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54 풍선 김사인 한번은 터지는 것 터져 넝마 조각이 되는 것 우연한 손톱 우연한 처마 끝 우연한 나뭇가지 조금 이르거나 늦을 뿐 모퉁이는 어디에나 있으므로. 많이 불릴수록 몸은 침에 삭지 무거워지지. 조금 질긴 것도 있지만 큰 의미는 없다네. 모퉁이를 피해도 소용없네. 이번엔 조금씩 바람이 새나가지. 어린 풍선들은 모른다 한번 불리기 시작하면 그만둘 수 없다는 걸 뽐내고 싶어지지 더 더 더 더 커지고 싶지. 아차, 한순간 사라지네 허깨비처럼 누더기 살점만 길바닥에 흩어진다네. 어쩔 수 없네 아아, 불리지 않으면 풍선이 아닌 걸. -------------------------------------------------------------------- 봄인 듯 연두인 듯 불러보는 당신입니다. 오늘은 ‘풍선’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싶어요. 시인이 들려주고 있는 것처럼, 모든 풍선은 우연한 이유로 꼭 한 번은 터지게 됩니다. 그 순간이 저마다의 삶의 리듬처럼 “조금 이르거나 늦을 뿐”이지요. 돌고 돌아도 마주치게 되는 모퉁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하면 어른들이 아무리 알뜰하게 타일러도, “어린 풍성들은 모”릅니다. 아니 알아도 자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53 나비를 읽는 법 박지웅 나비는 꽃이 쓴 글씨 꽃이 꽃에게 보내는 쪽지 나풀나풀 떨어지는 듯 떠오르는 아슬한 탈선의 필적 저 활자는 단 한 줄인데 나는 번번이 놓쳐버려 처음부터 읽고 다시 읽고 나비를 정독하다, 문득 문법 밖에서 율동하는 필체 나비는 아름다운 비문임을 깨닫는다 울퉁불퉁하게 때로는 결 없이 다듬다가 공중에서 지워지는 글씨 나비를 천천히 펴서 읽고 접을 때 수줍게 돋는 푸른 동사들 나비는 꽃이 읽는 글씨 육필의 경치를 기웃거릴 때 바람이 훔쳐가는 글씨 ----------------------------------------------------------------------------- 이 봄, 나비와 꽃 가까이에 머물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시인이 시를 쓰듯, 꽃은 ‘나비’라는 활자를 통해 어떤 전언을 보내고 싶은 걸까요. 구구절절이 아니라, “저 활자는 단 한 줄”이랍니다. 그러니 “번번이 놓쳐버려/ 처음부터 읽고 다시 읽고/ 나비를 정독하”는 일이 무리는 아니겠지요. 정독의 정독을 거듭하다 깨닫습니다. “문득/ 문법 밖에서 율동하는 필체” 즉 “나비는 아름다운 비문임을” 말이지요. 어쩌면 세상 모든 편지는 비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52 콜! 김민정 예컨대 미용실 옆자리에 앉은 여대생이 가수 현미처럼 파마해주세요라고 주문할 때 예컨대 택시를 타고 남가좌동 명지대를 가는데 서울31바9896 남진우 기사 이름이 하필 그럴 때 예컨대 베이징 올림픽 남자 핸드볼 경기에서 해설자가 조지효 선수 참 좋지요라고 말장난을 칠 때 예컨대 쿠싱증후군에 걸린 둘째 이모 양미미 씨가 아침에 짠 스웨터를 밤에 죄다 풀며 죽어갈 때 -------------------------------------------------------------------- 세상은 수많은 ‘예’들로 가득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컨대’라는 말을 쓰게 되는데요. 만약 “미용실 옆자리에 앉은/여대생이/가수 현미처럼 파마해주세요라고 주문할 때” 우리는 의아해 하겠지요. 그런가하면 “서울31바9896 남진우 기사 이름이 하필 그럴 때”도 있답니다. 남진우 시인은 명지대 교수. 우연인 듯 우연 아닌 우연 같은 ‘예’라고 할 수 있지요. 텔레비전을 보다 미소 짓기도 합니다. “해설자가/조지효 선수 참 좋지요라고 말장난을 칠 때” 우리는 압니다. 한 마디의 말이 삶의 태도를 보여준다는 걸. 여기까지의 ‘예’가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51 꽃처럼 무거운 마음 ㅡ2014년 봄 김중일 꿈속에서 밝혀놓은 촛불이 다 타 버리자 해가 떴다 기도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떨어진 달처럼 무거운 마음 내가 한 번도 가진 적 없는 마음이 내 정수리 위에 비행접시처럼 떠 있다 그 그림자는 잠시 지구를 덮고 내 정수리 속으로 서서히 내려앉는다, 가라앉는다 나의 뇌수를 고요히 헤집자 온갖 기억이 새떼처럼 날아오른다 나의 코끝을 스치자 물양동이 같은 내 얼굴 속에 그득했던 눈물이 출렁이며 넘친다 내 목구멍을 꺽꺽 긁으며 내려가다가 멀미처럼 울컥 솟구치는 마음 다시 내 기도를 막으며 가라앉는 마음 지구 반대편 하늘까지 뻥 뚫린 우물 속에 물양동이처럼 던져진 마음 내 무릎을 꺾고 내 발등을 찧는 돌처럼 무거운 마음 주룩주룩 내리는 비에 연루됐을 때 온몸이 다 녹아 줄줄 흘러내리고 있을 때 깊은 밤이 뻗은 힘센 팔이 나를 포옹하듯 꿈속으로 잠깐 끌어당기고, 꿈속에서야 나는 겨우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고 꿈밖에선 어떤 말도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이 눈코입귀 흔들리는 꽃잎처럼 떨어지는 마음 꽃잎 없는 꽃처럼 무거운 마음 마음이 걷다가 빠진다는 구름의 크레바스 틈새로 후드득 꽃잎처럼 빨려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50 흰색과 분홍의 차이 송재학 겨울 노루귀 안에 몇 개의 방이 준비되어 있음을 아는지 흰색은 햇빛을 따라간 질서이지만 그 무채색마저 분홍과의 망설임에 속한다 분홍은 흰색을 벗어나려는 격렬함이다 노루귀는 흰 꽃잎에 무거운 추를 달았던 것, 분홍이 아니라도 무엇인가 노루귀를 건드렸다면 노루귀는 몇 세대를 거듭해서 다른 꽃을 피웠을 것이다 더욱이 분홍이라니! 분홍은 병(病)의 깊이, 분홍은 육체가 생기기 시작한 겨울숲이 울고 있는 흔적, 분홍은 또다른 감각에 도달하고픈 노루귀의 비밀이다. ................................................................................................................................................. 노루귀, 꽃이 핀 후에 잎이 나오는데, 그 모습이 노루의 귀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꽃말은 믿음. 시인은 노루귀를 통해 흰색과 분홍에 대한 믿음을 전하고 있어요. 시인의 산문「사물은 보여 지거나 만져지거나 냄새를 통해 나와 비슷해진다」에서 발견한 문장들 입니다. “내가 노루귀란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49 겨울 편지 안도현 댓잎 위에 눈 쌓이는 동안 나는 술만 마셨다 눈발이 대숲을 오랏줄로 묶는 줄도 모르고 술만 마셨다 거긴 지금도 눈 오니? 여긴 가까스로 그쳤다 저 구이(九耳) 들판이 뼛속까지 다 들여다보인다 청둥오리는 청둥오리 발자국을 찍으려고 왁자하게 내려앉고, 족제비는 족제비 발자국을 찍으려고 논둑 밑에서 까맣게 눈을 뜨고, 바람은 바람의 발자국을 찍으러 왔다가 저 저수지를 건너갔을 것이다 ................................................................................................................................................. 시인으로부터 겨울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펼쳐보니 푸른 댓잎과 흰 눈의 풍경이 그려져 있네요. 펑펑 눈 내리는 사이 ‘나’는 무엇을 했을까요. 술을 마셨답니다. “눈발이 대숲을 오랏줄로 묶는 줄도 모르고” 말이지요. 담백하기 그지없는 질문이 이어집니다. “거긴 지금도 눈 오니?/여긴 가까스로 그쳤다”. 거기와 여기라는 말 사이에는 허공만이 자리하겠지요. 그 허공이 겨울 편지의 지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48 외계(外界) 김경주 양팔이 없이 태어난 그는 바람만을 그리는 화가(畵家)였다 입에 붓을 물고 아무도 모르는 바람들을 그는 종이에 그려 넣었다 사람들은 그가 그린 그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붓은 아이의 부드러운 숨소리를 내며 아주 먼 곳까지 흘러갔다 오곤 했다 그림이 되지 않으면 절벽으로 기어올라 가 그는 몇 달씩 입을 벌렸다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색(色) 하나를 찾기 위해 눈 속 깊은 곳으로 어두운 화산을 내려보내곤 하였다 그는, 자궁 안에 두고 온 자신의 두 손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 화가가 있습니다. “양팔이 없이 태어난 그”의 이야기인데요. “바람만을 그리는” 예술가의 고뇌를 쉽게 짐작할 수 없겠지요. “입에 붓을 물고 아무도 모르는 바람들을/그는 종이에 그려 넣었”답니다. 숨겨놓은 마음들을 허공에 그려 넣듯. 당연하게도 “사람들은 그가 그린 그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47 토요일 오후 오탁번 토요일 오후 학교에서 돌아온 딸과 함께 베란다의 행운목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일 세상사람 저마다 눈을 뜨고 아주 바쁘고 부산스럽게 몸치장 예쁘게 하네 하루일 하루공부 다 끝내고 중고생 관람가 못된 장면은 가위질한 그저 알맞게 재미난 영화 팝콘이나 먹으며 구경하러 가는 것일까 한주일의 일과 추억을 파라솔 접듯 조그맣게 접어서 가볍게 들고 한강 시민 공원으로 나가는 것일까 매일 물을 뿌려 주어야 싱싱한 잎을 자랑하는 베란다의 행운목이 펼쳐 주는 손바닥만큼씩한 행복 토요일 오후의 우리 집은 온통 행복뿐이네 세 살 난 여름에 나와 함께 목욕하면서 딸은 이게 구슬이나? 내 불알을 만지작거리며 물장난하고 아니 구슬이 아니고 불알이다 나는 세상을 똑바로 가르쳤는데 구멍가게에 가서 진짜 구슬을 보고는 아빠 이게 불알이나? 하고 물었을 때 세상은 모두 바쁘게 돌아가고 슬픈 일도 많았지만 나와 딸아이 앞에는 언제나 무진장의 토요일 오후 모두다 예쁘게 몸치장을 하면서 춤추고 있었네 구슬이나? 불알이나? 딸의 어릴 적 질문법에 대하여 아빠가 시를 하나 써야겠다니까 여중 2학년은 아니 아니 아빠 저를 망신시킬 작정이세요? 문법도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46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박준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 여기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시인이 있습니다. 떠올려보면 어릴 적 우리는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지요. 하지만 철봉 오래 매달리기는 더 이상 자랑이 아닙니다. 또한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44 이과두주 유홍준 희뿌연 산 언덕에는 흰 눈이 내리고요 얼어 죽을까봐 얼어 죽을까봐 나무들은 서로를 끌어안고요 동치미 국물 동치미 국물을 마시며 슬픈 이과두주 마시는 밤 또 무슨 헛것을 보았는지 저 새카만 개새끼는 짖구요 저 하얀 들판에는 검은 새들이 내리고요 저 하얀 들판에는 검은 새들이 내리고요 짬뽕국물도 없이 시뻘건 후회도 없이 내리는 눈발 사이로 흘러가는 푸른 달 틈으로 적막하고 나하고 마주 앉아 이과두주 마시는 밤 이 조그만 것에 독한 것을 담아 마시는 밤 이 조그만 것에도 독한 것이 담기는 밤 ................................................................................................................................................. 오늘은 이과두주(二鍋頭酒) 이야기. 두 번 솥에서 걸렀다고 해서 이름 지어졌답니다. 투명한 증류주, 겨울밤과 잘 어울리는 술. 증류된 슬픔도 같은 빛이겠지요. 눈까지 내린다면, 세상이 일순 환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만치 서로를 끌어안은 나무들. 그 풍경을 바라보는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43 첫새벽 한강 첫새벽에 바친다 내 정갈한 절망을, 방금 입술 연 읊조림을 감은 머리칼 정수리까지 얼음 번지는 영하의 바람, 바람에 바친다 내 맑게 씻은 귀와 코와 혀를 어둠들 술렁이며 포도(鋪道)를 덮친다 한 번도 이 도시를 떠나지 못한 텃새들 여태 제 가슴털에 부리를 묻었을 때 밟는다, 가파른 골목 바람 안고 걸으면 일제히 외등이 꺼지는 시간 살얼음이 가장 단단한 시간 박명(薄明) 비껴 내리는 곳마다 빛나려 애쓰는 조각, 조각들 아아 첫새벽, 밤새 씻기워 이제야 얼어붙은 늘 거기 눈뜬 슬픔, 슬픔에 바친다 내 생생한 혈관을, 고동소리를 ................................................................................................................................................. 새해, 아껴두었던 ‘첫 새벽’을 그대에게 선물하고 싶습니다. 언젠가 “정갈한 절망”으로 귀결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절망은 “맑게 씻은 귀와 코와 혀”의 전언일 거라 믿고 있습니다. 간절해서 간절한 질문, “제 가슴털에 부리를 묻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42 제주도 허만하 멀리 짐승 발자국 하나 없는 흰 설원 한가운데서 정면으로 목쉰 바람소리 향하여 서 있는 한 그루 나목의 꿈 안에 5월의 숲 연두색 반짝임이 있듯, 빛나는 은백색 갈치 길이 끝에 너울지는 검푸른 겨울 바다가 있다. ................................................................................................................................................. 그대에게, 세상의 모든 겨울 바다를 선물합니다. 나목 한 그루가 설원을 마주하고 서 있네요. 짐승의 발자국도 다녀가지 않은 설원을 말이지요. 약속처럼 바람이 불어오는데, 과연 정면으로 목이 쉰다는 건 얼마만큼의 울음을 담보로 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한 그루 나목이 홀로 우뚝합니다. 꿈이라는 단어와 결을 함께 하는 연두색은 언제나 눈부시지요. 돌돌, 수액으로 돌고 있을 연두색. 그 색에서 피어오르는 건 식물의 살냄새가 알맞겠지요. 잠시 살펴보면, 허만하 시인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나는 논리의 뼈대로만 이루어지는 연설과 모놀로그의 허황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