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66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김윤배 소금밭으로 변한 호수 위에 내가 섰다 수심 깊이 숨어 있던 그리움들의 부활, 너와 나를 종단하던 시간이 순장의 수수만년을 기다려 수정의 모습으로 솟아오르는 현장 흰 소금의 결정으로 부활한 시간 속에 네가 없다 소멸 위에 꽃 핀 참혹한 시간이 있을 뿐 대지는 마지막 한 방울의 물이 스며들기를 기다려 네게로 가는 길을 냈을 거다 시간이 작은 수정의 모습으로 부활하기를 기다렸던 거다 기다림이란 저런 거다 죽은 시간 위에 소금의 결정으로 부활하는 사랑 나는 지금 그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 우리는 지금 도래할 그 무엇을 기다리고 있지요. 간절히. 김윤배 시인은 한 아티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늘의 시대는 총체성을 상실한 시대이며 상실된 총체성의 회복을 위해 만들어진 문학적 형식이 서정시며 소설이라는 것이다. … 문학에서의 총체성의 획득 공간은 주체와 객체의 화해가 실현된 곳이 아니라 실현을 추구하는 과정으로서의 공간이다.”(「시인의 문학적 체험은 루카치적인가 아도르노적인가
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65 샤퍄 연필깎이 심재휘 사춘기는 수식어가 없는 밤이다 열여섯을 앓고 있는 딸이 눈물방울을 떨구고 아직은 식지 않은 여름밤에 선풍기는 소리 없이 돌고 나는 연필깎이로 샤파 샤파 연필을 깎는다 연필은 어둠 속에다 무엇을 쓰려는 걸까 선풍기는 고개를 좌우로 젓기만 하고 나는 연필깎이를 적당히 정말 적당하게 힘을 주어 돌리는 오래된 손 아빠의 달은 창밖을 공전하고 딸의 별빛은 너무나 희미하고 이 넓은 우주에서 샤파 샤파 아프게 깎고 깎이는 연필의 밤 셀 수 없는 몇 자루의 밤을 몸 안에 품고 오늘은 딸이 운다 그럴 때면 나는 뭉툭하고 눈물이 그렁한 연필을 연필깎이에 넣고 길고 까만 심이 나오도록 손잡이를 돌리는데 살살 돌리는 방법밖에 알지 못하는 나의 손에는 얇고 구불구불한 눈물의 밥만 가득한데 연필의 내심(內心)이 제법 뾰족해져도 나에게는 열여섯 사춘기를 베껴 쓸 수 있는 연필이 끝내 없다 서글픈 딸의 봄밤은 작고 가지런한 그녀의 발등 위로 수식어도 없이 한 방울씩 툭툭 떨어져 번지고 있다 -------------------------------------------------------------------- 누군가 저녁별이 연필 깎
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64 환희가 금지된 송승언 빈터에서 꽃들이 자란다 빈터를 밀어내며 빈터에서 꽃들은 자란다 지워지는 빈터에서 꽃 같은 것들이 자라고 있다 꽃이 아닌 것들이 빈터에서 자라고 있다 꽃이 아닐 꽃들이 웃고 있다 꽃은 아닌 얼굴들이 빈터에서 웃고 있다 얼굴은 절대 아닌 것들이 빈터에 들어차 있다 빈터에서 그것들이 자라고 있다 그것들이 함께 웃는다 함께 깔깔거린다 함께 이글거린다 함께 일그러진다 빈터에서 무너진다 무너진 것들의 그림자가 유령처럼 일어서려 한다 꽃의 잔상이 되려 한다 그러나 모두 일어서지는 못하고 모두 사라지지도 못하는 빈터에서 잔해를 헤치고 새로운 꽃이 자라고 있다 늘어진 줄기를 곧추세우려 한다 꽃은 아직 제 이름도 혈통도 모른다 그러나 결코 웃지는 못하고 있다 ------------------------------------------------------------------- 당신의 빈 터는 어디인가요. 시 속의 빈 터에는 ‘꽃들’과 ‘꽃 같은 것들’과 ‘꽃이 아닌 것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기묘하게도 ‘꽃이 아닐 꽃들’도 웃고 있네요. 인간은 누구나 꽃이지요. 다만 이 세계에서 혹은 빈 터에서 “모두 일어서지는 못하고 모
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63 유빙(流氷) 신철규 입김으로 뜨거운 음식을 식힐 수도 있고 누군가의 언 손을 녹일 수도 있다 눈물 속에 한 사람을 수몰시킬 수도 있고 눈물 한 방울이 그를 얼어붙게 할 수도 있다 당신은 시계 방향으로, 나는 시계 반대방향으로 커피 잔을 젓는다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우리는 마지막으로 서로를 포기하지 못했다 점점,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갔다 입김과 눈물로 만든 유리창 너머에서 한 쌍의 여인이 서로에게 눈가루를 뿌리고 눈을 뭉쳐 던진다 양팔을 펴고 눈밭을 달린다 꽃다발 같은 회오리 바람이 불어오고 백사장에 눈이 내린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하얀 모래알 우리는 나선을 그리며 비상한다 공중에 펄럭이는 돛 새하얀 커튼 해변의 물거품 시계탑에 총을 쏘고 손목시계를 구두 뒤축으로 으깨버린다고 해도 우리는 최초의 입맞춤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시계방향으로 당신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우리는 천천히 각자의 소용돌이 속으로 다른 속도로 떠내려가는 유빙처럼, .................................................................................................................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62 술빵 냄새의 시간 김은주 컹컹 우는 한낮의 햇빛, 달래며 실업수당 받으러 가는 길 을지로 한복판 장교빌딩은 높기만 하고 햇빛을 과식하며 방울나무 즐비한 방울나무, 추억은 방울방울* 비오는 날과 흐린 날과 맑은 날 중에 어떤 걸 제일 좋아해?** 떼 지은 평일의 삼삼오오들이 피워 올린 하늘 비대한 구름떼 젖꽃판 같이 달아오른 맨홀 위를 미끄러지듯 건너 나는 보름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후끈 달아오르고 싶었으나 바리케이드, 가로수는 세상에서 가장 인간적인 바리케이드 곧게 편 허리며 잎겨드랑이며 빈틈이 없어 부러 해 놓은 설치처럼 신비로운 군락을 이룬 이 한통속들아 한낮의 햇빛을 모조리 토해내는 비릿하고 능란한 술빵 냄새의 시간 끄억 끄억 배고플 때 나는 입 냄새를 닮은 술빵의 내부 부풀어 오른 공기 주머니 속에서 한잠 실컷 자고 일어나 배부르지 않을 만큼만 둥실, 떠오르고 싶어 *1991년에 발표된 일본 애니메이션 제목. ** ‘추억은 방울방울’에 나오는 대사. -------------------------------------------------------------------- 여기 실업수당을 받으러 가는 한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61 5월 A 박목월 비닐우산을 쓰고 직장을 나선다 날씨를 근심하면서 인사를 하면서 비닐우산 속에 모든 얼굴은 젖어있다 가난한 생활인의 호젓하게 외로운 심령 물론 그들의 눈에 비닐우산이 보일리 없다 -------------------------------------------------------------------- 당신과 함께 인 듯 아닌 듯, 박목월 시인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 ‘구름에 달 가듯이’에 다녀왔습니다. 시인의 생애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하고 있었는데요. 미발표 시고를 비롯해 초판본 시집, 강의노트, 편지, 가족사진 등을 보았습니다. 오늘의 시「5월 A」역시 미발표 시고 중 한 편이지요. 시인의 육필에서 육성이 들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담담한 어조가 시의 행간을 더욱 아득하게 만들어주는 시편이지요. 함께 읽으면 좋을 산문 한 편을 소개해 드릴게요. 시인의 산문은 시와 어깨동무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도 직업이 시인이요, 교수다. 아니, 교수요, 시인일지 모른다. 어느 것이 우위이든 그것은 별문제다. 교수라는 극히 산문적인 생활과 시라는 창조적인 생활을 겸한 것이 현재의 나의 생활이다.”(박목월 지음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60 돌고래 선언문 최지인 손과 죽음을 사슬이라 부르자. 그들이 손가락을 걸고 있는 모습을 엉켜 있는 오브제라 부르자. 그들은 손가락을 쥐고 엄지와 엄지를 마주한다. 구부러진 몸이 손을 향해 있다. 손이 죽음을 외면하는 것을 흔적이라 부르자. 빠져나갈 수 없는 악력이 그들 사이에 작용한다. 손이 검지와 중지 사이 담배를 끼우고 죽음은 불을 붙인다. 타오르는 숨김이 병원 로고에 닿을 때 그들의 왼쪽 가슴은 기울어진다. 손에 입김을 불어넣어 주자. 손이 기둥을 잡음으로써 손은 기둥이 되고 그것을 선(善)이라 부르자. 죽음이 선의 형상을 본뜰 때, 다리를 반대로 꼬아야 할 때, 무너질 수 있는 기회라 부르자. 사라진 손을, 더듬는 선을, 부드러운 사슬을, 죽음이라 부르자. 그들의 호흡이 거칠어지면 담뱃재를 털자. 흩어짐에 대해 경의를 표하자. 한 시인의 선언문을 읽는 밤입니다. 봄밤에 읽는 선언문…. 사람과 사람이 “손가락을 걸고 있는 모습을 엉켜 있는 오브제라 부르자”는 제안이 들려오네요. 이내 “손가락을 쥐고 엄지와 엄지를 마주”하는 약속이 이뤄집니다. 이제 “빠져나갈 수 없는 악력이 그들 사이에 작용”하겠지요. 당신에게는 ‘사이’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59 좋은 언어 신동엽 외치지 마세요 바람만 재티처럼 날려가버려요. 조용히 될수록 당신의 자리를 아래로 낮추세요. 그리고 기다려보세요. 모여들 와도 하거든 바닥에서부터 가슴으로 머리로 속속들이 굽이돌아 적셔보세요. 하잘것없는 일로 지난날 언어들을 고되게 부려만 먹었군요. 때는 와요. 우리들이 조용히 눈으로만 이야기할 때 허지만 그때까진 좋은 언어로 이 세상을 채워야 해요. -------------------------------------------------------------------- 좋은 언어와 좋은 세상을 나란히 꿈꿔봅니다. 신동엽 시인은 한 산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지요. “지금은 싸우는 시대다. 언어가 민족의 꽃이며 그 민족의 공동체적 상황을 역사 감각으로 감수 받은 언어가 즉 시라고 할 때, 오늘처럼 조국과 민족이 그리고 인간이 굶주리고 학대받고 외침되어 울부짖고 있을 때, 어떻게 해서 찡그림 속의 살 아픈 언어가 아니 나올 수 있을 것인가.”(「60년대의 시단 분포도」)라고 말입니다. 어쩌면 오래전의 열망이 오늘의 열망과 이토록 닮아있을까요. 여기서의 “살 아픈 언어”는 “좋은 언어”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58 아침을 기리는 노래 문태준 시간은 꼭 같은 개수의 과일을 나누어 주시네 햇볕, 입술 같은 꽃, 바람 같은 새, 풀잎 같은 잠을 나는 매일 아침 샘에 가 한통의 물을 길어오네 물의 평화와 물의 음악과 물의 미소와 물의 맑음을 내 앞에는 오늘 내가 고를 수 있는 물건들이 있네 갈림길과 건널목, 1월 혹은 3월 혹은 9월 혹은 눈송이, 첫 번째, 분수의 광장, 거울 그리고 당신 당신이라는 만남 당신이라는 귀 당신이라는 열쇠 -------------------------------------------------------------------- 일교차가 큰 요즘입니다. 꽃도 사람도 각방을 쓰지 않는, 봄과 여름에 어리둥절해 하는 것 같지요. 꽃놀이도 좋지만 한 사람의 안색을 살피는 일이 더 중요할 것 같습니다. 최근 출간된 문태준 시인의 시집『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창비) 자서에 보면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만날 수 있지요. “대상과 세계에 솔직한 말을 걸고 싶었다. 둘러대지 말고 짧게 선명하게”. 어쩌면 시는 ‘삶에 말 걸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상이 모여 일생이 되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아침은 언제나 새날이지요. 혹여 눈 뜨는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57 슬픔을 시작할 수가 없다 이영주 슬픔을 시작할 수가 없다 너의 몸을 안지 않고서는 차갑고 투명한 살을 천천히, 그리고 오랫동안 쓸어보지 않고서는 일 년 동안 너는 바다 속에서 물처럼 흘러가고 있다 너는 심연 속에서 살처럼 흩어지고 있다 발이 없어서 우는 사람 오래전부터 바다는 잠을 자고 있어서 죽음을 깨우지 못한대 너는 묘지도 없이 잠 속에서 이빨을 갈며 떨고 있다 너는 죽음을 시작할 수가 없다 산 자들은 항상 죽은 자 주위로 모여든다고 하는데 우리는 슬픔도 없이 모여 있다 진정한 애도는 몸이 없이 시작되지 않는다 모든 비밀은 바다 속에 잠겨 있다 바다에서 죽지 않는 손이 올라온다 그 손을 잡아끌어 올려야 한다 ---------------------------------------------------------------------------- 봄날은 간다, 라는 말처럼 모든 슬픔은 현재진행형인 것 같습니다. 꽃 보는 일이 마치 죄 짓는 일처럼 느껴지는 봄날. 여기 한 시인의 목소리가 광장에 울려퍼지고 있네요. 소중한 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절망. 슬픔조차 시작할 수 없는 처지란 어떤 걸까요. “너의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56 봄 편지 이문재 사월의 귀밑머리가 젖어 있다. 밤새 봄비가 다녀가신 모양이다 연한 초록 잠깐 당신을 생각했다. 떨어지는 꽃잎과 새로 나오는 이파리가 비교적 잘 헤어지고 있다. 접이 우산 접고 정오를 건너가는데 봄비 그친 세상 속으로 라일락 향기가 한 칸 더 밝아진다.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찍으려다 말았다. 미간이 순해진다. 멀리 있던 것들이 어느새 가까이 와 있다. 저녁까지 혼자 걸어도 유월의 맨 앞까지 혼자 걸어도 오른켠이 허전하지 않을 것 같다 당신의 오른켠도 연일 안녕하실 것이다. -------------------------------------------------------------------- 오늘 도착한 봄 편지 함께 읽어볼까요. 문득 바라본 “사월의 귀밑머리가 젖어 있”습니다. 봄비의 흔적이지요. 그 순간 “연한초록/잠깐 당신을 생각”하는 일은 자연스럽습니다. ‘자연(自然)’이라는 말 참 좋지요. 스스로 그러하다니요! 꽃잎과 이파리는 저렇게 잘 헤어지는데, 사람의 일은 쉽지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한 노시인은 헤어지는 일이라고 답했다지요. 그런가하면 이문재 시인은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55 미열(微熱) 사이토우 마리코 나무에게서 사람에게로 옮는 병이 있다. 땅에다 깊이 뿌리박으면서 하늘을 날고 싶다는 병에 걸리는 이가 있다. 몸통을 쪼개 갖고 자기 나이테를 보고 싶어지는 병이 있다. 자기 몸에다 많은 새들을 앉게 하고 싶어지는 병. 잎사귀 수만큼의 눈빛들을 살랑거리며 서 있고 싶다는 병. 거기에 서고 싶다는 병. 같은 데에 날마다 새롭게 기다리지 말고 늦지도 말고 서 있고 싶다는 병. (…) ----------------------------------------------------------------------------- 모국어, 라는 말은 왜 무턱대고 뭉클할까요. 그런데 이채롭게도 우리말로 시를 쓰는 일본 시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처음 한국말을 배웠을 때 나무란 낱말이 나의 가슴속으로 뿌리를 박았었다”고 고백하기도 했지요. 수시로 미열이 찾아오는 봄날입니다. 구름에게서 나무에게로 나무에게서 인간에게로 말이지요. 당신이 창문 바라보는 일이 잦다면, 일상에 얽매인 뿌리를 잠시 잊고 하늘을 날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순간순간 마음의 나이테를 그리다 침묵에 빠지곤 하시나요. 잘 살고 있는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