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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마음


가을 여울목 해오라기가 낚는 건

, 텅 빈 마음일 것을

                           

이경철(시인, 전 중앙일보문화부장)

 

이태 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꿈속으로 오셨다. 잠들기 전이나 깨어나기 전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이 아니라 온전한 꿈속으로. 내 어릴 적 치마저고리 곱게 차려입은 새색시 같은 환한 모습으로 내 손을 이끌고 어디론가 데려가 보여줬다.

 

언덕 위에 집이 있고 그 앞 양옆으로도 제법 큰 내가 흐르는 곳이었다. 내가 태어나고 유년을 보낸 고향집 같아 엄마 내가 태어난 곳 맞제하고 묻기까지 했다. 그러나 아니다. 내가 태어난 집은 보이지도 않는 저 먼 저수지로 흘러드는 작은 개울만 보였었는데……. 그래도 그곳이 안온하고 멋져 보여 마냥 좋아라 좋아라 했다.

 

깨어나 꿈에 대해 한참 생각해 보았다. 불효만 뼈저리게 탓하고 있는 아들에게 나 이리 좋은 곳에 왔으니 너무 탓하지 마라고 저리 환하게 내게 보여주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었음을 며칠 후 실감했다.

 

부동산중개업소에서 연락이 왔다. 맞춤한 집이 나왔으니 한번 보시라고. 혼자 쓰기에는 너무 커 빈방들에 미안한 생각도 들고 또 그 빈 공간들에 내 기()를 앗기는 것 같기도 해서 작은 집으로 옮기려 물색 중이었다.

 

자신의 거처를 낮춰 토굴정도로 말하면서도 막상 가보면 넓고 으리으리하던데. 난 정말 말 그대로 토굴 같은 집에 갇히고 싶었다. 그 작은 공간에서 내 기를 온전히 지키고 돌게 해가며 무언가에 열심이려고.

 

그래 몇 곳 가보았지만 그런 내 맘엔 안 찼다. 그러다 찾아간 동네는 정말 꿈속에서 본 풍경 같았다. 약천 남구만 선생이 말년에 시와 세월을 낚던 비파담을 지척에 둔 경안천과 오산천이 만나 어우러지는 동네다.

 

두물머리 삼각주에는 갈대밭이 흐드러지고 강둑에는 작은 야생화들이 피고지는 곳. 잉크 빛 수레국화들이 대차게 피어 데굴데굴 문장을 굴리는 곳. ! 그래 새 거처를 찾으려 애 쓰는 내게 어머니가 이곳을 가르쳐주려 꿈속에 오셨구나 하고 실감하며 앞뒤 가릴 것 없이 계약했다.

 

두 내가 어우러져 먹이도 풍부한지 여울목께는 해오라기 몇 마리씩이 목을 지키고 있다. 긴 목 꼿꼿이 세운 채 미동도 없이. 몇 번이고 하염없이 그 풍경을 보고 또 물속을 들여다보곤 했지만 해오라기들이 사냥에 성공한 장면은 이제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햇살 물무늬 반짝거리는 피라미 어린 생명들

 

물속을 꼬누는 해오라기 눈 시린 부리

 

숨 멎고 흐름도 멈춘 가을 여울 한참

 

집히는 것은 물속 텅 빈 하늘뿐

 

거처를 옮겨 천변을 거닐며 붙잡은 시상(詩想) 한 대목이다. 물속을 들여다보면 물에 빠진 햇빛 알갱이들처럼 피라미들이 하얀 배때기 뒤집으며 약동하는 생명을 구가하고 있다. 간혹 장딴지만한 잉어들이 그 사이를 유유히 오가기도 하고.

 

해오라기들은 분명 그런 생명들을 꼬누고 있을 텐데. 그리고 사냥에 성공해 생명을 이어갈 텐데, 난 한 번도 그런 장면을 목격하지 못했다. 그래 해오라기들이 바늘 없는 낚시로 만백성들의 안녕을 위한 나라와 세월을 낚으려 했던 강태공 같았다. 물속의 생명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 영원한 생명을 낚는 구도승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런 해오라기와 물속을 들여다보며 난 해오라기보다 못함을 절감하고 있다. 물속 빈 하늘만 낚으며 마음속을 텅, 텅 비워가고 있는 저 해오라기의 응시보다도 못한 이 마음 씀씀이의 부질없음이라니.

 

그런 내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수레국화는 피어나고 있는데. 피어나며 가을에서 겨울로 계절은 굴러가고 있는 데. 이러다 정말 하얀 눈이라도 내려버리면 이 마음 어찌 부지할 것인가. 그래 이 좋은 동네에 토굴하나 마련했건만. 저 해오라기처럼 텅 빈 마음 흐트러짐 없이 응시할 날 있을 건가.

 

흩날리는 갈대 하얀 꽃 윤기도 잃어가고 나무에 매달린 까치밥 감들도 물렁물렁 홍시가 돼가고 있다. 가을이 무르익어가고 있다. 텅 비어가는 하늘과 들녘에 부는 찬바람에 이래저래 마음 시린 계절. 부질없는 마음들 다 내려놓고 평안하시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