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29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김기택 텔레비전을 끄자 풀벌레 소리 어둠과 함께 방 안 가득 들어온다 어둠 속에 들으니 벌레 소리들 환하다 별빛이 묻어 더 낭랑하다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그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한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들을 생각한다 발뒤꿈치처럼 두꺼운 내 귀에 부딪쳤다가 되돌아간 소리들을 생각한다 브라운관이 뿜어낸 현란한 빛이 내 눈과 귀를 두껍게 채우는 동안 그 울음소리들은 수없이 나에게 왔다가 너무 단단한 벽에 놀라 되돌아갔을 것이다 하루살이들처럼 전등에 부딪쳤다가 바닥에 새카맣게 떨어졌을 것이다 크게 밤공기를 들이쉬니 허파 속으로 그 소리들이 들어온다 허파도 별빛이 묻어 조금은 환해진다 ................................................................................................................................................. 풀벌레들의 절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28 흑판 3 정재학 판서를 할 때 가끔 칠판에 비친 아이들의 얼굴에 씌어진 글자들이 보일 때가 있다. ―우리는 나쁜 친구를 사귀지 말라는 교육만 받았지. 그 친구를 올바르게 이끌어주라는 교육은 받지 못했다. 돌아보면, 아이들의 얼굴이 쓱싹쓱싹 지워지고 있다. ................................................................................................................................................. 시인의 ‘흑판’ 연작시 중 하나입니다. 그가 현직 교사라는 사실이 시를 이해하는데, 일정한 도움을 주겠지요. 시적 주체는 말합니다. “판서를 할 때 가끔 칠판에 비친 아이들의 얼굴에/씌어진 글자들이 보일 때가 있다”고 말이지요. 도처에서 들려오는 문제들의 원인이 다음 문장에 담겨있습니다. “우리는 나쁜 친구를 사귀지 말라는 교육만 받았지./그 친구를 올바르게 이끌어주라는 교육은 받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한 사회의 표정이 일그러질 때마다,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게 됩니다. 넬슨 만델라는 “교육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가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27 옥수수 수프를 먹는 아침 이제니 옥수수 수프를 먹는 아침 탁자가 필요하고 이왕이면 둥글고 따뜻한 탁자가 필요하고 의자가 필요하고 이왕이면 둥글고 따뜻한 의자가 필요하고 그릇이 필요하고 이왕이면 둥글고 따뜻한 그릇이 필요하고 누군가가 필요하고 이왕이면 둥글고 따뜻한 누군가가 필요하고 옥수수 알갱이는 노란색 알갱이 알갱이 알갱이 수프 속에 둥둥둥 떠 있고 알갱이마다 생각나는 얼굴 몇 개 죽었고 사라졌고 지워졌고 이제는 없으니까 알갱이를 먹는 겁니다 둥글고 따뜻한 알갱이를 먹는 겁니다 (…) 알갱이 알갱이 당신이 알갱이를 볼 수 있는 건 알갱이를 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알갱이 알갱이 알갱이 옥수수 알갱이는 노란색 둥글고 따뜻한 알갱이 알갱이 알갱이 어쩌면 언제든 볼 수 있다고 믿고 싶은 조금은 그리운 알갱이 알갱이 알갱이 ................................................................................................................................................. 입추, 가을에 들다. 우리 따뜻한 수프 한 그릇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26 병원(病院) 윤동주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 ‘시의 윤리’에 관한 이야기. 시인이 연희전문학교 졸업 기념으로 자필시집을 제작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요. 절친했던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25 내 마음속 당나귀 한 마리 이홍섭 내 마음속에는 언제부터인가 당나귀 한 마리 살고 있다 귀가 몹시 커다랗고 고개를 잘 숙이는 당나귀 그 당나귀가 잘 우는 당나귀인지, 잘 안 우는 당나귀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오랜 친구를 찾아가거나 힘없이 느린 걸음으로 이 도시의 외곽을 배회할 때 어느덧 내 마음 속에 들어와 커다란 눈망울을 굴리는 당나귀 한 마리 나는 이 당나귀가 좋아 풀만 먹고 하루를 보낼 때가 많다 ................................................................................................................................................. 마음속 존재의 이야기. 시적 주체는 고백합니다. “내 마음속에는/언제부터인가 당나귀 한 마리 살고 있다”고 말이지요. 커다란 귀를 늘어뜨리고, 무슨 일인지 자주 고개를 숙이는 당나귀. 고백이 이어집니다. “그 당나귀가/잘 우는 당나귀인지, 잘 안 우는 당나귀인지/나는 모른다”고 하네요. 그러다가 마음속 그 존재가 또렷해지는 순간이 있답니다. “오랜 친구를 찾아가거나/힘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24 좋은 일들 심보선 오늘 내가 한 일 중 좋은 일 하나는 매미 한 마리가 땅바닥에 배를 뒤집은 채 느리게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준 일 죽은 매미를 손에 쥐고 나무에 기대 맴맴 울며 잠깐 그것의 후생이 되어준 일 눈물을 흘리고 싶었지만 눈물이 흐르진 않았다 그것 또한 좋은 일 중의 하나 태양으로부터 드리워진 부드러운 빛의 붓질이 내 눈동자를 어루만질 때 외곽에 펼쳐진 해안의 윤곽이 또렷해진다 그때 나는 좋았던 일들만을 짐짓 기억하며 두터운 밤공기와 단단한 대지의 틈새로 해진 구두코를 슬쩍 들이미는 것이다 오늘의 좋은 일들에 비추어볼 때 어쩌면 나는 생각보다 조금 위대한 사람 나의 심장이 구석구석의 실정맥 속으로 갸륵한 용기들을 알알이 흘려보내는 것 같은 착란 그러나 이 지상에 명료한 그림자는 없으니 나는 이제 나를 고백하는 일에 보다 절제하련다 발아래서 퀼트처럼 알록달록 조각조각 교차하며 이어지는 상념의 나날들 언제나 인생은 설명할 수 없는 일들투성이 언젠가 운명이 흰수염고래처럼 흘러오겠지 ...............................................................................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23 얼음수도원 1 - 피정(避靜) 일기 고진하 지난밤 꿈에 남극에 있는 한 수도원을 보았다. 얼음벽돌로 세워진 얼음수도원. 흰곰의 가죽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수도사들은, 얼음십자가상과 얼음성모상 앞에서 성체 조배를 바치고 찬미가를 불렀다. 하얀 콧김과 하얀 입김이 날리며 수도사들의 긴 머리칼과 눈썹과 수염에 고드름이 맺히게 했다. 저녁미사 시간, 수도사들이 바치는 비나리의 뜨거운 숨결이 피어오르더니, 순식간에 얼음집을 다 녹였다. 얼음수도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수도사들도 사라졌다. 잠을 깨고 난 뒤, 온종일 사라져버린 얼음수도원을 묵상했다. 무념무상의 설원(雪原)에 들 수 있었다. ................................................................................................................................................. 연일 폭염주의보. 고단했을 당신과 얼음수도원으로 떠나봅니다. 시인은 “지난밤 꿈에” 본 “남극에 있는 한 수도원”으로 우리를 인도하는데요. “흰곰의 가죽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수도사들”은 아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22 시소의 고도(高度) 최서진 한 쪽이 높아지고 한 쪽이 기울어지는 놀이 소화되지 않은 높이가 허공에 걸렸다 결의하듯이 우리가 올라 갈 수 있는 빨간 지붕은 몽상이라는 말 슬픔의 나라로 신발을 벗고 떠나는 유령들처럼 인간은 높이를 갖게 되기까지 두발이 바닥을 모를 때까지 다리를 길게 뻗으며 환상이 깊어진다 종일 걸어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아름다운 놀이터 우리는 자주 어지럽다 오늘 밤 기다림에 목매다는 당신들을 초대 할래요 죽도록 나를 회복하기 아무것에도 그리고 누구에게도 노예 되지 않기 하염없이 스프링처럼 높이를 좋아해 -------------------------------------------------------------------- 시소, 높낮이에 대한 감각을 익히는 놀이. 우리는 도처에서 “한 쪽이 높아지고 한 쪽이 기울어지는 놀이”를 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A에게는 흥미롭고, B에게는 슬픈 놀이가 되겠지요. 국가와 국민, 그들과 이들, 너와 나, 나와 나라는 관계. 문제는 모두 다 “결의하듯이” 임하는 이상한 놀이라는 사실이지요. 시인이 짐작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올라 갈 수 있는 빨간 지붕”이, “몽상이라는 말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21 고백 함민복 여름 장날에 빈혈로 쓰러져 남도 땅 친구 방에서 병원 다닐 때 닭 한 마리 사다가 잔털 뽑으며 물로 씻다가 살을 만지고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어 죽은 닭의 살이지만 살을 만지고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어 내가 만져 본 살도 나를 만져 준 살도 까마득 오래 되어 죄스럽게 죄스럽게 배 눌러보는 여의사 님의 손끝을 아픈 배로 숨으로 그윽이 만져 보았습니다 .................................................................................................................................... 어떤 고통의 울부짖음도 한 사람의 울부짖음보다 더 클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어떤 울부짖음도 차마 하지 못한 고백만큼 강렬하지는 않지요. 여기 한 사람의 고백이 조용조용 울리고 있습니다. 그가 “여름 장날에 빈혈로 쓰러져/남도 땅 친구 방에서 병원 다닐 때”의 일이지요. 몸을 혹은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 “닭 한 마리 사다가/잔털 뽑으며/물로 씻다가” 떠오른 생각들이 펼쳐집니다. “죽은 닭의 살이지만/살을 만지고 있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20 혜화역 4번 출구 이상국 딸애는 침대에서 자고 나는 바닥에서 잔다 그 애는 몸을 바꾸자고 하지만 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 그냥 고향 여름 밤나무 그늘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바닥이 편하다 그럴 때 나는 아직 대지의 소작이다 내 조상은 수백 년이나 소를 길렀는데 그 애는 재벌이 운영하는 대학에서 한국의 대 유럽 경제정책을 공부하거나 일하는 것 보다는 부리는 걸 배운다 그 애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우는 저를 업고 별하늘 아래 불러준 노래나 내가 심은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알겠는가 그래도 어떤 날은 서울에 눈이 온다고 문자 메시지가 온다 그러면 그거 다 애비가 만들어 보낸 거니 그리 알라고 한다 모든 아버지는 촌스럽다 나는 그전에 서울 가면 인사동 여관에서 잤다 그러나 지금은 딸애의 원룸에 가 잔다 물론 거저는 아니다 자발적으로 아침에 숙박비 얼마를 낸다 그것은 나의 마지막 농사다 그리고 헤어지는 혜화역 4번 출구 앞에서 그 애는 나를 안아준다 아빠 잘 가 ----------------------------------------------------------------------------- ‘과거’라고 할 수 없는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19 가두의 시 송경동 길거리 구둣방 손님 없는 틈에 무뎌진 손톱을 가죽 자르는 쪽가위로 자르고 있는 사내의 뭉툭한 손을 훔쳐본다 그의 손톱 밑에 검은 시(詩)가 있다 종로 5가 봉제골목 헤매다 방 한 칸이 부업방이고 집이고 놀이터인 미싱사 가족의 저녁식사를 넘겨본다 다락에서 내려온 아이가 베어 먹는 노란 단무지 조각에 짜디짠 눈물의 시가 있다 해질녘 영등포역 앞 무슨 판촉행사 줄인가 싶어 기웃거린 텐트 안 시루 속 콩나물처럼 선 채로 국밥 한 그릇 뚝딱 말아먹는 노숙인들 긴 행렬 속에 끝내 내가 서보지 못한 직립의 시가 있다 고등어 있어요 싼 고등어 있어요 저물녘 “떨이 떨이”를 외치는 재래시장 골목 간절한 외침 속에 내가 아직 질러보지 못한 절규의 시가 있다 그 길바닥의 시들이 사랑이다 .................................................................................................................................... 시인에게 ‘거리’는 어떤 공간일까요. 그곳에 머무는 ‘사람들’에 관한 물음이 맞겠습니다. 이 시에 ‘거리의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18 고통을 달래는 순서 김경미 토란잎과 연잎은 종이 한창 차이다 토련(土蓮)이라고도 한다 큰 도화지에 갈매기와 기러기를 그린다 역시 거기서 거기다 누워서 구름의 면전에 유리창을 대고 침을 뱉어도 보고 침으로 닦아도 본다 약국과 제과점 가서 포도잼과 붉은 요오드딩크를 사다가 반씩 섞어 목이나 겨드랑이에 바른다 저녁 해 회색삭발 시작할 때 함께 머리카락에 가위를 대거나 한 송이 꽃을 꽂는다 미친 쑥부쟁이나 엉겅퀴 가로등 스위치를 찾아 죄다 한줌씩 불빛 낮춰버린다 바다에서 가서 강 얘기 하고 강에 가서 기차 얘기 한다 뒤져보면 모래 끼얹은 날 더 많았다 순서란 없다 견딘다 --------------------------------------------------------------------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고통을 달래는 순서에 관한 시 입니다. 저만치 토란잎과 연잎을 구별할 수 있나요. 어쩌면 모든 게 종이 한창 차이인 줄도 모르겠습니다. 무심코 그려놓은 갈매기와 기러기 역시 거기서 거기인 것도 같군요. 당신은 구름의 면전을 살피다가, 포도잼과 붉은 요오드딩크를 사다가 반씩 섞어 목이나 겨드랑이에 바르기도 합니다.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