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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철 초부리 시첩>

 

작심삼일에 쫓기는 마음 입춘과 설을 맞아 넉넉히 다잡아주시길

이경철(시인, 전 중앙일보문화부장)

 


새해도 벌써 한 달 넘게 훌쩍 지났다. 첫날 아침 하얀 떡국 끓여먹고 붉게 떠오르는 해를 눈여겨보며 뭔가 마음 다잡았었는데. 그런 다짐이 슬슬 풀려가고 있다.

 

작심삼일이 아니라 그놈의 한겨울 난데없는 미세먼지 때문이다. 아니다. 꼼짝 못하고 웅크리게 하는 혹한 때문이다. 미세먼지와 혹한을 오가며 걸린 감기기운 탓으로 작심삼일을 변명도 해봤으나 그것도 아니다. 그럴수록 내 자신만 더 유약하고 쪼잔해 보인다.

 

그래 며칠 전 냉동고 추위 속에 남한서 가장 춥다는, 추워야 더 좋다는 강원도 인제를 찾았다. 할복하고 죽어 칼바람추위에 맞서며 황태로 다시 태어나고 있는 명태들을 보기위해. 칼바람 속에서 온몸을 피멍들도록 벗겨가며 하얗게 새봄을 예비하고 있는 자작나무숲을 보며 작심삼일에 쫒기는 마음 둘러보기 위해서다.

 

시베리아 동토 얼음물이 흘러드는 오호츠크 차디찬 바다 속에서 노닐다 속초로 잡혀와 배를 가르고 미시령 칼바람이 넘어오는 인제 용대리덕장에 목매단 명태들. 언 하늘 향해 입들을 쫙쫙 벌리고 뭔가 억울하다 데모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아니다. 황태로 환생하기 위해 악을 쓰며 칼바람을 인내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렇게 악쓰면서 제 몸을 얼리고 녹이고 반복하는 고통을 즐겁게 견뎌내야만 거무튀튀 썩어버린 먹태가 아니라 황금빛 황태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 그러나 그것도 아닐 것이다. 입은 쫙 벌리고 있으나 명태는 말이 없으니.

자작나무란 말만 들어도 새하얀 러시아 설원이 펼쳐지고 너무 맑아 몸속까지 투명하게 비칠 것 같은 쭉쭉 뻗은 러시아처녀들이 떠오른다. 산도 많고 물도 많아 춥기론 빠지지 않는 용인에서도 산등성에 보란 듯 서있는 자작나무 몇몇은 어렵잖게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깊은 산속에 수십만 그루로 서있어 자작나무숲이란 말 자체가 고유지명이 된 곳은 인제에만 있다. 동해에서 일출을 보고 자작나무숲을 거닐며 새해를 구상하고 다짐하기에 좋아 많이들 찾고 있는 명소가 됐단다.

 

묵묵히 떼거지로 눈을 밟고 쑥쑥 올곧게 솟아올라 언 하늘 떠받들고 서 있는 자작나무숲. 다가가보니 칼바람에 거무스레한 옹이며 껍질을 벗겨내고 있었다. 실핏줄 발갛게 드러날 정도로 속살까지 아프게아프게 벗기며 더 하해져가고 있었다.

 

능선에 올라 그런 자작나무숲을 내려다보니 온통 자줏빛 크림색이다. 다른 나무들은 3월로 들어서야 부지런히 물을 끌어올려 가지 끝들이 띠는 크림색을 한겨울에도 물들이며 봄을 예비하고 있었다. 그래 ! 장하구나하고 절로 터져 나오는 탄성을 능선 칼바람이 막는다. 숲은 말이 없는데 입 다물라고. 그런 입의 말들이 곧 작심삼일이라고.

 

미시령 칼바람에 할복한 채 목매단 저 명태들 아가리 쫙쫙 벌리고 언 하늘 향해 무엇을 항변하나 두 눈들 부릅뜨고 무엇을 인내하고 있는가

 

쌓이고 또 쌓인 눈 속 쭉쭉 뻗어 올라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저 자작나무들 칼바람 속 알몸으로 무슨 천벌인가 혼탁한 천지간 무엇을 하얗게 지켜내려는 피멍든 몸부림인가

 

묻지 말란다 읽지도 생각지도 말란다 눈 속에서 온몸으로 써가고 있는 저들의 하얀 문자.

 

자작나무숲을 거닐며, 실핏줄이 드러난 것 같은 나무줄기가 안쓰러워 어루만지고 뺨도 대보며 시상을 떠올리려 해도 영 잡히지 않아 그냥 메모해본 것이다. 내 마음을 저들에게 덧씌우려는 얄팍한 마음이 사라질 때 저들 스스로 입을 열어 시 속으로 자연스레 들어올 것이다.

작심삼일이라, 마음 스스로 마음을 먹게 해야 작심영원일 텐데 강압적으로 먹인 탓에 그럴게다. 절기(節氣)는 이제 입춘을 넘어 한 해를 시작하는 설날로 가고 있다. 자연의 운항에 맞아떨어지는 이 신춘절기에 새해 들며 작심삼일에 쫒기고 다친 우리네 마음도 넉넉하게 어루만지고 위무해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