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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철 시인의 초부리 시첩

어지러운 이 봄날 쑥국 끓여 드시고

홍익인간 세상 다시 세우시길

이경철(시인, 전 중앙일보문화부장)

 

 

 

리가 어질어질하다. 봄은 바싹바싹 환하게 뼛속까지 스며드는데 온몸과 마음이 나른하고 어지럽다. 봄이 오면 대륙에서 황해를 건너 날아드는 저 뿌연 황사, 미세먼지 탓인가. 어질어질 노랗게 피어나려는 저 산수유, 개나리 꽃 멀미 때문인가.

 

아니다, 아닐 것이다. 지치고 거덜 난 몸과 마음이 정말 나른한 것일 게다. 여린 마음 지켜내려고 마신 술, 술독 탓일 게다. 지난 겨우내 우리는 얼마나 거리에서, 방 안 TV 앞에서 울분을 토했던가. 위정자들 뿐 아니라 우리의 공동체, 나라를 이토록 염치없게 만든 우리 자신들을 탓하며 얼마나 머리를 짓찧어댔던가. 그런 홧병, 술독에 몸과 마음이 찌들고 거덜 나 어질어질할 것이다.

 

겨우내 언 하늘과 산에 까마귀 울음소리만 목 막히게 , 꺼윽들리다가 요즘은 멧비둘기 울음소리 가득하다. 마누라며 자식까지 다 잃고 꾹꾹 눌러 참아온 울음을 우는 홀아비 뼛속으로 우는 울음소리 같은 청승맞고 불쌍한 소리가 봄 뿌연 햇살 속에 가득하다.

 

그 소리를 들으면 홀연 쑥국이 떠오른다. 이런 어질어질한 봄날 쑥국 한 그릇 끓여먹으면 힘이 절로 날 것 같다. 홧병과 술독이 다 풀릴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봄이 좀 더 완연해지고 보리밭 푸르러지면 쑥국, 쑥 쑥국울어대는 뻐꾹새며 종다리 울음소리 이 산 저 산 지천으로 가득해 쑥국이 절로 생각날 것이다.

 

봄이 오면 누가 찾지 않아도, 의지할 데 하나 없이도 지천으로 가득 피어나는 게 쑥이다. 원폭이 투하돼 쑥대밭이 된 일본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제일 먼저 저절로 소생한 게 쑥이었다. 그래 부서지고 망가진 폐허에도 쑥대밭 무성하니 쑥대밭이라 부를 정도로 쑥은 본연의 왕성한 생명력의 상징이다.

 

하늘나라에서 3000 무리와 함께 내려와 땅의 나라를 열려는 환웅한테 곰과 호랑이가 찾아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그 나라 백성이 되길 원했다. 환웅을 그들에게 쑥과 마늘을 주어 동굴 속에서 그것만 먹고 삼칠일을 버티면 사람이 된다했다. 곰은 그것을 버텨내 웅녀熊女가 돼 환웅과 결혼해 단군을 낳았다. 단군은 사람과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려 조선이란 나라를 세웠다.

 

이렇게 쑥은 우리 민족 최초의 건국신화부터 함께하며 짐승도 사람이 되게 하는 영험한 힘을 갖고 있다. 이런 쑥은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와 결합되며 쑥국으로 들어온다. 하늘에서 목욕하려 내려온 선녀의 옷을 감춰 그 선녀와 아들 딸 낳고 잘 살던 나무꾼이 봄 어느 날 쑥국을 하도 맛있게 넋 놓고 먹다 그만 선녀가 옷을 찾아 입고 자식들 다 끼고 하늘로 올라가버렸다고.

 

그래 처자식 다 읽은 나무꾼이 하늘을 쳐다보며 구슬피 우는 소리가 봄에 우는 모든 새소리라고. 장닭들이 지붕 위로 날라 올라 꼬끼오우는 것도 다 그 나무꾼의 넋이라고. 스토리텔링 버전이 바뀌며 오늘도 계속 될 정도로 쑥과 쑥국의 효험과 맛은 우리 민족에겐 원초적으로 각인된 것이다.

 

이른 봄 햇살 뼛속까지 환하여

겨우내 거덜 난 몸 일으켜

쑥 캐러 나갔는데

 

술에 지친 주독

마음 다친 홧독

쑥국 끓여 풀려 나갔는데

 

온 들녘 다 뒤져도 쑥 한 포기 없네

양지 바른 풀섶 아무리 헤쳐 봐도 없네

꽃다지 꽃 노랗게 피어 보랏빛 개불알꽃 피어

깨알 같이 작은 풀꽃들만 이슬방울처럼 맺히고 있데

 

그래 위 시 초안처럼 쑥을 캐러 나갔다. 마트에서도 햇쑥을 봤지만 봄 물오른 땅기운도 함께 섭취하려 보자기에 칼을 말아서 나갔다. 산 오름 빈터며 경안천 양지바른 곳 마른 풀 다 헤쳐 봐도 쑥은 한 포기도 보이지 않았다. 산으로 둘러싸인 우리 동네는 서울보다도 2도나 낮다. 해서 봄도 한 보름 늦는 곳이라 아직 쑥이 제대로 나지 않았나보다.

 

쑥을 찾아 마른 풀들 헤치다 보니 그토록 찾는 쑥은 보이지 않고 깨알처럼 작은 노란색 보라색 풀꽃들이 이슬처럼 맺혀있었다. ‘꽃다지’, ‘개불알꽃이름도 예쁘고 재밌는 풀꽃들이 앙증맞게 피어나며 봄바람에 하늘거리고 있었다. 하늘거리며 쑥국을 무슨 쑥국? 속을 다스리고 차려서 뭐하게. 그냥 오는 봄이나 즐겨보시지하며 놀리는 듯했다.

 

저 산 속 멧비둘기 울음소리는 쑥국을 구슬프게 탓하며 경안천 건너오는데. 순간 이승 저승 건네주는 뭔가의 깨달음이 문득 오는 듯 했는데 그만 여기서 콱 막히고 말았다. 어떻게든 그 깨달음의 실체, 언어로 잡을 수 없는 언어도단言語道斷, 이심전심以心傳心의 경지를 확실히 잡아 형상화해야 시가 되지 않겠는가.

 

아무튼 이제 쑥이 지천으로 양양하게 돋아나는 때, 쑥 캐서 쑥국 맛있게 끓여먹고 술독과 홧독 확 풀어야겠다. 다치고 지친 속부터 잘 풀고 다스리고 나서 거덜 난 이 나라 홍익인간세상으로 다시 튼실하게 세울 때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