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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살라먹고 고운 해야 솟아라”

어둠을 살라먹고 고운 해야 솟아라

                                                              -염치 있는 새 세상 여시길

                                                                      이경철(시인, 전 중앙일보문화부장)

 

 

 

글이글 타오르는 해가 떠올랐다. 해가 바뀌면 우리들은 떠오르는 새해를 어떻게든 보려한다. 극동(極東)의 한반도에서도 동쪽 끝 산과 바다 해돋이 명소로 가서, 혹은 동네 동산 위로 떠오르는 해를 기어코 보려한다.

 

나도 동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다 우리 동네 최고봉인 노고봉 위로 떠오르는 정유(丁酉)년 새해를 보았다. 이글이글 떠오르며 마구산 정광산 태화산 그 너머 연연이 이어지는 산봉우리들이 어깨동무하며 발갛게 드러나는 모습을 봤다. 태평스럽고도 무등하게 열리는 새 세상을 뚜렷이 보고 또 내 나름으로 염원했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지난해엔 유난히 어둠이 길었다. 그래서 올 연초엔 더욱더 새해가 보고팠다. 박두진 시인의 위 시에서처럼 어둠을 살라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로 솟아오르는 고운 해를 누구든 보고팠을 것이다.

 

지난 연말 안국동 네거리 청와대로 가는 길목에서 주먹으로 땅을 내리치며 이마가 깨지게 아스팔트길을 짓찧는 노시인을 봤다. “내가 그래도 똑똑한 줄 알았는데, 염치 있게 살려했는데 아니다, 아니다며 울부짖던, 이름만 대면 누구든 금방알 수 있는 우리시대 대표적 시인의 그 참담함을 나 또한 느끼며 이마를 짓찧었다.

 

한 나라를 뿌리째 흔든, 공동체의 양식과 염치를 깡그리 무너뜨린 여인의 죄상을 끝까지 파고들고 싶다가도 뉴스 화면에 비친 그 여자 얼굴만보면 징그러운 뱀을 본 것 마냥 얼굴을 누구든 돌리고 싶었을 것이다. 지난해 연말은 그렇게 어둠이 길었고 그만큼 국민들은 집단 우울증에 빠져들었다.

 

그런 어둠과 우울증을 살라먹을 새해가 떠오르길 우린 바랐다. “부모를 잘 만나는 것도 능력이다는 흙 수저 금 수저 따위를 살라먹고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속설이 통할 수 있는 새해가 떠오르길 바라고 있다.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경제가 수치상 웬만큼 회복됐을 때 이런 말이 나돌았었다. “그때 더 폭삭 망했어야 제대로 일어날 수 있었는데라고. 어정쩡하게 땜질하며 신자유주의 시장 체제로 접어든 우리사회는 공동체의 양심과 염치를 잃고 계약직 알바며 흙 수저 금 수저며 하는 헬조선 사회로 대책 없이 빠져들다 결국 이 짝이 나고 말았다.

 

지금 우리는 경제는 물론 정치,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IMF 때보다 더 난국에 처해 있다. 절망의 맨 끝 우울증에 빠져있고 바닥의 바닥끝까지 내려와 있는 것이다. 그래 폭삭 망한 것이다. 이제 바닥을 치고 올라와야할 시점이다. 정말 새해다운 새해를 기어코 보고 만들어야할 때이다.

 

이런 때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란 말이 금과옥조(金科玉條)로 떠오른다. 자신부터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려야 세상이 평안해진다는 동양 최고의 고전대학의 요체이다. 염치를 잃은 우리 자신 사람과 사회가 이 난국을 불렀기에 수신이라는 조목이 무엇보다 먼저 떠오른다.

 

그렇다면 수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학에서는 자신의 몸을 닦기 위해서는 먼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해야(格物) 바른 지식에 이를 수 있고(致知), 바른 지식이라야 뜻이 정성스러워지며(誠意), 뜻이 정성스러워야 바른 마음(正心)이 되며 이 정심이라야 비로소 자신을 수양할 수 있다고 했다.

 

난 이런 수신의 총화가 우리가 쉽게 말하는 염치(廉恥)라고 본다. 바른 마음, 바른 몸가짐이 아니면 부끄러운 마음이 생길 수 없다. 파렴치한 사람들이 판치는 사회가 결국 이 난국을 불렀기에 정유년 새해엔 나부터 행여 남부끄러운 일은 아닌가하고 매사에 더욱 엄밀히 염치를 따져나갈 것이다.

 

까마득한 날에/하늘이 처음 열리고/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모든 산맥들이/바다로 연모해 휘달릴 때도/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중략)//지금 눈 내리고/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이육사 시인의 시광야처럼 정유년을 여는 새해가 떠오르고 있다. 꽁꽁 언 산 봉우리 연연한 능선들과 차가운 눈안개 가득한 하늘을 열며 해가 이글이글 떠오르고 있다. 붉게 물들어 가는 산 능선 능선들이 울긋불긋 때깔 고운 우리네 토종닭 해맑은 소리로 염치오’, ‘염치오요하며 목청껏 울어대고 있는 듯하다.

 

그래 바닥의 바닥까지 폭삭 주저앉은 이 나라 이 사회를 창세기처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할 정유년 새해가 밝았다. 각자의 염치를 챙기며 염치 있는 사회, 나라를 반드시 다시 세워나가기에 더없이 좋은 때가 이제 우리 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