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0 (금)

  • 구름조금동두천 14.8℃
  • 구름조금강릉 22.0℃
  • 맑음서울 15.0℃
  • 맑음대전 14.6℃
  • 맑음대구 16.1℃
  • 맑음울산 18.3℃
  • 맑음광주 14.5℃
  • 맑음부산 19.2℃
  • 맑음고창 12.7℃
  • 맑음제주 16.2℃
  • 맑음강화 15.2℃
  • 맑음보은 12.1℃
  • 맑음금산 11.6℃
  • 맑음강진군 13.4℃
  • 맑음경주시 16.0℃
  • 맑음거제 15.6℃
기상청 제공

겨울은 철거를 기다린다

울림을 주는 시

울림을 주는 시 한 편-120


겨울은 철거를 기다린다


최형심


빈집으로 바람이 부산히 출퇴근하는 동안, 오후가 조금씩 그늘을 입는 동안, 나뭇가지 끝에서 해체된 집들이 똑똑 물방울을 따먹는 동안, 막다른 골목을 노부부의 빈 수레가 걷어갈 동안,

버려진 목숨들이 서로를 보듬어 탑을 이루었다. 묻혀있던 봄 소매를 끌어당기며 노파가 쪼글쪼글 웃어 보인다.

백열등 아래 병아리 다리가 나오는 소리, 고드름이 몸을 내주는 소리, 유리벽 안에 붙잡힌 화분이 조용조용 나비문양을 그리는 소리, 가방에 햇빛을 가득 담고 개학식에 가는 아이들의 발소리,

노부부는 가슴을 들추어 소리를 꺼낸다.

가파른 골목 끝까지 번진 질기디 질긴 겨울은 곧 그곳에서 철거될 것이다.




아니지, 철거를 기다리는 건 골목이 아니라 골목을 배회하는 노인들의 녹슨 뼈대일 거야. 형식의 뼈대, 육신의 뼈대가 무너져 내리면 그 동안 보이지 않았던 사랑이란 관념의 뼈대가 비로소 실체를 드러내 보이는 거야. 영화 아무르(Amour)의 노인들처럼, 죽음이 곧 사랑의 뼈대란 걸 알게 될 거야. 겨울이 가면 봄이 오겠지만, 사랑이 가면 다시 겨울이 찾아오지. 철거 계고장을 들고 찾아오는 봄에 대해 알고 있어. 담벼락 귀하, 목련 사유지 내 가림막 철거 촉구! 귀하와 노인과 빈 수레와 고드름 등 버려지거나 버려질 목숨들이 자리하고 있는 겨울 골목은 향후 봄과 목련의 입지 예정지입니다. 그러므로 목련이 피기 전까지 스스로 무너져 주시기 바랍니다. 만일 본 기간 내에 무너져 내리지 않을 경우, 관련 규정에 의거 강제로 무너뜨릴 수밖에 없음을 알려 드리오니 이점 유념하시어 적극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그리하여 봄은 왔지만 여전히 봄은 아니었다.

박후기 시인(hoogiwoogi@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