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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무장투쟁 선봉장이 돌아왔다
본보 2019년 카자흐 현지 취재 보도 3년만에 결실

LOCAL FOCUS_홍범도 장군 113년 만에 환국(還國)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계기

의병에 투신 일제의 총칼에 맞서

봉오동 전투서 ‘월강추격대’ 섬멸

카자흐 고려인에게 여전히 영웅

해방된 조국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

 

[용인신문] 용인신문은 3년 전 홍범도 장군의 항일무장투쟁 발자취를 심층보도 한 바 있다. 2019년 새해 벽두 본 기자는 당시 3·1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 더불어민주당 특별위원회 이우현 부위원장과 장군의 묘역을 취재, 참배한 바 있다. 키르기스스탄에 거주하는 졸도시 씨의 안내로 겨울의 중앙아시아를 자동차로 가로질러 장군의 묘역이 있는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 주에 자정이 다되어 도착한 기억이 생생하다. 홍범도 거리를 걸으면서 장군에 대한 카자흐스탄 고려인과 당국의 존경과 추모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최근 카심 조마르트 토가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은 문재인 대통령의 초청으로 국빈 방문하면서 장군의 사망진단서와 크질오르다 극장의 수위장 사임서 원본을 전달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계기로 의병투쟁에 투신한 홍범도 장군이 1908년 고국산천을 떠난 이후 1세기가 지나서야 이루어진 위대한 독립운동가의 환국으로 다시 한번 그를 조명한다.  (편집자 주)

 

# 홍범도 장군은 누구인가?

여천 홍범도(1868~1943) 장군의 유해가 마침내 고국 땅에 묻혔다. 이역만리 카자흐스탄에서 영면한 지 78년, 일제의 대한제국 의병 초토화 작전으로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항일투쟁 무대를 바꾼 지 113년 만의 환국이다.

지난 8월 16일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공군 특별기편으로 서울공항에 도착했다. 장군의 유해를 실은 특별기가 대한민국 영공에 진입하자 공군 전투기 여섯 대가 장군의 유해를 호위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부인 김정숙 여사와 함께 장군의 유해를 영접했다. 홍범도 장군은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운동가로 분류되어 그의 공적이 폄하되고 사장되었었다. 평양이 고향인 장군은 머슴 출신으로 삼수갑산에서 호랑이를 잡는 포수 생활을 했다.

 

포수로 조직된 홍범도 의병대는 일제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일본군은 홍범도를 가리켜 비장(飛將), 즉 나르는 장군이라 불렀다.

 

일제와 벌인 수많은 전투에서 홍범도는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조선이 일제에 병탄 된 후 홍범도는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 월강추격대(조선 항일투쟁 조직을 토벌하기 위한 일본군 정규 특별부대)를 섬멸했다.

 

같은 해 홍범도는 백야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전투를 벌여 대승리를 거두었다. 항일 무장투쟁사에서 최고봉으로 평가되는 청산리 대첩의 진정한 주역은 홍범도였다, 홍범도는 겸손했다. 자신의 공적을 상해 임시정부에 알리지도 않았다.

 

홍범도에게 중요한 사명은 일제를 조선 강토에서 몰아내는 것이었다. 1921년 자유시 참변은 홍범도 인생의 분기점이었다. 당시 적백내전에 휘말린 레닌 볼세비키 정권은 만주에서 퇴각하여 소비에트 정권에 의탁한 대한독립군의 사상 검증이 필요했다.

 

홍범도는 소비에트 당국의 요청대로 무장을 해제하고, 그들의 요청에 동의했다. 여기에 불응한 대한독립군은 무참히 학살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홍범도는 볼세비키계로 분류되었고, 적군의 여단장 직책을 맡아 항일 전선에 투입된다. 홍범도의 여정에 설명되지 않는 자유시 참변 이후 1921~1923년의 과정은 러시아 적백내전에 휩쓸려야 했던 그의 고단했던 역경을 유추하게 해준다.

 

#유해송환 계기로 영상 필름 나와

홍범도 장군의 이번 유해 송환을 계기로 발굴된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자대회의 필름이 화제였다. 소비에트 공산당이 주최한 극동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한 장군은 2m에 달할만큼 기골이 장태한 풍채를 보여준다. 봉오동 전투의 또 다른 주역 최진동 장군과 함께 촬영된 장군의 영상은 그가 왜 백두산 호랑이로 불렸는지 설명해 준다. 러시아 혁명 이후 미국 영국 독일 일본 중국 등 18개국은 30여만 명의 다국적군을 러시아에 파견했다.

 

일본은 7만여 명의 간섭군을 극동 연해주에 파견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초토화시켰다. 연해주에서 일본군이 철수한 것이 1923년이다. 기자는 이 과정에서 홍범도 장군이 볼세비키 적군에 가담하여 일본군과 투쟁했다고 믿는다.

 

모스크바 대회에서 홍 장군은 블라디미르 레닌과 레온 트로츠키를 특별 면담했다. 당시 레닌은 장군에게 금화 100루불(1만 루불 상당)과 상아로 장식된 권총, 적군 장교의 정복을 선물로 줬다. 홍범도가 사회주의 진영에 가담한 계기는 자유시 참변이 아니라 레닌과 면담하면서 부터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홍범도 장군 안장식에 토가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을 국빈으로 초청했다. 토가예프 대통령은 크질오르다 장군의 묘역에서 흙을 가져왔다. 장군이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유역에 안장되면서 홍범도는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장군은 건국훈장 중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가 서훈했다.

 

문재인 대통령 내외가 2019년 우즈베키스탄을 국빈 방문했을 당시엔 기자가 취재했던 아리랑 요양원을 김정숙 여사가 방문하기도 했다. 중앙아시아에는 아직도 고려인 후세들이 많이 살고 있다. 따라서 중앙아시아 특히 카자흐스탄 고려인 사회에서 장군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우리 국민들은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

 

다행히 보훈처는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 주 정부와 홍범도 장군의 현지 묘역 보존·관리를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하지만 카자흐스탄 고려인 사회는 장군을 떠나보낸 상실감에 젖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크질오르다에 있는 장군의 묘역 일원을 ‘홍범도 기념단지’(memorial complex)로 공원화하고, 그것을 관리하기로 했다지만 정권이 바뀌면 흐지부지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차제에 법률로 명문화하여 홍장군이 78년간 묻혔던 그곳이 중앙아시아 교민사회의 중심이 되길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