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규 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102 마음의 오지 이문재 탱탱한 종소리 따라나가던 여린 종소리 되돌아와 종 아래 항아리로 들어간다 저 옅은 고임이 있어 다음날 종소리 눈뜨리라 종 밑에 묻힌 저 독도 큰 종 종소리 그래서 그윽할 터 그림자 길어져 지구 너머로 떨어지다가 일순 어둠이 된다 초승달 아래 나 혼자 남아 내 안을 들여다보는데 마음 밖으로 나간 마음들 돌아오지 않는다 내 안의 또 다른 나였던 마음들 아침은 멀리 있고 나는 내가 그립다 여름 한낮, 문득 ‘오지’를 떠올려 봅니다. 누군가 ‘오지’를 향한 발걸음은 보이지 않는 길을 찾는 것과 같다고 말했지요. 보이지 않는 길, 아득함으로 이어지는 길일까요. 오늘의 시인이 들려주는 시편 역시 특별합니다. 깊고 깊은 ‘마음의 오지’이기 때문이지요. 종소리, 공중으로 스며든 것만 같은 그 소리는 빈 항아리 속으로 도착하게 됩니다. 고여 있는 종소리는 어느 순가 새로운 종소리로 태어날 수 있지요. 빈 항아리를 가득 메운 기억들은 밤이면 어두워지는 것으로 깊어지겠지요. 무수히 많은 소리들이, 기억들이 내 마음 속으로 도착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문장처럼 ‘나는 내가 그립습니다’. 나, 영원히 그리
아몬드 나무는 아몬드가 되고 최서진 성실하게 자라는 아몬드 나무의 가지 끝에서 아몬드를 기다린다. 밤에도 열매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말이에요 열매를 기다리는 꽃이 완성된다 꽃과 죽음은 함께 다가오는 것 발설하기에는 위험하지만 숨을 크게 내쉬면 꽃의 반대편에서 아몬드 냄새가 난다 이국의 어느 화실에서 늙은 남자가 꽃피는 아몬드 나무* 를 그린다 항상 봄도 아닌데 너무 많은 꽃, 방을 지나 바다로 꽃잎이 바다와 바닥에 한꺼번에 쏟아진다 물속에서 나는, 천사들은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 풍경은 홀린 듯 누가 다녀간 세계 눈이 파란 빈센트에게 주는 활짝 핀 희망 그리고 위로, 꽃과 푸른 시간이 만나 만들어 내는 세계 나는 아몬드 나무 오래된 외로움을 접어 잡지 못한 수많은 꽃잎을 날려 보낼 때 한쪽의 벽면을 채우는 그림이 완성 될 때 모두가 갑자기 하늘을 나는 코끼리처럼 가벼워질 때 벽을 완성하면서 벽을 질문을 눈치 채지 못하기로 한다 나는 벽 쪽으로 무너진다 아몬드 나무는 아몬드가 되고 *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고요한 파격의 시적 세계를 추구하는 시인의 첫 시집 표제작 입니다. 시인에게 첫 시집은 세상을 향한 시적 선언. 시인
국수집 연가 김종경 허기진 수화를 주고받던 젊은 남녀 잔치국수 한 그릇 주문하더니 안도의 눈빛 건네고 있다 하루 종일 낯선 시선들 밀쳐내느라 거칠어진 손의 문장(文章)들은 국수 가락처럼 풀어진 때 늦은 안부에도 목이 메어 오고 후루룩 후루룩 국수발을 따라 온 몸으로 울려 퍼지던 저 유쾌한 목소리들 세상 밖 유배된 소리들이 국수집 가득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면 연탄난로 위에 모인 이국의 모국어들도 노랗게 익어 갈 것이다 혹여, 누구라도 이 집이 궁금해 찾아가려거든 낮달 같은 뒷골목 가로등 몇 개쯤 통과해야 한다 또 다시 막다른 슬레이트집 들창문을 엿보던 접시꽃 무리지어 고개를 주억거리고 누군가의 발자국보다 개 짖는 소리가 먼저 도착해 온 동네를 흔들 것이다 거기 푸른 문장들을 뽑아 삶아내는, 오래된 연인의 단골 국수집이 웃고 있을 것이다 -------------------------------------------------------------------- 여기 아름다운 풍경이 있습니다. 멀리서 가까이서 들려오는 국수집 연가. ‘허기진 수화’라니 그건 마치 ‘소리 너머의 음악’을 떠올리게 하지요. 오늘의 연인에게 잔치 국수 한 그릇은 특별한 의미로
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99 의심하지 않은 죄 프리모 레비 그대는 단지 만년필을 준비하고 기다리면 된다. 그럼 마치 불빛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들처럼 새로운 영감이 그대의 영혼과 온몸을 휘감을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재빨리 낚아채기만 하면 된다. 그대는 아직 아무것도 끝내지 못했고 할 일은 많이 남아 있다.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 그것이 그대의 시작이다. 서로 먼저 불빛 가까이 다가가려고 다툰다면 오히려 무질서와 혼란만 불러올 뿐이다. … 작가란 얼마나 훌륭한 이름인가. 무려 6천 년이나 되는 오래된 이름이지만 항상 새롭게 태어나지 않는가. 엄격한 자기원칙이 필요하지만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늘 자유롭지 않는가. 물론 글이 모든 순간에 필요한 건 아니다. 다만 좋은 벗들과 함께 바람 속을 걷는다는 마음으로 모든 준비를 하고 그대의 명령을 기다릴 뿐이다. 그리고 그대 작가들이여, 글을 쓸 땐 부디 ‘의심하지 않은 죄’를 짓지 말라. 이 세상에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 ----------------------------------------------------------------------------- 투명한 여름, 프리모 레비를 만나볼까요.
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98 원(瑗) 요시마스 고오조 엄마 같은 그림자가 아이에게 “새끼줄을 묶어주는 거예요. 달로 되돌아가지 않도록” 하고 말을 걸고 있다 (…) -------------------------------------------------------------------- 오늘부터 여름, 이라고 적습니다. 새삼스럽게 소중한 질문을 드려볼까요. 우리에게 시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치 시는 “엄마 같은 그림자가/“아이에게” 묶어주는 하나의 가는 선일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달로 되돌아가지 않도록”, 혹은 어느 날 아침 미쳐버리거나, 미쳐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지요. 알랭 바디우는 “시의 표면에 있는 수수께끼에 관해 말하자면, 이 수수께끼는 오히려 시의 작용들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우리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임이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이 문장을 오늘의 시인 요시마스가 읽는다면, 어느 날 아침 미쳐버리거나, 미쳐버리지 않을 ‘자유’에 대해 가만가만 이야기를 이어나가지 않을까요. “시의 작용들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면서, 존중하면서 말입니다. 시의 내부로, 당신의 마음이라는 수수께끼 안으로! 시인의 강조점처럼
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97 달리기 박희수 어서 오세요, 이리 오세요, 뛰어오세요 깔깔거리는 꽃의 덩굴들이 이리저리 뒤얽혀 있는 흔들리는 들판으로 달려오세요 무서워 마세요, 움츠러들지 마세요 눈꺼풀로 눈을 감싸듯 숨 가쁜 호흡에 안겨 달려가세요 당신의 땀은 꽃씨들처럼 사방으로 사방은 당신의 땅처럼 꽃씨들로 꽃씨들은 당신처럼 숨 가쁘게 숨은 당신이 타고 가는 자동차, 자동차는 당신이 내쉬는 숨 빛의 그림자와 빛의 실선 서로를 따라잡으려 부단히 뛰어가는 두 쌍둥이 한 호흡 달려가세요 달려가세요 (…) -------------------------------------------------------------------- 시적 주체는 우리를 향해 “어서 오세요, 이리 오세요, 뛰어오세요” 말하고 있습니다. 외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까요. 중요한 지점은 장소, “흔들리는 들판”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지요. 어쩌면 우리는 그곳으로의 도착이 두려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약속처럼 들려오는 “무서워 마세요, 움츠러들지 마세요”라는 목소리. 방법은 전무, 그저 “숨 가쁜 호흡에 안겨 달려가”는 수밖에 다른 동력은 없겠지요. 시인의 첫 시집『물고기들의 기적』과 함께
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96 분홍 나막신 송찬호 님께서 새 나막신을 사 오셨다 나는 아이 좋아라 발톱을 깎고 발뒤꿈치와 복숭아뼈를 깎고 새 신에 발을 꼬옥 맞추었다 그리고 나는 짓찧어진 맨드라미 즙을 나막신 코에 문질렀다 발이 부르트고 피가 배어 나와도 이 춤을 멈출 수 없음을 예감하면서 님께서는 오직 사랑만을 발명하셨으니 -------------------------------------------------------------------- 먼 분홍과 가까운 분홍 사이를 서성이는 봄날입니다. 그대에게 선물 받은 신발이라니, 발걸음마다 꽃이 피어나는 느낌이겠지요. 걷는 동안 꽃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득하겠지요. 내 발에 맞는 신발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신발에 내 발을 맞추는 일. 저만치 피어있는 맨드라미의 꽃말은 열정. “발이 부르트고 피가 배어 나”오도록 마음을 다 하는 것은 열정입니까, 열정이 아닙니까.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사랑예찬』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사랑의 선언은 우연에서 운명으로 이행하는 과정이다.” 어떤 경우든 선언을 위한 전제 조건은 용기일 것. 자신 스스로에게 외치고 세상에 외치는 법이니까. 이어서 철학자는 힘주어 적
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95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보선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
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94 오늘의 결심 김경미 라일락이나 은행나무보다 높은 곳에 살지 않겠다 초저녁 별빛보다 많은 등을 켜지 않겠다 여행용 트렁크는 나의 서재 지구 끝까지 들고 가겠다 썩은 치아 같은 실망 오후에는 꼭 치과엘 가겠다 밤하늘에 노랗게 불 켜진 보름달을 신호등으로 알고 급히 횡단보도를 건넜으되 다치지 않았다 생각하면 티끌 같은 월요일에 생각할수록 티끌 같은 금요일까지 창들 먼지에 다치거나 내 어금니에 혀 물린 날 더 많았으되 함부로 상처받지 않겠다 목차들 재미없어도 크게 서운해하지 않겠다 너무 재미있어도 고단하다 잦은 서운함도 고단하다 한계를 알지만 제 발목보다 가는 담벼락 위를 걷는 갈색의 고양이처럼 비관 없는 애정의 습관도 길러보겠다 -------------------------------------------------------------------- 마음을 굳게 정하다, 봄날의 결심. 요즈음 무엇을 하기로 결심하셨는지요. 하지 않기로 결심하셨는지요. 누군가는 꽃과 나무보다 높은 곳에 살고, 누군가는 꽃과 나무와 눈을 마주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행용 트렁크가 서재일 때, 주인의 모든 발자국은 살아있는 문장이 되겠지요. 그러한 트렁크
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93 청혼 진은영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 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조각처럼 -------------------------------------------------------------------- 여기 특별한 ‘청혼’이 있습니다. 사랑하기 좋은 계절이 따로 있는 게 아니겠지만, 봄은 모든 사랑의 적기처럼 느껴집니다. 별들이 “벌들처럼 웅성거리”는 봄밤의 풍경이 떠오르지요. 여름날의 비를 주겠다는 밀어까지. 고요한 선언이 이어집니다.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시간에 아첨하지 않은 자는 세상에도 아첨하지 않으며 살아왔겠지요. 과연 “우리가 했던 맹세들”이 지켜질 수 있을까요. 서로를 찾느라 “술
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92 아네모네 성동혁 나 할 수 있는 산책 당신과 모두 하였지요 사랑하는 이여 제라늄은 원소기호가 아니죠 꽃 몇 송이의 허리춤을 자른다고 화원이 늘 슬픔에 뒤덮여 있는 건 아니겠지만 안 잘리면 그냥 가자 꽃의 살생부를 뒤적이는 세심한 근육을 우린 플로리스트 플로리스트라고 하지 꽃범의 꼬리 매발톱 모종의 식물들은 죽은 동물들이 기어코 다시 태어난 거죠 거기 빗물에 장화를 씻은 사람아 가을의 산책은 늘 마지막 같아서 한 발자국에도 후드득 건조하고 낮은 짐승이 불시에 떨어지는 것 같죠 나의 구체적 애인이여 그래도 시월에 당신에게 읽어준 꽃들의 꽃말은 내 편지 다름 아니죠 붉은 제라늄 내 엉망인 심장 포개어진 붉은 장화 아네모네 아네모네 나 지옥에서 빌려온 묘목 아니죠 -------------------------------------------------------------------- 시인들의 시인 성동혁. 그는「리시안셔스」라는 시에서 “나는 이 꽃을 선물하기 위해 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아네모네’ 꽃말은 ‘이룰 수 없는 사랑’, 그러니까 이별의 말들. 이원 시인은 그의 시에 대해 “얼핏 보면 고요하고 일상적인 풍경
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91 한 잎의 여자 오규원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은 여자, 시집 같은 여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 시인이 노래하는 ‘한 잎의 여자’는 풀푸레나무에서 비롯되고 있지요. 풀푸레, 라고 발음하면 눈앞에 푸른 기운이 가득 맴돌게 됩니다. 낙엽 지는 넓은 잎의 큰키나무. 꽃은 5월에 새 가지 끝에 피고 열매는 9월에 익으며 물속에 넣은 가지가 물을 푸르게 만든다고 하여 물푸레라 한다지요. 수많은 나무 중에 물푸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