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규 시인의 시로쓰는편지 113 꿈 신용목 잤던 잠을 또 잤다. 모래처럼 하얗게 쏟아지는 잠이었다. 누구의 이름이든 부르면, 그가 나타날 것 같은 모래밭이었다. 잠은 어떻게 나의 바닥을 다 메우도록 그 많은 모래를 옮겨왔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멀리서 모래를 털며 걸어오는 사람들을 보았다. 모래로 부서지는 이름들을 보았다. 가까워지면,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해변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잤던 잠을 또 잤다. 꿨던 꿈을 또 꿨다. 나는 언제부터 파도 소리를 듣고 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그리고 언제까지……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지 않아도 나는 돌아보았다. ----------------------------------------------------------------------------- 침묵의 가을. 어쩌면 삶은 잤던 잠을 또 자고, 꿨던 꿈을 또 꾸는 나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처음인 것처럼 깊은 잠에 빠지고 새로운 꿈을 꾸게 되지요. 기억을 기억하며 혹은 기억을 기억하지 않으며 말이지요. 시인의 산문집 『우리는 이렇게 살겠지』에는 다음과 같
이은규의시로 쓰는 편지 지상의 시 김현승 보다 아름다운 눈을 위하여 보다 아름다운 눈물을 위하여 나의 마음은 지금, 상실의 마지막 잔이라면, 시는 거기 반쯤 담긴 가을의 향기와 같은 술……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사라지는 것만이, 남을 만한 진리(眞理)임을 위하여 나의 마음은 지금 저무는 일곱시라면, 시는 그곳에 멀리 비추이는 입다문 창(窓)들…… 나의 마음은—마음바다 로맨스 그레이로 두른 먼 들일 때, 당신의 영혼을 호올로 북방(北方)으로 달고 가는 시의 검은 기적— 천사들에 가벼운 나래를 주신 그 은혜로 내게는 자욱이 퍼지는 언어의 무게를 주시어, 때때로 나의 슬픔을 위로하여 주시는 오오, 지상의 신이여, 지상의 시여! -------------------------------------------------------------------- 시가 익어가는 계절, 가을. 시적 주체가 소망하는 것은 ‘보다 아름다운 눈’이나 ‘보다 아름다운 눈물’로 표상됩니다. 물론 여기서의 ‘아름다움’은 유미주의적이고 자족적인 심미성(審美性) 그 자체만은 아니겠지요. 그것은 경지로서의 ‘아름다움’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삶은 ‘채우기 위해 비우는’
이은규 시인의시로 쓰는 편지 백석역 최서진 도시를 지나 대곡역과 마두역 사이 지혜가 없어져서 날은 저무는데 눈은 오지 않고 도깨비의 얼굴을 닮은 바람이 분다 사람들은 팔짱을 낀 채 바쁘게 지나가고 절벽의 표정으로 이야기하던 연인들은 손을 놓고 사라진다 나는 홀로 눈물이 나 기다려도 오지 않을 당신 때문에 울컥 목이 메인다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줍지 않는다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나타샤가 오지 않아도 괜찮지만 자꾸만 계단 쪽으로 눈이 간다 계단은 홀로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다 저녁이면 무엇이 백석으로 오게 하는가 백석을 지나 대화로 가는 지하철을 길게 바라본다 지하철이 지나가고 지하철이 또 지나간다 기다림이 지나간다 기다린다는 것은 춥고 배고프고 외로운 일 충분히 좋은 일 분별을 잃은 눈으로 조용한 역사에 서 있다 손을 녹이려고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서 마신다 입가에 고인 검은 기억이 속으로 들어가자 서러워진다 두 손으로 컵을 감싸 안고 앉아서 천천히 마신다 도무지 기다림을 참을 수가 없지만 이런 것은 흔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얼어붙은 자세로 기다림을 기다린다 누군가 시간의 반대편에서 아무로 모르게 달려오고 있으니 나는 외로워할 까
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111 산다 다니카와 슌타로 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지금 멀리서 개가 짖는다는 것 지금 지구가 돌고 있다는 것 지금 어디선가 태아의 첫울음이 울린다는 것 지금 어디선가 병사가 다친다는 것 지금 그네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 지금 이 순간이 흘러가는 것 -------------------------------------------------------------------- 오늘의 시인, 일본의 다니카와 슌타로(谷川俊太郞). 일상의 기적에 대해 노래하는 시인입니다. 그는 1950년 데뷔한 이후 최근까지 80여 종의 시집과 시선집을 출간했다고 합니다. 일상이 모여 일생이 되는 것. 온 시간을 다해 문학에 매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시인은 ‘살아 있다는 것’은 ‘지금 살아 있다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이 흘러가는 것’이라는 구절에서 별똥별의 흐름을 연상할 수도 있겠지요. 우연적 필연이거나 필연적 우연인 삶. 시인은 산문 「시인과 우주(cosmos)」에서 ‘한 편의 시’가 ‘쓰고 싶다’에서 출발해서, ‘쓰지 않으면 안 된다’를 통해 완성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살고 싶다’에서
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110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박준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는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야 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 모든 절기가 그러하겠지만, 그 어느 절기보다 ‘마음’이라는 단어를 자주 떠올리게 됩니다. 바람결이 서늘해지고 우리의 내면도 깊어져만 가지요. 시인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에 대해 적고 있지요. 그는 등단 당시 한 인터뷰에서 촌스럽더라도 작고 소외된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습니
꽃잎 차성환 꽃잎을 뜯으면서 나는 비늘이 돋고 꽃잎을 뜯으면서 비린내 나는 꽃잎의 살점을 삼키고 꽃잎은 입 속의 혀처럼 내 안에 피고 지고 나는 꽃잎 속에 있고 꽃잎은 낯설게 꽃잎의 이름으로 불러줄 것처럼 가만히 꽃이 잎으로 달려가 꽃잎이 되고 꽃잎을 뜯으며 꽃잎은 사라지고 나는 꽃잎이 자라는 방식으로 슬퍼지고 바닥에 주저앉아 쓰러진 꽃잎의 자리를 외우는데 이제 아무도 꽃잎이 자라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꽃잎은 여기 서서 꽃잎은 내 몸속의 꽃잎은 숨을 가두고 나는 강물처럼 꽃잎을 삼키고 꽃잎은 가만히 나를 뜯어 꽃잎이 지는 하늘에 꽃잎은 꽃잎으로 꿈꾸는 방법을 누군가에게 배우고 꽃잎이 꽃잎으로만 남을 수 있게 나는 지는 꽃잎을 불러 모아 여기 소름 돋은 꽃잎을 입술에 피워 무는 꽃잎, 꽃잎 -------------------------------------------------------------------- 환절기, 가고 있는 절기와 오고 있는 절기의 동시적 시간. 백일 동안 붉다는 꽃나무도 이제는 뒷모습을 보이고 있네요. 얼마나 애틋한 마음이기에 백일 동안 붉을 수 있을까요. 백일홍의 꽃말은 ‘인연’. 어쩌면 세상의 모든 꽃은 같은 말을 전하고
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108 나무와 까치 이상호 높은 나뭇가지에 세 들어 사는 새 세도 안 내고 집짓고 새끼 기르며 살기가 영 민망한지 나갔다 들어올 때마다 까치발로 조심조심 걸어드는 새 그 마음을 아는지 나뭇가지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그걸 쭉 지켜보는 하느님도 말없이 따뜻한 어둠을 펴서 함께 덮어준다 -------------------------------------------------------------------- 한국 시사의 도저한 흐름 속에서, 이상호 시인은 서정의 문법을 내면화하고 이를 창조적으로 변용시킨 우리 시대의 뛰어난 서정 시인이다. 그의 여덟 번째 시집 『마른 장마』(시로여는세상, 2016)에 담긴 시인의 말을 통해 우리는 시인의 시적 지향점을 만나볼 수 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시가 마음에 차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조금씩 길어진다. 마음이 더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시심의 물줄기가 점점 가늘어지는 탓이리라. 두렵다. 발길 드문 산속 조그만 옹달샘 같은 이마저 고갈될까 문득문득 하늘을 바라본다.” 무엇보다 우리의 눈길이 머무는 지점은 ‘시가 마음에 차기를 기다리는 시간’일 것이다. 오늘의 시편을 만나보자. 시
평형수를 충만할 때 이원오 배가 기울어졌다 모든 기울기는 결핍을 수반한다 결핍은 모자람이 아니며 과잉의 동의어이다 배의 기울기에는 숨겨놓은 탐욕의 과잉이 있었다 지켜야 할 도리에 대한 실종이 있었고 비겁한 잉여의 민낯이 있었다 짠물에 민물을 일치시키던 수평 거친 파도를 이기는 힘이었고 결별을 허락하지 않은 마지노선이었다 힘은 무릇 수평에서 왔으나 견고한 욕심의 무게는 수평을 짓눌렀다 모두 기울기를 저울질하고만 있었으니 고박하지 않은 양심도 풀어져 버렸다 그날 서해바다에서 찔끔찔끔 흘려버린 물의 기울기는 거친 맹골수도에서 가팔라졌다 잃어버린 눈물의 평형수만큼 피눈물로 꼭꼭 채워넣어야 했다 지금, 당신의 평형수를 충만해야 할 시간이다 -------------------------------------------------------------------- 아득해질 만큼의 더위, 무탈하신지요. 오늘의 시인에게서 삶의 ‘평형’에 대해 한 수 청하고자 합니다. 전제는 그러합니다. 모든 기울기에는 결핍이 수반되어 있지요. 아름다운 ‘편애’조차도 이미 한 편으로 치우쳐 있는 것처럼.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균형’에 대한 의식이며 감각일지도 모릅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106 내 인생의 책 이장욱 그것은 내 인생이 적혀 있는 책이었다. 어디서 구입했는지 누가 선물했는지 꿈속의 우체통에서 꺼냈는지 나는 내일의 내가 이미 씌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따라 살아갔다. 일을 했다. 드디어 외로워져서 밤마다 색인을 했다. 모든 명사들을 동사들을 부사들을 차례로 건너가서 늙어버린 당신을 만나고 오래되고 난해한 문장에 대해 긴 이야기를 우리가 이것들을 해독하지 못하는 이유는 영영 눈이 내리고 있기 때문 너무 많은 글자가 허공에 겹쳐 있기 때문 (…) 제목이 없고 결론은 사라진 나는 혼자 서가에 꽂혀 있었다. 누가 골목에 내놓았는지 꿈속의 우체통에 버렸는지 눈송이 하나가 내리다가 멈춘 딱 한 문장에서 -------------------------------------------------------------------- 염천을 능멸하며 피는 능소화도 이제는 피고지고, 그래도 생은 계속됩니다. 시인은 ‘인생의 책’에 대해 말하고 있네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철학적 명제. 그러나 문학적 명제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해야 한다’고 속삭입니다. 과연 ‘인생의 책’에
통영 ― 책 이은봉 무엇인들 책이 아니랴 오랜만에 들린 통영에서도 보고 배울 책은 많았다 구중서 선생님과 통영에 놀러가서는 먼저 박구경 시인이 소개한 ‘호두나무실비집’이라는 책부터 읽었다 정가 2만 5천 원인 이 책의 주요 내용은 맛있는 음식을 과식하지 않고 먹는 법이었다 빠른 리듬에 쫓기다 보니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한참 지난 뒤에야 겨우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식욕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일까 배가 불러 힘들어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김덕우 시인이 소개한 또 한 권의 책을 읽게 되었다 ‘한산 호텔 부속 횟집’이라는 책이 그것이었다 이 책에는 첫 페이지부터 과식은 당뇨병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씌어 있었다 책의 내용은 어렵지 않았지만 책의 내용대로 살기는 어려웠다 책을 읽고 있으면서도 책의 내용을 지키지 못한 셈이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달라 통영에서도 내내 괴로웠다 끝내는 배탈이 나서 설사를 하고 말았다 책을 읽고 있으면서도 책의 내용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내 오랜 병통, 통영에서는 이제 더 이상 책을 읽지 않기로 했다. -------------------------------------------------------------------- 오늘의
토란잎 송찬호 나는, 또르르르……물방울이 굴러가 모이는 토란잎 한가운데, 물방울 마을에 산다 마을 뒤로는 달팽이 기도원으로 올라가는 작은 언덕길이 있고 마을 동남쪽 해뜨는 곳 토란잎 끝에 청개구리 청소년수련원의 번지점프 도약대가 있다 토란잎은 비바람에 뒤집혀진 우산을 닮았다 그래도 토란잎 대궁 아래 서면 비가림 정도는 충분하다 (…) 지난 여름 소나기가 토란잎을 두드려 드럼을 연주하는 가설무대가 선 적 있다 한 달간 소나기가 계속되었고 그 다음 한 달은 폭염이 세상을 지배했다 (…) 그리고 지난 여름, 토란잎을 둘러싼 탱자나무 울타리에 커다란 해일이 일었다 그러나 어떠한 사소한 뉴스도 탱자나무 가시 울타리를 뚫고 넘어오지 못했다 다만, 아무도 다치지 않은 채 오직 탱자나무 가시만 홀로 아팠다 그러고 훌쩍, 여름은 지나갔다 언제나, 물방울들은 토란잎 한가운데 모여 합창을 한다 또르르르 또르르르 쉬임없는 물방울들의 합창 또르르르 또르르르 힘겨운 물방울들의 노젓기 토란잎, 이 배가 가 닿는 세상의 끝은 어디인가 나는 게으르게 언덕에 누워 아득히 하늘을 지나는 비행기를 본다 어디 저기에서 쓸만한 냉장고 하나 안 떨어지나…… -----------------
슬픔을 말리다 박승민 마을 영감님이 한 짐 가득 생을 지고 팔에서 막 빠져나온 뼈 같은 지팡이를 짚고 비탈을 내려가신다. 지팡이가 배의 이물처럼 하늘 위로 솟았다가 다시 땅으로 꺼지기를 반복하는 저 단선의 봉분. 짐만 몇 번씩 길 밖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길 안으로 돌아와서는 간신히 몸이 된다. 짐이 몸으로 발효하는 사이가 칠순이다. “말리다”에서 “말리다” 역(驛)까지 가는데 수없이 내다 버린 필생의 가필(加筆)이 있었던 것이다. ------------------------------------------------------------------ 한 사람에게는 한 생의 역사가 있지요. 시인이 그려낸 풍경에도 그러한 역사가 고스란히 자리합니다. 시 속의 ‘말리다’는 ‘물이나 물기가 다 날아가 없어지게 하다’와 ‘하지 못하도록 막다’라는 두 가지 뜻을 갖고 있지요. 시인은 이를 동시적으로 활용해 슬픔에 응전하고 있습니다. 젖은 슬픔을 ‘말리면서’ 슬픔에 빠지지 않도록 ‘막아서려’ 하는 것이겠지요. 평론가 고봉준은 시인의 첫 시집 『지붕의 등뼈』 해설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남깁니다. “‘슬픔’이 박승민 시를 느리게 관통하고 있다. 슬픔의 정서와 슬픔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