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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운동과 우리들의 일그러진 우상

 

미투운동과 우리들의 일그러진 우상

 


주량이 얼마야? 남자 친구는 있어?”


대학을 갓 졸업한 신입 작가에게 방송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물었던 말이다. 나는 피식 웃으며 술은 잘 못마십니다. 남자 친구는 없는데요?” 라고 정직한(?) 사실만을 대답했다. 그러자 그 중에 가장 직급이 높았던 한 분이 작가하려면 술도 잘 마시고 연애도 많이 해봐야하는데 나랑 연애할까?” 라고 말했다. 순진했던 어린 작가는 얼굴이 빨개졌고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다. 가끔은 그런 말들에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술을 배워볼까, 연애를 많이 해봐야하나, 고민 끝에 그런 분위기에 대해 선배 작가에게 물으니 그냥 대충 웃음으로 넘기라고 했다.

 

그런데 어느날 한 연출가가 프로그램을 같이 하고 싶다면서 저녁을 먹자고 했다. 대본 이야기도 할 겸 만나자고 한 것이다. 방송국 외부에서 하는 저녁 미팅이 의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담당 조연출에게 어디에서 만나는지 물었다. 그러자 조연출은 잠시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그 프로그램은 이미 작가가 있다고 하면서 거절하라고 했다. 그때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다. 나는 이미 그 프로그램의 파일럿 대본을 제출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방송국이 아닌 밖에서 대본 회의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는 않다는 그 조연출의 뼈있는 말에 그 약속을 거절했다. 이후로 나의 대본은 다른 작가의 이름으로 방송이 나갔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상황이었지만 대본을 도둑맞은 것으로 저녁 식사의 거절에 대한 보복이 끝났으니 다행이라 생각한다.

 

미투 운동이 지금 우리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시작은 그때부터인 것같다. 한 검사가 자신이 당했던 성추행 피해 사실을 생방송 뉴스에 출연하여 폭로했다. 그 검사는 침착을 유지하려고 애썼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그날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차분히 말했다. 뉴스를 본 많은 사람들이 동요되기 시작했다.

 

충격이 더했던 것은 그 사건이 일어난 현장이 법을 다루는 조직이었다는 것이다. 사회의 법과 정의를 담당하는 조직에서 아이러니하게 그런 일들이 묵인되고 관행처럼 치부될 수 있었는지 믿기 어렵다. 심지어 피해자를 탓하는 조직의 분위기가 어떻게 오랫동안 가능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폭로가 도화선이 되어 침묵하던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그런 사건이 일어나면 피해자가 또다시 2차 피해를 당하는 상황으로 이어지는 것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분위기는 이제 법조계를 넘어 문화예술계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마치 도미노게임처럼 범접할 수 없던 그들의 아우라가 한꺼번에 우르르 무너지고 있다. 문제는 그들을 존경했던 대중들의 마음도 배신감으로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 문화 예술 전체로 번지고 있는 미투 운동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조직 문화 속에서 관행으로 가볍게 넘어 갔던 많은 일들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도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라는 말로 아무도 가해자의 권위를 침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문화계 거물들의 모습을 보면서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존경을 받으며 많은 사람들의 정신과 삶을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그들의 씁쓸한 몰락 앞에 내 추억을 도둑맞은 느낌이었다. 어떻게 하면 그런 대단한 사람이 고등학교 은사일 수가 있냐며 친구를 부러워한 적이 있었다. 거대한 문학상 앞에 가슴을 졸이며 그 분의 수상을 간절히 바랬던 적이 있었다. 창작의 이름으로 예술가의 삶은 어떤 도덕적 잣대로 평가받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혹시 내가 정말 좋아하는 그 작가가 그 감독이 혹은 그 연예인이 뉴스에 등장하는건 아닌지 두려워지는 요즘이다. 어쩌면 나의 젊은 날을 지탱하던 그 감성을 그 시간을 그 설레임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인 지도 모른다.

 

세상은 변하고 있다. 관행이라는 가벼운 말로 나만 아니면 된다는 침묵으로 고통받는 피해자를 방관하지 않아야한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겠지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잘못을 감추고 있었던 그 시대의 가해자들이여... 세상은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다. 당신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더 뜨거워지기 전에 세상 앞에 맨얼굴을 드러내고 진심으로 사과해야 할 시간이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모습에 지금 세상은 참혹하고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