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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년, 좋은 인연으로 다시 펼치는 송년되시길

  

망년, 좋은 인연으로

다시 펼치는 송년되시길

이경철(시인, 전 중앙일보문화부장)

 



이래저래 바쁜 연말로 가고 있다. 연초에 계획만 세워놓고 손도 못 댄 일들 많아 다급한데 여기저기 가봐야 할 연말모임도 적잖다. ‘부르는 데는 꼭 가야한다. 안 나가면 다음엔 부르지도 않을 테니.’ SNS에 떠도는 ‘10계명중 무섭게 꽂혀온 말이다. 젊으나 늙으나 가장 두려운 말이 왕따소외아니던가.

 

연말모임은 인간과 사회 관계망의 총화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연말의 모임이야말로 올 한 해, 아니 전생이며 후생까지 이어질 네트워크의 꽃밭 아니겠는가. 그러니 결코 함부로 할 수 없는 게 이러저러한 인연의 일로 맺어진 연말모임이란 걸 익히 알 것이다.

 

지난 121일 용인상공회의소에서 김종경 시인의 첫 시집 기우뚱, 날다(실천문학사 출간)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12월 들어서자마자 열려서 그런가. 나는 그 출판기념회를 올 첫 연말모임처럼 생각하고 나갔다.

 

·현직 시장을 비롯한 정치인들과 단체장들, 그리고 상공인과 문화예술인 등 100여 명이 자리를 함께 했다. 타지 인사들은 영상을 통해 용인과 김 시인과의 인연을 강조한 그 모임이야말로 용인시민 100만 시대를 이끌고 있는 용인 인연의 총화로 내겐 보였다.

 

장난치고 떠들다가/반장 녀석이/몰래 이름 적어내는 바람에/실컷 야단맞고/화장실 청소까지/했는데//세월이/수십 년 지났건만/그때의 반장 녀석/아직도,/심지어,/머릿속까지/따라다닐 줄이야

 

지난 정권 때 나돌던 블랙리스트를 재밌게 떠올리는 시 블랙리스트전문이다. 김 시인의 이번 시집 첫머리에 실려 한 눈에 들어왔음인가. 자신도 그 리스트에 올라 불이익을 당했던 개그우먼 김미화씨는 이 시를 인용하며 환하게 용인과 김 시인의 앞날을 축원해줬다.

 

“21세기 노마드시대에 아직도 고향에서, 그것도 탯줄을 끊었던 본적지 집에서 살고 있는 걸 보면 큰 바보 아니면 복 된 삶이 분명합니다. 이십 대부터 지역언론과 지역문학운동에 몸담아 청춘을 온전하게 다 바쳐왔고 앞으로도 또 그러할 것입니다.”

 

인사말에서 밝혔듯 김 시인은 용인에서 낳고 자라고 지금도 살며 용인을 정의롭고 살기 좋은 으뜸도시로 만들기 위해 언론활동과 문학과 문화운동을 펼치고 있는 시인이다. 그런 김 시인을 한국 대표시인인 고은 시인은 김종경은 아예 향토 용인의 삶을 자신의 운명으로 삼는 시인이라며 끌로 생나무를 파낸 듯한 놀라운 표현과 시재(詩才)로 큰 시인의 꿈 이루길 기원했다.

 

새벽마다/ 유모차에 조간신문을 가득 싣는/ 그녀는 뉴스의 유휴기간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 오는 날이면/ 내 삶보다/ 남의 삶이 더 먼저 젖을까봐/ 전전긍긍하는 그녀/ 좌판 위 취객에게/ 신문지 이불을 만들어주며/ 안녕이라고 말하는// 편의점 알바의/ 긴 하품과/ 청소차에 매달린/ 사내들의 가쁜 숨소리까지/ 가득 싣고 달리는/ 돌아온 그녀의 유모차는/ 오늘도 분주하게/ 새벽을 배달한다

 쉽고 솔직하면서도 따뜻하고 감동적인 시 새벽마다전문이다. 유모차에 신문 등 폐지를 주워 살아가는 허리 굽은 할머니, 좌판 위에 잠든 노숙자 또는 취객, 편의점 철야 알바생, 쓰레기차에 매달린 환경미화원 등 서민들의 삶을 카메라 앵글로 붙잡듯,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시인데도 인정이 살아있고 희망이 살아있다. 그런 삶들을 다 보듬어 안아주는 시인의 순정한 마음과 앵글 때문에 하나도 어려울 것도 없이 감동적인 시가 되고 있다.

 

기우뚱, 날다에 실린 시들은 속이 깊고, 진솔하고, 착하다. 존재 자체와 인간들이 순하게 어울리는 세상에 눈떠가던 사춘기 혹은 청춘 시절의 그 순정한 눈으로 오늘을 보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타락한 세상 타락한 시들이 판치는 작금의 우리 시단이기에 기우뚱, 날다는 더 따뜻하고 값지게 읽힌다.

 

세사에 아무리 휩쓸리고 시달려도 새벽이면 문득 문득 찾아오는 우리네 순정 같은 맑은 정신과 혼. 그리고 끝 간 데 없는 그리움 같은 것을 올곧고 아름답게 퍼 올리고 있는 시들을 낭송하며 그런 시세계로 빠져 들어간 모임. 그런 우리네 순정한 꿈과 마음을 지키며 순정한 세상을 어떻게든 지켜내고 이끌고 있는 것이 시가 쓰이고 읽히는 이유고 좋은 인연 맺으며 살아가는 이유임을 그날 출판기념회에서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눈 오고 강물도 얼어붙은 한겨울인데도 경안천변 갈대들은 하얀 홀씨를 여직도 날리고 있다. 언 땅, 언 강 피해 환한 햇살 속으로만 제 몸 찢어발겨 송별하는 저 갈대꽃 안쓰러운 인연들……. 내년, 내후년이면 또 활짝 피어나 온몸으로 서로 부둥켜안고 춤출 인연들. 우리네 연말모임도 그런 갈대꽃 인연 같은 송년회(送年會)가 됐으면 좋겠다. 잊어버리자는 망년회(忘年會)가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