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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을 주는 시 한 편-36|체 게바라에게|김요일

체 게바라에게

김요일

 

친구, 잘 있었나
어딘지 알려줄 순 없지만 국경 너머의 외곽 도시에 와 있네
벌써 몇 년 됐지 가끔 쓸쓸하기도 하다만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라 술도 있고 여자도 있다네

주일이면 시골 성당 성가대에 앉아
Miserere mei*, Miserere mei 찬양하고 있어
세상을 살해하지도 못하고 떠돌다
이곳에 흘러든 건 혁명에 실패해서만은 아니지

인간은 용서받기 위해 존재하나 봐
결혼 한 번 못해본 검은 옷의 녀석들에게
고해를 하진 않지만
Miserere, miserere 화음을 맞추다 보면
불협의 대위법으로 어깃장 놓던
잔인하고 불량했던 진압군 시절마저 용서받는 기분이 드니까

성경책을 넘길 때 비릿한 슬픔이 책장에서 풍겨나는 까닭은
우리 손에 배었던 죄 냄새가 묻어있기 때문이야
신이 없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비밀,
눈이 마주치면 입가에 살짝 미소를 걸어주지

찾지 마 잊지도 마
이곳에서의 이름은 이방인 K,
아직 담배는 끊지 못했어

* ‘긍휼히 여기소서’라는 뜻의 라틴어.

 

 

 

이제 더 이상 낭만주의자는 없다. 혁명을 이야기하거나 끝없는 논쟁으로 하얗게 밤을 지새우는 혁명가도, 외상술을 마시는 시인도 없다. ‘불온서적’이란 말이 다시 등장한 영혼의 구석기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사랑도 사고팔고 혁명가의 얼굴마저도 사고 팔리는 자본 만능의 시대. 사람들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일요일마다 부지런히 움직이며 속으로 한 마디 Miserere mei. 그러나 쉿, ‘신이 없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비밀’이다. 낭만을 모르는 사람이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른다고? 피가 식은 시인의 시일지라도 울림을 줄 수 있다고? 모두 허튼소리. 등단한 지 20년, 시집 한 권이 한 편의 시로 이뤄진 첫 시집 이후 17년 만에 『애초의 당신』이란 시집을 낸 시인 김요일. 그는 진정 시를 기다릴 줄 아는 시인이다.
<박후기 hoogiwoogi@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