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정치, 경제, 사회 이야기로 뉴스가 시끄러운 사이에도 하늘은 기어코 가을을 품었다. 수확의 계절답게 추수된 작물들이 마트에 진열되었다. 그런데 ‘국내산’을 달고 있는 열대 작물들도 간간이 보인다. 전량 수입에 의존했던 먹거리들이 이렇게 우리나라에서도 재배된다는 건 두 가지다. 종자가 수입되거나, 종묘가 수입되거나. 종자산업의 중요성을 국내에 알리기 위해 씨없는 수박을 소개했던 우장춘박사도 있었다. 인류의 생존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종자산업은 인류의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를 준비하는 것이라 중요하다. 필자는 경제성 때문에 작물의 다양성이 확보되지 않다보니 시시각각 변하는 지구 환경에 종자들이 적응하지 못할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경고한다. 종자를 저장하는 것은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는 지구의 미래를 걱정하는 국제적 노력의 결실이라고 말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노르웨이 농업식품부, 북유럽 유전자원센터(스웨덴 알나르프), 세계작물다양성재단(독일 본)과 협력한 비영리 국제 협력 시설이다. 언제라도 폭설을 만날 수 있고, 한가롭게 유모차를 밀며 산책을 하더라도 북극곰을 걱정해 총을 들고 다녀야 하는 도시 스발바
[용인신문] 요즘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면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내가 하면 로멘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을 뜻하는 이 말은 이중적인 평가의 잣대를 비틀어 하는 말이기도 하다. 최은영의 『밝은 밤』은 전혀 반대의 이야기다. 더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 현재의 나를 돌보지 못한 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에게 ‘나’를 돌아보게 한다. 증조모는 차별과 의무 때문에 위안부로 끌려갈 위기에 있었다. 그런 증조모를 구한 증조부. 그러나 증조부의 정의감은 위선이었다. 자식을 키워내느라 증조모 삼천이 밷어내지 못한 슬픔은 영옥을 지나 미선에게, 그리고 현대를 사는 지연으로 이어진다. 삼천은 딸인 영옥을 위해 견뎌야 했고, 영옥은 또 그 딸을 위해 견딤의 시간을 보내야 했으며, 엄마 미선 역시 자책감으로 딸에게도 아버지에게도 당당하지 못하다. 그런 슬픔들이 유전되어 지연의 삶 역시 운명적으로 얽혀 있다. 이들은 딸들을 키워내기 위해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엄격해야 했다. 고개를 들고 싶었지만 정작 고개를 낮추고 숨죽여 살아야 했던 슬픔. 삼천의 가족과 데칼코마니처럼 닮은 새비 아주머니네 가족의 등장으로 지연 일가의 슬픔은 더욱 굴곡져 보인다. 새비 아주
[용인신문]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 박해를 받는 장면이 요즘 세간에 충격을 주고 있다. 이들과 갈등관계에 있는 유대인들도 여성에게 차별적인 집단이 있으니 바로 하시딕 공동체이다. 하시딕 공동체에서 탈출한 데버라의 이야기가 Unorthodox(언오소독스)라는 도서이다. ‘정통적이 아닌’ 혹은 ‘특이한’으로 번역되는 도서의 제목처럼 유별난 어느 집단의 이야기 이기도 하다. ‘밖으로 나온 아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는 이 책은 차별과 억압을 일상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자유의 여신상으로 대변되는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더 충격적이다. 대부분의 유대인은 디아스포라로 이해되고 데버라의 진술을 들어보면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디아스포라(Diaspora)는 팔레스타인을 떠나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유대교의 규범과 생활 관습을 유지하는 유대인에 대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말이다. 데버라를 키운 할아버지는 홀로코스트에서 생존한 사람이라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하지만 공동체에서 일상으로 여겨지는 여성에 대한 금기들은 선을 넘고 있다. 소녀들의 호기심이나 고등 교육이 허락되지 않으며 자아실현이라는 말조차 모르고 자라는 아이들. 오로지 순종과 복종을 강요
[용인신문] 게임 체인저를 기다린다. 코로나19는 변이바이러스를 생산해 내며 전 세계를 제패하려 한다. 우리 모두는 백신이든 치료제든 지금 상황에 제동을 걸 만한 게임 체인저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김준의 책은 연구자들의 처절한 노력을 통해 어떻게 희망을 찾아내는지에 대한 안내를 한다. 저자는 스스로를 실험실의 노예라고 부른다. 그의 동료 역시 노예 2·3호다. 저자가 연구하고 있는 ‘예쁜꼬마선충’은 아주 작은 생물이다. 생애주기는 고작 3주 정도이다. 쓸모없다고 생각되는 선충은 모델 생물로서 좋은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생명현상을 연구하는 실험재료로써의 탁월하다는 의미인데 그 작은 생물 덕분에 연구자는 효과적으로 실험결과를 알아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게다가 예쁜꼬마선충은 인간과 유사한 유전자도 상당수 있다고 하니 ‘지금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만한 실험이 이들을 상대로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기대감도 들게 한다. 도서의 앞부분은 생물학자가 가져야 할 미덕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라서 진로를 고민하는 학생들에게도 유익한 내용이다. 과학자로서 김준은 질문을 더 깊게 하는 요령도 안내하는데 이는 과학뿐 아니라 인문적 사유의 폭도 넓힐 수 있을 만 한
[용인신문] 제목만으로 봐서는 사적인 에세이의 느낌이 다분하다. 내용을 읽어보니 철저하게 실험으로 증명하는 과학의 이야기이다. 그간 ‘적자생존’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패러다임을 뒤집는 이야기들이 실험과 함께 제시된다. 적자생존의 논리가 다윈의 주장이 아니었다는 것도 새롭다. 여러 단원에 걸쳐 다양한 동물 집단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다정함으로 인해 생육·번성하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것. 그런데 인간은 오히려 그 반대의 정책으로 스스로를 망가뜨린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동물들의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다. 번역도 읽기에 편안한 편이다. 인류사와 거시 역사에서 찾는 관계의 결과들도 흥미롭다. 역사책에서나 봤을 서사들이 내부에 사회심리학적으로나 인류학의 관점에서 비교하여 설명하는 것을 읽는 과정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정책이나 교육의 중요성은 여전히 중요하다. 스포츠를 즐겨야 하는 이유도 흥미롭다. 특히 나랏일을 하는 분들에게 더욱 필요한 도서이다. 사실 시장경제나 자유경쟁 체제라는 말 속에는 상대를 적으로 상정하고 이겨야 한다는 전제를 함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요즘 대선 정국도 반복의 극단을 가고 있다. 학창시절, 인간들의 경쟁으로 소외현상이 일어난다
[용인신문] ‘실체적 진실’이란 재판을 할 때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는 기본원칙인데 죄를 밝히고 형량을 정하는데 중요한 요건이다. 『죽이고 싶은 아이』는 무엇이 실체적 진실인지 밝히려는 독자와 화자 사이의 줄다리기가 잘 설계된 소설이다. 빠르게 진행되는 사건과 인물소개 사이에 독자가 잠시 한숨을 돌리는가 싶으면 다음 사건이나 인물이 다시 혼란에 빠트리는 형국이다. ‘죽이고 싶은 아이’를 만드는 프레임은 히틀러의 선전관 괴벨스가 생각했던 방법과 다르지 않다. 요제프 괴벨스는 “대중의 잠재의식 속에 있는 인종적 편견이나 증오 또는 공포심을 극대화해 선전에 활용”(정철운, 『요제프 괴벨스-프로파간다와 가짜뉴스의 기원을 찾아서』(인물과사상사, 2018, 85~86쪽)하여 히틀러를 독일의 수장으로 만들었다. 히틀러를 뽑아준 이들은 경제공항으로 두려움에 빠진 대중들이었다. 소설 속 인물들도 히틀러를 수장으로 만든 대중처럼 각자의 두려움과 욕망에 의해 타인을 정의하고 재단하며 혐오한다. 이해관계가 맞지 않으면 누구든지 타인에게 등을 돌리는 자기애의 극단 그리고 냉소. 이러한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죽이고 싶은 아이’가 완성된다. 증언은 사실인 것처럼 위조된다. 하지만 끊임
[용인신문] 이번에도 악이다. 작가의 전작 『종의 기원』이나 『7년의 밤』에서 봤던 종류의 악과 또 다른 모습이다. 『종의 기원』은 유전자에 새겨진 악의 본성에 관한 것이라면 『7년의 밤』은 사람이 어떻게 극악의 순간을 향해 가는가를 묻는다. 『완전한 행복』은 제목처럼 ‘행복’을 위한 뺄셈의 과정, 다시 말해 행복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제거해 나가는 과정이다. ‘핑게없는 무덤 없다’는 속담처럼 모든 죽음에는 이유가 있게 마련이지만 어떤 죽음은 여전히 미궁 속에 있다. 이야기는 탐정의 조사처럼 조각조각 혼재하던 죽음들이 하나의 이유로 얽혀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사건은 주인공을 둘러싼 주변인의 시선과 생각으로 독자에게 전달되어 점점 실체를 드러낸다. 중요한 것은 ‘왜?’의 문제이다. 소설은 극강의 악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사람 냄새를 풍기는 주변인에 의해 더욱 악해진다. 가족을 지키려는 가난한 아버지, 증오하는 동생의 조카이지만 그 아이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는 이모, 문제 많은 자식이지만 끌어안고 싶은 엄마. 비록 친자식은 아니지만 돕고 싶었던 어떤 아빠. 그리고 낯선이가 겪는 곤란함을 지켜주고 싶었던 어떤 마음. 악은 이 모든 것을 파괴하고 이용한다. 그리고
불안의 시대가 우리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읽기’는 마음 속에 징검다리를 놓아 줍니다. 사람을 읽고, 세계를 읽는 이유는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좀 더 나은 결정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책을 읽는다면 다음 행보를 훨씬 안전하고 따뜻하게 갈 수 있지 않을까요? 이헌서재(怡軒書齋)는 행복한 ‘우리’를 생각하며 만든 이름입니다. 이곳에서 함께 행복한 독서를 이어가길 기대합니다. 용인신문에서 저의 책 소개를 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헌서재에서 백현주> [용인신문] ‘10만 양병설’을 주장해 조선의 위험을 미리 막고자 했던 율곡 이이, 10년이 걸려야 할 작업을 고작 3년이 안되는 시간에 마치게 지휘를 했던 정약용, 왕까지 꾸짖는 용기있는 사람 이황, 그리고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모티브로 등장했던 이덕무까지. 이들은 모두 읽기를 즐겨하여 이를 현실에 실현하려고 했던 인물들이다. 그렇다면 과거로부터 ‘읽기’는 어떻게 변해 왔을까? 『읽는다는 것의 역사』는 말 그대로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읽기’에 대한 시대별 특징을 소개한다. 고대 그리스의 읽기는 소리 내어 읽기였다. 그래서 읽는 이가 연출하는 분위기가 청자에게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