없는 노숙 생활로 돌아갔다 자유야 그들의 천성이었고 평등이야 그들에게 과분했다 시민은 그들의 이웃이었고 투표권은 대통령도 한 표이니 만족했다 집시들은 미완성작들을 위한 진혼 의식을 술과 노래의 밤들로 대신했다 그러나 집시의 아이들은 부모를 따라 그림과 시로 구걸하는 법을 배우면서도 밤이면 침대에서 자는 꿈을 그리고 또 그리는 것이었다

 

 

 

영하의 날씨와 폭설, 가축들의 생매장으로 점철된 겨울이었다. 지난 3년이 어쩌면 지난겨울 같았다. 1%를 제외하고 모두 가난한 집시로 전락했다. 위로부터 30%라고 착각한 아래로부터 70%는 ‘침대’와 영혼을 바꾸기로 작정했으며, ‘한 표’에 영혼을 팔아넘겼다. 집시로 전락한 사람들은 아이들이 먹는 ‘밥’을 꿈꾸는 일조차 불온한 일로 떠넘기는 권력 앞에서 침묵했다. ‘자본=자유’라는 신자유주의 등식이 한국식 자본주의로 인식됐고, 도덕은 썩어문드러졌다. 201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한 오주리 시인은 현실인식을 한 단계 끌어올려 미학과 접목시키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침대’와 ‘침대의 크기’를 삶의 잣대로 여기는 집시들, 70%는 여전히 ‘시민이란 이름과 잠자리에 감격하여 자유와 평등 그리고 투표권을 예찬’하는 소시민들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시인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겠는가. 다만, 다음 선거 때는 ‘투표일에 꼭 주민등록증을 잃어버리거나 술 때문에 일어나지 못한 날이 하필 투표일’이라는 핑계를 대지는 말자는 것이다. ‘밤이면 침대에서 자는 꿈을 그리고 또 그리는’ 99%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박후기 시인 hoogiwoogi@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