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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배시인의 감동이 있는 시

호박 넝쿨ㅣ김길나


호박 넝쿨

김 길 나


호박 넝쿨을 넝쿨 채 끌어당긴다

얽힌 시간이 호명되어 나올 때

얼기설기 엉킨 기억의 줄기 끝에서

호박불빛이 흐르는 기차역이 딸려 나온다

가방을 들고 여러 번 역사를 드나들었다

달리는 선로 밖으로 달아난 풍경들이 순간

순간 두서없이 꿈속으로 들어왔지만

바람 몇 장이 덧 발려 생시 기억의 벽화 속에서는

형체 없는 점묘로 넌출거렸다

점은 이미 형체가 삭아버린 무덤이지만

점은 새로 몸의 곡선을 세워놓는 자궁이기도 해서 네가

사라져 버린 점은 네가 어디선가 살아나는 발육의 자리인 것

 

얽힘으로 경계를 지운 호박 넝쿨에는 그러므로

어제와 오늘이 병행하는 시계가 달려 있다

추억과 현실이 뒤섞인 추상화가 나붙어 있다

어제의 넝쿨에 열린 마지막 호박 한 덩이

오늘 넝쿨 채 끌려온다

 

김길나는 늦은 나이에 문학과사회에 시집 한 권 분량을 투고해서 시단에 나온 시인이다. 1997, 문지에서 발간된 빠지지 않는 반지가 그것이다. 그녀의 시세계는 단아하고 서정적이며 삶의 현장에서 길어올린 따뜻함이 있다.

호박 넝쿨은 그녀의 시세계를 잘 드러낸 작품이다. 호박 넝쿨을 넝쿨 째 끌어당기면 얽힌 시간과 함께 호박불빛 따스하게 빛나는 기차역이 딸려 나온다. 청소년기의 회고 정서인데 시적 화자는 가방을 들고 여러 번 그 역사를 드나들었던 것이다. 불안한 가출이었을 것이다. 청소년기의 가출은 탈출이다. 가출은 답답하고 무기력한 절망의 깊이에서 선택한 유일한 출구다. 그러므로 둘째 연은 당연하게 그 탈출의 시간 위에 머문다. 꿈속으로 들어왔던 풍경들은 생시, 기억의 벽화다. 벽화는 점묘로 이루어져 형체가 이미 사라진 기억의 무덤이었다. 그러나 점은 새로운 몸의 곡선을 이루는 자궁이기도 해서 어디선가 살아 성장하는 청춘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호박 넝쿨은 어제와 오늘의 경계를 지운 병행의 시간을 갖는다. 병행하는 시간 속에 추억이 있고 추억과 현실이 뒤섞여 현란한 추상화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호박 넝쿨에 달려 있는 호박은 어제의 넝쿨에 매달린 과거의 아련하고 그리운 젊은 날일 것이며 청춘의 고뇌일 것이고 상실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그 서럽도록 아름다운 지난 날들이 오늘 넝쿨 째 끌려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시의 힘이며 미덕이다.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불러오는 힘, 그 찬란함이 여기 있다. 김윤배/시인<용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