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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살갗 피나게 벗겨가며 새봄을 예비하는 자작나무 동안거(冬安居)

이경철 초부리 시첩

 

 

제 살갗 피나게 벗겨가며 새봄을 예비하는 자작나무 동안거(冬安居)

 

이경철(시인, 전 중앙일보문화부장)

 

지난 정월 대보름을 앞두고 설악산 백담사를 찾았습니다. 입춘 지나 대보름이면 만물이 다시 소생하는 때입니다. 겨울과 봄 사이에 끼어 겨울도 아니고 봄도 아닌 달, 2월은 참 밋밋하지요. 캘린더에 보면 빨간 공휴일은 하나도 없는 달이고요. 그 밋밋함을 깨치려 설악산, 겨울 끝자락 한가운데를 찾은 것입니다.

 

눈이 쌓이고 또 쌓여 얼어붙어 용대리에서 백담사까지 가는 찻길도 통제됐더군요. 백담계곡 굽이굽이를 오르며 길 벼랑에 선 자작나무며 물오리나무들을 눈 여겨 봤습니다. 매찬 눈바람에 제 껍질을 피나게 벗기고 있는 그 나무들이 정말 눈에 밟히곤 했습니다.

 

그런 자작나무 난간 길을 따라 머리에 핏줄이 파르라니 비치는 앳된 스님들이 하산하고 있더군요. 동안거를 끝내고 산문山門 밖을 나와 속세로 가는 스님들이었습니다. 겨울 세 달 동안 외부와 절대 단절된 채 토굴에서 피나게 참선 수행한 저 스님들은 뭘 깨치고 세상에 나가는 걸까요.

 

그 깨침의 기미라도 알아보려 해제 법회에도 몇 번 참석해 큰스님들의 법어(法語)도 들어봤습니다. “여기서 깨치고 얻은 것 입도 벙긋하지 말고 다 내려놓고 가라해 도통 알 수 없더군요.

 

그래 오로지 저 혼자, 스스로의 힘으로 깨치는 게 참진의 세계이고, 말이 아니라 이심전심(以心傳心), 마음으로만 전할 수 있는 비의(非議)의 세계임을 알았는데. 눈에 짠하게 밟히는 제 허물 제가 피나게 벗고 있는 자작나무 흰 껍질의 붉은 실핏줄과 승려들 머리의 푸른 핏줄을 보며 동안거란 말이 아연 실감으로 다가오더군요. 그래 자작나무 동안거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한 편의 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눈은 내리는데 며칠째 내린 눈 위에 또 눈은 내려 온 길 갈 길 다 끊긴 백담계곡 적막 속에 앳된 스님들 동안거 푸는데 삭발한 머리 파르라니 돋은 핏줄에 성불(成佛)하라 부처되라 조실스님 주장자 내리치는데 홀로 청청 꼿꼿한 소나무 쌓인 눈 털어내지 못해 쩍 쩍 부러지고 갈라지는 소리 죽비로 내리치는데 그 소리에 처마 밑 풍경도 댕강거리는데

 

동안거 해제 풍경 소리 밖 물오리나무 자작나무들 내리는 눈발 속에 아직도 용맹정진 중이데 눈보라 차디찬 바람에 맨살 맨마음 아리게 쓰라리게 벗기고 있데 실핏줄 터져 발갛게 뭉개지도록 허물벗어가며 부처님 돼가고 있데 내리는 눈발에 햇살도 한 점 그림자 없이 눈부시게 부서지는데.

 

그렇습니다. ()와 선()은 태생이 한가지입니다. 노자(老子)가 말한 말로 전할 수 있는 도는 불변의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는 언어의 불구성(不具性)을 극복하고, 언어에 의해 가려지고 차단된 실재며 도에 도달하려함에서 둘은 한통속입니다. 나와 너의 참모습을 통찰해내려는 시선과 마음에서는 같습니다.

 

도며 참진은 말로 전할 수 없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이며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지경이라 선은 묵언정진(黙言精進)요 이심전심(以心傳心)이지만 시는 바로 그런 말, 언어로 지은 절집이라서 어떻게든 말로 전하고 들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언어가 끝끝내 불구의 방편일망정 그 언어를 새롭게 하고 고쳐가면서 너와 나의 진심을 대중들과 소통하고픈 게 시 아니겠습니까.

 

그래 그 앳된 스님들 동안거에서 깨친 게 뭘까, 부처님이 되는 성불이 무얼까 곰곰 생각하며 자작나무를 바라보니 아, 글쎄 제 껍질 피나게 벗겨가며 본디의 백옥 같은 색깔로 돌아가며 겨울 내내 봄을 예비하고 있는 게예요. 큰 소나무가 털어내는 눈보라에도 그림자 하나 없이 햇살을 환하게 받고 있는 그런 자작나무가 그대로 부처님으로 보이는 것이었어요.

 

저는 자작나무의 현상, 그런 모습에서 부처님을 보아냈지만 어디 자작나무뿐이겠어요. 봄을 예비하며 겨울을 아프게 살아내는 만물들이 모두 다 부처님 모습일 것을. 그래 처처불상(處處佛像)이라, 우주만물이 다 부처님이라 하지 않습니까.

 

지금 눈을 들어 산 빛을 보세요. 초콜릿 크림색에서 날로 더 진해지는 연두색 크림 빛으로 바뀌고 있지 않습니까. 저 땅속 깊은 곳에서 나무 꼭대기 가지 끝까지 물을 뿜어 올리며 부지런히 봄빛을 피워내고 있지 않습니까. 어디 나무들만 그러겠습니까. 햇살이며 공기며 땅이며 미물들이 다 봄을 피워내고 있지 않습니까.

 

하물며 우리네 사람들이야 오죽 하겠습니까. 그래 2월은 절대 밋밋한 달이 아닙니다. 각자 본디대로 봄을 피우고 있는 아주 생기 넘치는 달이 2월임을 백담계곡 자작나무 동안거에서, 용인 동남방을 두르고 있는 마구산 정광산 산 빛에서, 다시 살아내야겠다는 것을 내 마음 속에서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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