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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고 싶은 낙서 같은 하루

  

지우고 싶은 낙서 같은 하루



머피의 법칙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적용된 날이 있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차가 고장이 나서 월요일에 수리를 맡길 예정이었다. 여유있게 약속 장소에 도착하기 위해 외출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는데 갑자기 세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접는 우산 하나를 챙겨들고 아파트 입구를 나서는데 내리치는 빗줄기는 우산을 펼 엄두도 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열 발자욱도 움직이지 못하고 흠뻑 젖어버린 옷 때문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약속 시간이 꼬이기 시작했다. 시계를 보며 초조하게 옷을 갈아입고 택시를 불렀다. 그런데 택시조차도 배차가 되지 않아 여유있던 몇 분을 다 소진하고 말았다.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시간에 늦을 것 같았다. 다행히 비가 조금 소강 상태를 보이기 시작했고 나는 부랴부랴 정류소를 향해 뛰어갔다. 세상은 내 편인지 내가 원하는 버스가 바로 왔다. 나는 안도하며 버스에 올랐다. 이대로라면 약속 시간에 늦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버스가 신호 대기에 걸리면서 머피의 법칙이 시작되었다. 신호등이 바뀌고 버스가 출발하는데 앞차가 머뭇거리는 바람에 버스도 멈칫했다. 그런데 이후로도 앞차는 차선을 바꾸며 버스의 진로를 방해하더니 급정거를 했다. 험한 말을 할 수도 있었지만 50대 후반의 여자 운전기사는 목소리를 높이며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냥 가기를 바랬지만 앞차에서 젊은 20대 중반의 남자가 다짜고짜 삿대질을 하며 버스로 다가왔다.

 

오늘 약속을 제 시간에 가는 것은 정말 포기해야할 판이었다. 그 젊은 운전자는 계속 버스 기사에게 비아냥거리며 버스가 잘못했다며 소리를 질렀다. 블랙박스를 보자며 운전기사를 내리게 했고 논쟁은 계속 되었다. 나이로는 엄마 뻘인 기사에게 젊은 남자는 계속 소리를 지르며 결국 경찰을 부르는 것 같았다. 아마 눈으로 확인되지는 않지만 얇은 습자지만큼의 접촉이 있었던 모양이다. 앞차는 비싼 외제차였고 시비를 건다면 수리비가 나올 것이다. 경찰을 불러 잘잘못을 가리고 블랙박스를 통해 판명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젊은 남자의 태도는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저 버스 기사에게도 저 젊은 남자 또래의 자녀가 있을텐데 그 자녀들이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마음이 좀 속상해졌다.

 

버스가 경적을 울리긴 했지만 서로 멈칫하며 타이밍이 안 맞은 것 뿐이다. 육안으로 얼핏 보기에는 앞차가 출발을 좀 머뭇거렸고 버스는 배차시간 때문에 조급했던 것이다. 나는 결국 실랑이가 길어질 것 같아 내려서 택시를 탔다. 약속 시간에 늦었다. 하지만 하루 종일 기분이 이상했다. 무엇이 그 젊은 남자를 그렇게 당당하게 만드는 것일까. 버스안의 승객을 보면서도 삿대질에 경찰을 부르며 버스를 막아서고 민폐를 끼치는 남자. 블랙박스가 그 남자를 그렇게 당당하게 만든 것일까. 나랑 상관없는 일일수도 있지만 나는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않을까. 약속시간을 어기게 만든 그날의 머피의 법칙은 나의 정신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20대의 젊은 남자가 타고 있는 외제차는 그 사람과 어울리지 않았다. 차는 매우 품위가 있었으나 그 남자에게서 품위를 찾아볼 수 없었다.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재벌의 갑질과 세습되는 재력이 이 사회를 자꾸 품위 없게 만들고 있는 듯하다.

 

블랙박스를 보면 그 차는 잘못이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자신의 엄마뻘되는 나이의 운전기사에게 삿대질을 하는 것은 법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