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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을 주는 시 한 편-49|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김 산

■ 울림을 주는 시 한 편-49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김 산

 

무럭무럭 늙던 할머니의 왼편을 바람이 쓰러뜨렸네
시누대처럼 꼬장꼬장한 할머니의 허리가 도루코 날처럼 접혔네
손목이 접히고 입이 뒤틀리고 무릎이 오그라들었네

엉금엉금 할머니는 학교 갔다 온 나에게 엄마, 엄마, 불렀네
배고파, 배고파, 저 년은 밥도 안 주고 서방질만 한다고,
엄마, 엄마, 나물에 고기반찬 좀 해줘, 어린 내게 졸라댔네

나는 양푼 가득 장조림과 콩나물을 비벼 바람의 아가리에 들이부었네
반은 흘리고 반은 바람이 먹고, 반은 흘리고 반은 바람이 마시고,
뚱뚱해진 바람이 가계의 비닐 창마다 숟가락만 한 구멍을 냈네

어느 가을, 학교 갔다 오니 할머니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셨네
스테인리스 오강 단지를 타고 지붕을 뚫고 우주로 날아가셨네

나는 요즘도 문득문득 양푼을 들고 바람의 入口를 더듬거리네





이제, 우리들의 할머니는 모두 시골집 아니면 요양원에 계신다. 살아 있어도 살아가는 게 아니고, 죽어도 흙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이란 말은 마땅히 ‘내 몸에 불 들어가기 전까지는~’으로 수정 되어야 한다. 아무려면 어떤가. 어차피 살아서도 죽음을 체험하고 계신 우리들의 할머니들인 걸.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고, 할머니는 만날 똑 같은 말만 해요’라고 말하는 철부지 아들아! 사랑은 원래 그런 것. 반복적인 관심, 관심의 반복, 스스로 다지는 다짐 같은 것. 연애할 때 사랑해, 사랑해,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고. 백 번 말하고 들어도 질리지 않던 그 말을 어느 순간 이 아비는 잊어버렸구나. 그런데 아들아, 너의 할머니가 내 어머니란 사실을 나는 왜 종종 잊고 사는 것이냐! 네가 할머니 귀에 대고 속삭이는 사랑한단 말을 나는 왜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보질 못한 것이냐!
<박후기 시인 hoogiwoogi@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