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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규 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ㅣ기쁨과 슬픔을 꾹꾹 담아ㅣ최지인


기쁨과 슬픔을 꾹꾹 담아

                                       

최지인

 

 

미술관 구석에 쪼그려 앉아 속삭였다 내가 좋아하는 시야 나랑 함께 없어져 볼래?* 고스란히 녹음되었다 그때

 

창밖 바라보며 그런 적 있었다 눈 뜨면 네가 있었던, 부러 늦잠 자던, 쌓인 짐들을 단칸방 한쪽에 밀어놓던

 

네 살갗이 내 살갗에 닿았다 길가에 스포츠 양말 한 켤레 버려져 있었어 그런 걸 보면 부질없지 않아? 너에게도 풀리지 않는 일이 있겠지

 

늦은 점심으로 무얼 먹을까 고민하다 더는 더러운 개수대를 방치할 수 없다, 개수대에 쓰레기를 버리지 말자, 박스는 접어서, 페트병은 구겨서 정리하자, 마음만 먹었다

 

읽지 않은 책은 읽지 않은 마음, 아니야, 그런 건 없다 책꽂이에 꽂을 수 없는 책들이 쌓여 있다 등이 보인다 궁리할 거리가 많은 등 젊음을 다 바친 등

 

우리는 아직 젊고 앞으로도 젊을 거야 그 때문에 고통받을 거야 버는 돈이 적어서 요절 따위를 두려워해야 할 거야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은 많다 그중 하나가 사라지는 일 거기서 보았던 그림 기억해?

 

나는 너와 손잡고 그림 앞에 오래 서 있었다

 

* 하나, 하고 둘, 하면 시작하자. 너 다음 내가, 나 다음 네가 번갈아 가며 또박또박 읽는다. 마치 그것은 의식 같다. 서로를 의지하고 돕겠다고, 기쁜 일 괴로운 일 나누겠다고, 함께 살아가겠다고 맹세하는. 어떤 맹세는 깨질 걸 알면서도, 되뇐다. 미완성 교향악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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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이 시에는 단호한 순간이 깃들어 있습니다. “읽지 않은 책은 읽지 않은 마음,” 이어지는 부정, “아니야, 그런 건 없다 책꽂이에 꽂을 수 없는 책들이 쌓여 있기 때문이지요. 그 너머로 특수한 부정의 완강한 등이 보입니다. 반면에 시적 주체의 잃지 않은 책마음에 대한 긍정과 부정은 중층적이지요. 이에 대해 제임슨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인간의 리얼리티는 내적 부정에 의해 지배받는다. () 언어에서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각각의 음은 그 체계의 다른 요소들에 대한 내적 부정의 관계에 있다.”(언어라는 감옥)는 점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연유로 시적 주체가 견지하는 긍정과 부정의 중층적 결정은, 하나의 음과 또 다른 음으로 이어지면서 미완성 교향악으로 이어지게 되겠지요. 부정적인 것의 가능성으로, 미완성으로 완성될 교향악.

 

이은규 시인 yudite2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