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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을 주는 시 한 편-75|대설주의보|최승호

대설주의보
                                     최승호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밭을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읽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르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읽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 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 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강원도에는 폭설이 내린다는데, 대설주의보라는 말을 들어본 지도 몇 해 되었다. 물가(物價)를 이야기하며 군부독재시절이 좋았다는 말을 함부로 입에 담는 당신을 보며 어젯밤 나는 슬퍼졌다. 돈 몇 푼을 들고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늙고 낡은 가여운 영혼 앞에서, 언젠가 영화에서 본 적 있는, 마침내 자유를 얻었으나 다시 노예로 살기를 자처하는 길들여진 흑인의 검은 눈동자를 떠올렸다. 어젯밤, 눈도 비도 아닌 어정쩡한 것들이 우리의 앞길을 더럽히고 있다고 차마 말하지 못하였다.
박후기 시인 hoogiwoogi@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