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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독서

울림을 주는 시

올바른 독서


조율


가능하면 나는,
그 남자에게 나를 잃겠습니다.
환불교환 가능한 백화점 영수증 첨부된
비싸지도 싸지도 않은 선물 대신
아무도 사지 않는, 역마살처럼 옮아간
그 남자의 푸르뎅뎅한 사랑,
오래전 이사 온 집의 번지수처럼 아득한,
그 남자 등초본 속 이름 한 권 분양받겠습니다.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남자라고 읽겠습니다.
밑줄을 긋고 페이지를 접으며 남자 이마에
남모르게 천천히 밑줄을 긋고는 킥킥,
그럼 맘 모르는 그 남자 따라 꺽꺽.
읽을 만큼 읽고 또 지치도록 읽겠습니다.
그 남자 가슴 첫 페이지에서 끝 페이지까지,
진부한 머리말에서 당신도 모르는 호적 간기면까지,
혹은 발톱 거스러미에서 정수리 상처까지
이윽고 남자를 다 읽는 그날이 온다면.
그럼 난 그 남자 손 붙잡고 동인천
후미진 헌책방 셔터 앞 어딘가에 내다 버리거나
아니면 가장 가난한 헌책들만 사는
책방도 뭣도 아닌 것 같은 난쟁이 지붕 집
사립문 열고 들어가 헐값에 팔겠습니다.

먼지 쌓인 감옥에서 누렇게 늙어가는 그 남자,
이제 정말 아무도 사 가지 않는 그 남자,
염소밥으로도 너무 낡아버린 그 남자.
누군가의 한때였던 아련한 표정으로 아침을 맞고.
몸속 은밀한 어딘가에 바싹 말라비틀어진
네잎 클로버를 부적처럼 품으며 행운을 기다리다가
당첨된 로또번호처럼 그 남자, 마침내 알 수 없이
죽으면.
가능하면 문상은 가지 않겠습니다.

첫인상은 책의 표지 같아서, 내용도 모르는 체 우리들 마음은 그것의 인상적인 포즈를 가슴에 새긴다. 그러므로 첫사랑의 내용은 별로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랑, 그것은 형식이다. ‘첫’이라는 형식에 담긴 내용은 무엇이어도 상관없다. 책 속에는 버려야 할 내용과 간직해야 할 추억이 함께 들어 있다. 오래도록 책장에 꽂아 놓은 빛바랜 책을 버릴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 또한 책과 함께 빛이 바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박후기 시인 hoogiwoogi@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