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걸으세요, 삼라만상과 속 깊이 어우러질 테니 이경철(시인, 전 중앙일보문화부장) ▲ 그냥 걸으세요삼라만상과 속 깊이 어우러질테니 난 오늘도 걷는다. 집에서 초부리 버스정류장까지 20여분. 시내에 나가려 그 길을 걸어서 오간다. 도중에 간혹 차 몰고 다니는 마을 분들을 만나면 한사코 정류장까지 태워다 주겠다는 그 호의를 감사히 거절하곤 한다. 걷고 싶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걷기가 대세가 됐다. 시내 공원에서는 새벽이거나 낮밤이거나 걷는 사람들로 붐빈다. 빨리 걷기로도 부족해 팔 활개 치며 파워 워킹 하는 사람들도 많다. 시내 공원은 워킹족에게 점령당한지 오래. 달리기나 근력 운동보다는 걷기가 살빼기나 성인병 예방에 좋기 때문이란다. 걸으면 뇌에 혈액과 산소를 잘 보내줘 머리도 신선하게 잘 돌아간다. 산을 에둘러 걷는 길들도 무슨 둘레길이란 이름으로 계속 생겨나며 심신의 건강을 돌보게 하고 있다. 그러나 난 그런 운동으로서 걷는다기 보다는 산보로 걷는다. 일본식 한자라서 피하고 있는 산보(散步)라는 말에는 걸음을 흩트린다는 그 散이란 뜻이 제대로 살아있어 좋다. 산보라는 말에서는 우선 어릴 적 설fp이던 소풍(逍風)이 떠오르고 나이 들며 가슴속에
5월이면 온통 꽃 세상이다. 초부리 우리 집 앞뜰에는 바닥에 울긋불긋 꽃잔디 꽃 깔아놓고 철쭉꽃이 붉게 피어오르며 5월을 맞는다. 철쭉꽃 위엔 또 커다란 모란꽃이 피어오른다. 부처님 각시처럼 곱고 귀하게 피어올라 훈풍에 보랏빛 실크 치맛자락을 날리던 모란꽃 이파리 이파리들. 훈풍에 날리는 모란꽃 이파리들의 부귀영화 위에서는 또 소나무가 노랗게 노랗게 꽃을 피운다. 부귀영화는 남 일이란 듯 사철 꼬장꼬장 푸르기만 하던 소나무도 애써 꽃 피워놓고 바람 기척만으로도 송홧가루를 천지가 먹먹하게 날리고 있다. 어버이날이 있고, 스승의 날이 있고, 또 성년의 날이 있는 5월에는 가정에도, 도심에도 꽃들이 넘쳐난다. 장미 한 송이 주고받으며 성년이 됐음을 자축하는 앳된 젊음들이 꽃보다 훨씬 더 예쁘고 부럽다. 푸름이 더해가는 가운데 완숙한 꽃들의 세상인 5월은 인생으로 따지자면 분명 성년의 계절일 터. 꽃잔디꽃 위에 철쭉꽃 철쭉꽃 위에 모란꽃 부처님 색시 같은 모란꽃이 피었습니다. 모란꽃 위에 소나무꽃이 피었습니다. 사월이라 초파일 우리 집 앞마당은 눈 머문 층층이 다 맞춤한 꽃세상인데 천지간 부칠 데 없는 이 내 마음만 송홧가루 되어 아리게 날리고 있습니다. 층
이경철 시인의 초부리 시첩 그늘이 있어야 더 환한 꽃세상인 것을 산줄기 들이 많은 고지대여서 그런가. 방위상으로는 분명 남녘인데도 용인에는 서울보다도 봄이 더 늦게 온다. 서울에는 개나리 이미 한물갔고 목련이며 벚꽃 만발해 꽃놀이 한창인데도 집 앞뜰 고것들은 더디게 피어오를 채비를 하고 있다. 그래서 햇살 좋은 날 봄이 얼마만큼이나 왔나 까마귀봉으로 올라가보았다. 초부리 우리 마을을 금계포란(金鷄抱卵) 형세로 감싼 낮은 산자락의 닭 머리격이 까마귀봉이다. 더 높은 산 높은 하늘로 날아오려는 까마귀들이 둥지를 튼 곳이라 그리 불렸을 것. 날이 풀려서인지 그곳에서 마을로 내려와 춘정(春情) 넘치는 소리로 울며 졸라대는 까마귀 울음이 나를 산으로 이끌었다. 산속에 들어가니 소나무며 참나무 사이에서 봄의 전령이라는 생강나무 꽃들이 노랗게 한창 피어오르고 있었다. 양지바른 산등성이에는 진달래꽃도 무더기 무더기 피어있었다. 게으른 주인만 쳐다보며 더디고 더딘 내 집 앞뜰 꽃나무들보다 산중에서는 저들끼리 알아서, 협동해서 서로서로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이른 봄 노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꽃이 다 산수유만이 아니라는 것을 지난봄에야 알았다. 흐드러진 산수유보다는 더
이경철시인의 초부리시첩6-스프링 소나타, 이율배반과 화합의 선율 경칩 지나자 3월초인데도 봄기운이 완연했다. 아니 절기상 분명 봄이다. 환한 햇살에 봄이 어디쯤, 어떻게 오고 있나 보려 집 뒷동산에 올랐다. 쭉쭉 뻗은 소나무 비탈로 들어서니 뾰족한 잎새를 부는 바람소리가 아직은 시렸다. 등성이에 오르니 양지녘은 언 땅 녹아 질척질척했다. 산이 몸을 풀고 있으니 이제 곧 새싹이며 개나리 진달래 꽃 봉오릴 내밀 것이다. 까마귀봉 봉우리에서 까악, 칵 목 터지게 울던 까마귀 메마른 울음소리에도 이제 아르르, 악 물기가 촉촉하다. 뒷동산에서 내려와 내친 김에 마을 앞개울과 그 너머 경안천까지 가 보았다. 혹여 TV 뉴스 화면에서 본, 겨울잠에서 깨어난 개구리는 없을까 하고. 겨우내 소리도 얼었던 물소리가 제법 시원스레 들렸다. 옅은 여울목엔 안보이던 왜가리들이 나타나 예의 한 다리 명상법으로 물속을 응시하고 있었다. 얼음 풀린 저 물 속엔 필시 봄볕에 기어 나와 나처럼 노니는 피라미며 물고기들이 있을 것. 천변 언덕에는 물을 향한 버드나무 가지들에 연둣빛 물이 잔뜩 오르고 있었다. 요, 요, 요 버들강아지들도 환한 햇살 바람에 그 보드라운 솜털을 날리고 있었다.
이경철 시인의 초부리 시첩詩帖 5 입춘 지나 설날과 우수로 가는 2월, 순정한 새봄을 위해 2월처럼 밋밋하고 허탈한 달도 없을 것이다. 작대기 두 개, 가을과 겨울 사이에 허허롭게 껴있는 달이 11월이듯 겨울도 아니고 봄도 아닌, 그 사이에 껴 참 밋밋한 달이 2월이다. 정초의 작심(作心)이 무너져 그저 세월 속으로 흐르는 달이 2월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올 2015년도 달력을 보시라. 입춘이 있고 설날이 있고 꽁꽁 언 북녘 강물도 풀리는 우수도 들어있다. 전년도엔 설날보다 한참 뒤쳐졌던 입춘이 설날 앞서 갔고 설날은 또 우수와 겹치고 있지 않은가. 지각한 절기를 작년 윤달로 다 청산하고 올해는 일찍, 제철을 맞고 있지 않은가. 찬바람 맞고 있는 매화도, 언 땅속의 마늘도 꽃과 이파리를 틔울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는 2월이야말로 천지간 삼라만상의 시작일 것을. 바람은 차도 따스하도록 환한 햇살 속에는 이미 봄이 와 있지 않은가. 이곳 초부리 전원 속으로 이사한 이래 나는 24절기와 함께 하고 있음을 온몸으로 분명 감지하고 있다. 도심에서 포은대로를 달려 귀가하며 산 능선으로 커다랗게 떠오르는 달들이 초승달에서 보름달로 변해가는 형상들을 보면서, 새벽하늘
이경철시인의 초부리시첩4 용인, 그 위대한 여정-포토 히스토리 100년 상설전시를 4월 초파일 정원에 모란꽃이 부처님 색시처럼 곱게 피어나자 사진을 찍어뒀다. 환한 햇살 바람에 엷은 비단 치맛자락을 휘날리던 큼직한 모란꽃을. 듬성듬성 눈이 덮인 초부리 야산 자락에 흰 눈의 정령처럼 우뚝 서 있는 자작나무 군락을 찍었다. 막 떠오르는 햇살에 하늘을 향한 자작나무 자디 잔 가지들이 빛살이 되어 찍혔다. 몇 십 년 전 신혼여행 때 명승지에서 사진만 찍어대던 부부들을 봤다. 남는 것은 사진밖에 없다며 풍광 감상보다는 사진 찍기에만 다들 몰두하고 있었다. 어찌 사진이 그때그때의 생생한 느낌을 대신하게 할 수야 있겠느냐며 그런 사람들을 속물로 여겨왔었는데 여기 용인 초부리에 정착하고부턴 계절 계절 놓칠 수 없는, 영영 아까운 풍광들을 나도 어느새 사진에 담아두게 됐다. ◇대성전 졸업식 1900년대 초 사진을 처음 접한 지구촌 오지의 원주민들은 대체로 카메라 앞에 서기를 죽기보다 싫어한다. 카메라가 자신의 목숨과 혼을 그대로 빼간다고 믿기 때문이란다. 피사체의 정령이 그대로 담긴다는 게 사진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 심정이다. 어디 정령뿐이겠는가. 찍고 바라보는 이
이경철 시인의 초부리시첩3 내 손바닥만 한 하늘에서 별 헤는 새벽 낮은 야산들로 둘러싸인 우리 초록마을 손바닥만 한 하늘에서도 가을이 지나갔다. 오랜 가을가뭄 끝에 서걱서걱 잔뜩 찌푸린 하늘이 주룩주룩 비를 뿌렸다. 한 이틀 비구름에 가린 새벽하늘에 큰 바람 불어 빗질한 틈새로 하나 둘 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도 잠깐, 먼동이 터오는 기미가 보이자 별은 사라지고 하늘 가득 흰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12월로 들어서자마자 첫눈이 함빡 내려 계절은 이제 정말로 겨울로 들어갔다. 달력의 이 정확함이라니. 촐싹대는 기상예보보다는 아무래도 더 의젓한 이 우주 운항의 순리라니. 이곳 초부리로 이사 와서는 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둑해지면 이제 별들이 나왔겠거니 하늘을 쳐다보고 잠자리에 들 땐 얼마나 초롱초롱한가 들여다보고 새벽에 일어나 중천에 뜬 별자리들을 그려보는 재미. 아니 재미라기보다는 이제 별을 헤아리는 것이 한 의미가 돼가고 있다. 처음엔 야산에 둘러싸인 좁은 하늘이 답답했다. 넓은 곳에서 보면 달과 별들이 저 하늘 높이, 광활하게 떠있고 펼쳐져 있는데 이 손바닥만 한 공간이라니. 그러던 어느 컴컴한 그믐밤 내내 달을 쳐다보며 차를 타고 대
초부리시첩2 _ 남구만문학상 제정이 곧 용인의 복덩이일지니 이경철(시인, 전 중앙일보 문화부장)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니 초등학교 때 배운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의 시조이다. 나 뿐 아니라 동창이 밝았느냐만 들어도 남이든, 북이든, 해외이든 우리 민족 모두가 뒤따르는 시 구절을 쉽게 떠올리고 욀 수 있는 국민시조이다. 저 단군조선 이래 우리 역사에서 이 시처럼 친숙하고 널리 읊조려지고 있는 시도 드물다. 시조는 반만년 내려온 우리 민족의 삶과 언어, 그리고 사상과 정한(情恨)이 3장 6구 45자 안팎의 틀에 담긴 정형시, 민족문화의 원형이다. 3,4,3,4로 나가는 운율은 우리가 일상 쓰는 말의 걸음걸이 같아서 익숙하다. 3장 6구 구성은 퍼질러만 놓고 마무리는 못하는 일본의 하이쿠 등 2장 구조와는 달리 확 싸매버리는 종결감이 있어 안정적이고 그윽하다. 해서 시조의 운율은 우리 핏속에 반만년 유전돼온 민족의 맥박이다. 이런 시조가 있어 우리는 아무리 고된 일상에서도 삶과 사회와 인간의 본분을 둘러보며 제자리를 찾게 할 수 있었고 또 그 속에서 삼라
초부리시첩(草芙里詩帖) 1 훈민정음(訓民正音), 한글로 사나운 민심들 바로잡으시길 용인시(龍仁市) 처인구(處仁區) 모현면(慕賢面) 초부리(草芙里)에 둥지 튼 지 반여 년. 이른 봄에 와 여름 지나고 이제 가을 한가운데로 들어가고 있다. 초록마을 길이 끝나는 집으로 이사 오던 날 야트막한 야산으로 둘러싸인 하늘에 초승달이 샛노랗게 떠올랐다. 이어 하나 둘 눈뜨는 별, 별들. 그래 이 새로운 거처를 달과 별의 계곡이라 부르니 마을로 들어설 때 여기저기 눈에 띄는 소규모 공장들에 심란하던 마음이 적이 안심이 됐다. 마당에 철쭉꽃이 붉게 피어오르자 산이 무너져라 꿩, 꿩 울던 꿩들이 조심조심 집 앞까지 내려왔다. 볏과 깃이 꼭 철쭉꽃 색깔인 장끼 옆에는 꼭 까투리 한 마리도 함께 했다. 들고양이가 삵 같은 사냥 본능에 낮은 포복으로 야금야금 다가서면 훌쩍 날아올라 쫓아버리던 그 우렁찬 꿩 소리에 봄날은 가고. 목련이며 철쭉, 모과꽃이며 찔레꽃, 텃밭의 감자꽃이며 쑥갓꽃 이울고 묵정밭에 하얗게 망초꽃 피어오르며 여름이 왔다. 흐드러진 망초꽃 사이사이 노란 달맞이꽃 피어오르더니 고라니들도 한두 마리씩 산에서 내려와 달맞이꽃 같은 귀를 세우고 큰 눈망울로 사방을 경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