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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그늘 속, 검은 잠

울림을 주는 시 한 편-125

울림을 주는 시 한 편-125

흰 그늘 속, 검은 잠

조유리


한 삽 푹 퍼서 언덕 아래로 뿌리면 그대로 몸이 되고 피가 돌 것 같구나

목단 아래로 검은 흙더미 한 채 배달되었다
누군가는 퍼 나르고 누군가는 삽등으로 다지고

눈발들이 언 손 부비며 사람의 걸음걸이로 몰려온다
다시 겨울이군, 살았던 날 중
아무것도 더 뜯겨나갈 것 없던 파지(破紙)처럼
나를 집필하던 페이지마다 새하얗게 세어

먼 타지에 땔감으로 묶여 있는 나무처럼 뱃속이 차구나
타인들 문장 속에 사는 생(生)의 표정을 이해하기 위해
내 뺨을 오해하고 후려쳤던 날들이

흑(黑)빛으로 얼어붙는구나
어디쯤인가, 여기는

사람이 살지 않는
감정으로 꽃들이 만발한데

죽어서도 곡(哭)이 되지 못한 눈바람이 검붉게 휘몰아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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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 죽어본 적 없으니, 우리가 죽음을 알 턱 없으나 죽음을 모르고 어찌 생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죽음에 대한 고찰 없이 어찌 인간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죽음이 생의 목적지는 아닐 텐데 우리는 어째서 넋 놓고 살다 죽음 앞에 도착해서야 지나온 시간을 후회하는 것일까. 왜, '타인의 문장 속'에서 당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냐. 단 한 줄이라도 나의 생을 살아야 하느니, 몇 번의 봄이 당신 앞에 나타났다 사라질 것 같은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생각처럼 길지 않으며, 생은 인저리 타임(Injury Time)도 없다.
박후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