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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진의 BOOK소리 44

   
최은진의 BOOK소리 44
라면을 끓이며
먹고 산다는 것의 안쪽을 들여다보는 비애
◎ 저자 :김 훈 / 출판사 : 문학동네/ 정가 : 15,000원


“한국문단의 벼락같은 축복”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등장한 김훈 작가의 글은 안 읽어 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 읽어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글쓰기의 완성은 산문에 있다는 말이 있다. 산문의 에두르지 않는 진솔함과 담담함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도 연필로 꾹꾹 눌러서 글을 쓴다는 그의 손가락에 박힌 굳은살은 ‘온몸으로 길어 올려 생을 쓴다’는 증거일 터. 그러므로 육체적인 노동으로 인한 사실성에 바탕을 둔 그의 문장이 가슴을 울리는 것은 당연하다. 절판된 그의 산문집 <밥벌이의 지겨움>,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바다의 기별>에서 산문을 가려 뽑고, 새로 쓴 원고 400매 가량을 합쳐 <라면을 끓이며>를 펴냈다.

오래된 글들에서 버려도 좋을 것은 버리고, 버리기 아까운 것들, 세상에 다시 내놓아도 좋을 것들과 새로운 글들을 합쳐서 내놓았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이 책은 “먹고 산다는 것의 안쪽을 들여다보는 비애”에 주목한 글들이다.

밥, 돈, 몸, 길, 글이라는 5가지 주제로 분류하여 50여 편이 넘는 글을 담았다. 일상 생활에서 만나는 문제와 사유들이 칼날처럼 힘 있는 문장을 만나서 깊고 풍요로워져서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그의 글을 처음 만나는 사람은 그 유려함과 사유의 깊이에 놀랄 것이고, 이미 익숙한 사람은 곱씹을수록 맛이 우러나는 문장에 감탄을 하게 된다.

TV광고에서 라면국물을 들이킨 연기자가 “아!”하는 탄성과 함께 열반에 든 표정을 지을 때 갑자기 라면이 먹고 싶어진다는 저자. “짙은 김 속에 얼굴을 들이밀고 뜨거운 국물을 마시면, 콱 쏘는 조미료의 기운이 목구멍을 따라가며 전율을 일으키고, 추위에 꼬인 창자가 녹는다……슬프다, 시장기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기운이 몸 안으로 스미기 시작하는 지금, 가진 그릇 중 가장 아름답고 비싼 도자기 그릇에 담아서 깨끗하고 날씬한 일회용 나무젓가락으로 라면을 먹는 상상을 해본다. 그 순간만큼은 이 땅의 수많은 가장들 밥벌이의 지겨움도, 먹고 산다는 것의 비루함과 채워지지 않은 허기도 잠시 잊을 수 있지 않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