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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떠나면 추레합니다

텅 비어 더 곱게 물드는 이 가을,

늦게 떠나면 추레합니다

                                 

이경철(시인, 전 중앙일보문화부장)

 


등댓불 보신 적 있으신지. 울울창창한 여름 산림 속에서 활활 수직으로 타오르는 꽃불 화염 보신 적 있으신지. 지루한 빗줄기 그친 새벽, 외국어대 주위를 도는 임간도로 신작로를 산책하며 홀연 그것을 보았다. 말라죽은 키 큰 나무 꼭대기까지 기어오르며 불꽃처럼 피어나던 능소화꽃을.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을 환히 밝히던 꽃 등댓불을.


그런 능소화꽃 등댓불을 보는 순간, 예리한 톱니로 숲을 갉아내는 듯하던 새벽 풀벌레소리가 뚝 그치는 듯했다. 잠에서 덜 깬 마음도 확 깨치는 듯했다. 소쩍새며 이른 가을 귀뚜라미 울음에 밤새 뒤척이던 미명(未明)도 환히 밝아오는 듯했다. 꿈이며 그리움이며 순정 등 진즉에 접었어야할 청춘시절의 목록들이 환히 꽃 등댓불을 켜고 있는 저, 저 능소화꽃이라니…….


한중수교로 중국 쪽으로 백두산 가는 길이 열리던 해에 백두산에 올랐었다. 백두산 올라가는 빽빽한 산림 속 임간도로로 갓 부화한 나비 떼가 날아들었다. 눈보라처럼 날아들며 하염없이 차창에 부딪쳐 죽어갔다.

그때 나이 30대 중반. 젊은 날을 방황케 했던 내 청춘의 목록들도 이제 저 나비 떼처럼 가뭇없이 죽어갔게거늘 했었는데. 여직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더 생생하게 타오르고 있음을 능소화꽃 등댓불이 우연 증명하고 있었다.


며칠 뒤 새벽에도 그 신작로를 산책했다. 숲속을 들여다보니 능소화꽃 등댓불이 안 보였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능소화꽃 한 송이 보이지 않고 키 큰 고사목만 보였다. 시간 당 몇 십 미리 퍼부은 게릴라 폭우에 다 떨어져버린 걸까. 처서(處暑) 지나 삽상한 가을 기운에 저버린 걸까

 

그날 아침 버스로 서울 시내를 나가다 한남대교 건너자마자 도로변 벽을 꽉 붙들고 피어오르는 능소화꽃을 봤다. 서울 주위 고속도로변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꽉 막힌 콘크리트 벽을 기어오르는 능소화를 볼 때마다 도심에 막힌 내 시야며 마음도 환히 뚫리는 듯했었다.


그러나 가을이 오는 휑한 길목에서도 악착같이 피어오르고 있는 그 능소화는 아니었다. 입술 더 붉게 칠하고 거리에 나온 철지난 여인 같았다. 능소화꽃 등댓불 흔적도 없이 저버려 주저앉아 울고 싶었던 그날 새벽 내 마음같이 안타깝고 추레해 보였다.

 

늦게 떠나면 추레합니다.

 

자귀나무 꽃 배롱나무 꽃

화려하고 무성했던 여름

서둘러 떠나고 있습니다.

 

꽉 막힌 벽 부여잡고

철늦게 피어오르는 능소화

, 저 애처로운 몸부림이라니

밤 세운 미련을 우는 풀벌레소리

텅 빈 천지간을 부는 바람소리

귓불 에둘러 시린 마음에 돋는 소름.

 

진즉에 나는 떠났습니다.

어린 시절을 떠나와 가없는 희망에 들볶이던 나도

이젠 서둘러 떠나야할 때입니다.

 

늦게 떠나면 미련처럼 추레합니다.

 

그런 능소화를 보면서 나도 저 철늦은 꽃은 아닐는지 하며 버스 안 메모로 시작된 시이른 가을에이다. ‘두두시도(頭頭是道) 물물전진(物物全眞)’이란 말이 있다. 깨친 눈으로 보면 삼라만상이 다 도요, 본체의 참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꽃이 피고 짐도, 피어 있는 그 모습 자체도, 철 따라 바뀌는 대자연의 모습도 모두모두 다 도며 진리라는 고단위 개념의 몸체요 드러남이라는 것이다.

매 순간 우리네 모습과 세상사 또한 그렇다. 대자연 낱낱처럼 우리 또한 하나의 두()요 물()이라는 것이 이런 환절기에는 눈에 들어오고 삽상한 바람으로 피부에 와 닿곤 한다. 태어나 쭉쭉 성장하고 익어가다 마침내 스러져 온 곳으로 되돌아간다는 통과제의(通過祭儀)의 순리를 우리 자연과 계절들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대추들이 빨갛게 물들어가고 있다. 이른 밤송이들은 벌써 벌어져 알밤을 툭, 툭 떨어뜨리고 있다. 구름 한 점 없이 하늘은 텅, 텅 비어가고 한 점 티끌도 없이 햇살은 맑아지고 있다. 발목 시린 찬 이슬 내리는 백로(白露) 지나 이제 완연한 가을이다. 울울창창했던 여름 내려놓고 이제 텅 비어가는 것들이 세상의 진면목을 곱게 물들이며 보여주는 가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