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4월 / 심보선 (…) 나는 너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손가락이 손가락 외에는 아무것도 어루만지지 않던 봄날에 너의 소식은 4월에 왔다 너의 소식은 1월과 3월 사이의 침묵을 물수제비뜨며 왔다 너의 소식은 4월에 마지막으로 왔다 5월에도 나는 너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6월에는 천사가 위로차 내 방을 방문했다가 "내 차라리 악마가 되고 말지" 하고 고개를 흔들며 떠났다 심리 상담사가"오늘은 어때요?"물으면 나는 양미간을 찌푸렸고 그러면 그녀는 아주 무서운 문장들을 노트위에 적었다 나는 너의 소식을...... 물론 7월에도...... 너의 소식은 4월에 왔다 너의 소식은 4월에 마지막으로 왔다 8월에는 어깻죽지에서 날개가 돋았고 9월에는 그것이 상수리나무만큼 커져서 밤에 나는 그 아래서 잠들곤 했다 10월에 나는 옥상에서 뛰어 날아올랐고 11월에는 화성과 목성을 거쳐 토성에 도착했다 우주의 툇마루에 쭈그리고 앉아 저 멀리 지구를 바라보니 내가 가지런히 벗어놓은 신발이 늙은 개처럼 엎드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12월에 나는 돌아왔다 그때 나는 달력에 없는 뜨거운 겨울을 데리고 돌아왔다 너의 소식은 4월에 왔
이은규 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벚나무 실업률 손택수 해마다 봄이면 벚나무들이 이 땅의 실업률을 잠시 낮추어줍니다 꽃에도 생계형으로 피는 꽃이 있어서 배곯는 소리를 잊지 못해 피어나는 꽃들이 있어서 겨우내 직업소개소를 찾아다니던 사람들이 벚나무 아래 노점을 차렸습니다 솜사탕 번데기 뻥튀기 벼라별 것들을 트럭에 다 옮겨싣고 여의도광장까지 하얗게 치밀어 오르는 꽃들, 보다 보다 못해 벚나무들이 나선 것입니다 벚나무들이 전국 체인망을 가동시킨 것입니다. ----------------------------------------------------------------------------- 벚꽃과 사람들의 이야기. 특유의 정서와 상상력을 바탕으로 서정시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손택수 시인. 전통을 견지함과 동시에 도시적 삶의 애환을 그리며 시적 갱신을 도모하고 있지요. 오늘의 시 <벚나무 실업률>에서도 삶의 순간들을 놓치지 않는 감각과 관찰력으로 생의 뒷면을 차분히 응시하고 있습니다. 과연 “꽃에도 생계형으로 피는”, “배곯는 소리를 잊지 못해 피어나는 꽃들이” 있을까요. 이 꽃의 정체가 궁금해집니다. 벚꽃만은 아닌 것 같지요. 시적 풍경
이은규 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예보/ 임솔아 나는 날씨를 말하는 사람 같다. 봄이 오면 봄이 왔다고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전한다. 이곳과 저곳의 날씨는 대체로 같고 대체로 다르다. 그래서 날씨를 전한다. 날씨를 전하는 동안에도 날씨는 어딘가로 가고 있다. 날씨 이야기가 도착하는 동안에도 내게 새로운 날씨가 도착한다. 이곳은 얼마나 많은 날씨들이 살까. 뙤약볕이 떨어지는 운동장과 새까맣게 우거진 삼나무숲과 가장자리부터 얼어가는 저수지와 빈 유모차에 의지해 걷는 노인과 종종 착한 사람 같다는 말을 듣는다. 못된 사람이라는 말과 대체로 같고 대체로 다르다. 나의 선의는 같은 말만 반복한다. 미래시제로 점철된 예보처럼 되풀이해서 말한다. 선의는 잘 차려입고 기꺼이 걱정하고 기꺼이 경고한다. 미소를 머금고 나를 감금한다. 창문을 연다. 안에 고인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을 창밖으로 민다. 오늘 날씨 좋다. ----------------------------------------------------------------------------- 일기예보, 오늘의 날씨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임솔아의 첫 번째 시집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이 출간 되었네요.
여수 서효인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 도시를 사랑하게 된 날이 있었다 다시는 못 올 것이라 생각하니 비가 오기 시작했고, 비를 머금은 공장에서 푸른 연기가 쉬지 않고 공중으로 흩어졌다 흰 빨래는 내어놓질 못했다 너의 얼굴을 생각 바깥으로 내보낼 수 없었다 그것은 나로 인해서 더러워지고 있었다 이 도시를 둘러싼 바다와 바다가 풍기는 살냄새 무서웠다 버스가 축축한 아스팔트를 감고 돌았다 버스의 진동에 따라 눈을 감고 거의 다 깨버린 잠을 붙잡았다 도착 이후에 끝을 말할 것이다 도시의 복판에 이르러 바다가 내보내는 냄새에 눈을 떴다 멀리 공장이 보이고 그 아래에 시커먼 빨래가 있고 끝이라 생각한 곳에서 다시 바다가 나타나고 길이 나타나고 여수였다 너의 얼굴이 완성되고 있었다 이 도시를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네 얼굴을 닮아버린 해안은 세계를 통틀어 여기뿐이므로 표정이 울상인 너를 사랑하게 된 날이 있었다 무서운 사랑이 시작되었다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라는 질문과 대답처럼 이 시국에도, 봄은 시작
다시 눈을 떴을 때 이우성 모래는 모래 위에서 계속 길을 덮으며 나아갔다 나는 모래를 주워 먹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모래였다 나는 맨발이었고 모래를 밟지는 않았다 그러나 모래는 잊힌다 모래는 내 몸속에서 길을 낸다 그리고 바다에 닿는다 나는 그곳에서 수영을 하고 있다 멀리 어디로 가고 싶은 것이다 모래처럼 나도 노력을 한다 슬픔을 모르기 때문에 모래는 방향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모래는 괜찮을까 의미 없이 바람이 불고 나는 한 개의 모래가 될 때까지 흩어지는 것이다 붙지 않는 살 나는 모래를 그렇게 부른다 몸에서 바람이 부는 사람은 바다에서 걸어왔고 눈에서 모래를 쏟는 사람이 나를 낳았으며 서둘러 죽고자 하는 사람을 위해 모래는 전생으로 가는 길을 낸다 그러니 나의 불화여, 울라 ------------------------------------------------------------ 모래와 나와 방향과 슬픔에 관한 이야기, 모래와 나는 “멀리 어디로 가고 싶은” 존재들. 그곳에 닿기 위해 “모래처럼 나도 노력” 하는 중. 그러나 모래와 나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슬픔을 모르기 때문에 모래는 방향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 문
따뜻한 상징 정진규 어떤 밤에 혼자 깨어 있다 보면 이 땅의 사람들이 지금 따뜻하게 그것보다는, 그들이 그리워하는 따뜻하게 그것만큼씩 춥게 잠들어 있다는 사실이 왜 그렇게 눈물겨워지는지 모르겠다 조금씩 발이 시리기 때문에 깊게 잠들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 왜 그렇게 눈물겨워지는지 모르겠다 그들의 꿈에도 소름이 조금씩 돋고 있는 것이 보이고 추운 혈관들도 보이고 그들의 부엌 항아리 속에서는 길어다 놓은 이 땅의 물들이 조금씩 살얼음이 잡히고 있는 것이 보인다 요즈음 추위는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고 하지만, 요즈음 추위는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들의 문전마다 쌀 두어 됫박쯤씩 말없이 남몰래 팔아다 놓으면서 밤거리를 돌아다니고 싶다 그렇게 밤을 건너가고 싶다 가장 따뜻한 상징, 하이얀 쌀 두어 됫박이 우리에겐 아직도 가장 따뜻한 상징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시인에게 듣는 ‘따뜻한 상징’ 이야기입니다. 문득, 자주 멀리서 가까이서 잠든 한 사람을 생각하는 밤과 밤들. 시인은 여기서 더 나아가 ‘이 땅의 사람들’을 떠올립니
이은규 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월훈(月暈) 박용래 첩첩 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습니다. 잎 진 사잇길, 저 모래뚝, 그 너머 강기슭에서도 보이진 않습니다. 허방다리 들어내면 보이는 마을. 갱(坑) 속 같은 마을. 꼴깍, 해가, 노루꼬리 해가 지면 집집마다 봉당에 불을 켜지요. 콩깍지, 콩깍지처럼 후미진 외딴집, 외딴집에도 불빛은 앉아 이슥토록 창문은 모과(木瓜)빛입니다. 기인 밤입니다. 외딴집 노인은 홀로 잠이 깨어 출출한 나머지 무를 깎기도 하고 고구마를 깎다, 문득 바람도 없는데 시나브로 풀려 풀려 내리는 짚단, 짚오라기의 설레임을 듣습니다. 귀를 모으고 듣지요. 후루룩 후루룩 처마깃에 나래 묻는 이름 모를 새, 새들의 온기를 생각합니다. 숨을 죽이고 생각하지요. 참 오래오래, 노인의 자리맡에 밭은 기침 소리도 없을 양이면 벽 속에서 겨울 귀뚜라미는 울지요. 떼를 지어 웁니다. 벽이 무너지라고 웁니다. 어느덧 밖에는 눈발이라도 치는지, 펄펄 함박눈이라도 흩날리는지, 창호지 문살에 돋는 월훈(月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은규 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서시 김정환 이제는 너를 향한 절규 아니라 이제는 목전의 전율의 획일적 이빨 아니라 이제는 울부짖는 환호하는 발산 아니라 웃는 죽음의 입 아니라 해방 아니라 너는 네가 아니라 내 고막에 묻는 작년 매미 울음의 전면적, 거울 아니라 나의 몸 드러낼 뿐 아니라, 연주가 작곡뿐 아니라 음악의 몸일 때 피아노를 치지 않고 피아노가 치는 것보다 더 들어와 있는 내 귀로 들어오지 않고 내 귀가 들어오는 것보다 다 더 들어와 있는 너는 나의 연주다. 민주주의여. --------------------------------------------------- 새해 아침, 모든 시인에게 ‘서시’라는 제목의 시는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겠지요. 이 시편과 더불어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떠올리는 것도 중요한 시간이라고 생각됩니다. 문학적으로 전유하는 민주주의는 끝이 없는 원리이겠지요. 이는 국민의 삶을 위해서 어떤 권력을 나눠야 하는지, 이 통치가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지, 어떤 제도나 보충조건에 의해 그것이 수립되고 확보되어야 하는지 상술하지 않는 방식으로 전달합니다. 민주주의는 영구한 재발명을 요청한다는 점. 민주주의가 가능성으로 가득한
이은규 시인의시로 쓰는 편지 북방(北方) 안도현 물 좋은 명태의 대가리며 몸통을 칼로 쫑쫑 다져 엄지손톱 크기로 나박나박 썬 무와 매운 양념에 버무려 먹는 찬이 있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명태선이라 한다 국어사전에는 물론 없다 이 별스럽고 오래된 반찬은 눈발의 이동경로를 따라 북방에서 남으로 내려왔을 것 같다 큰 산에 눈 많이 내리거나 처마 끝에 고드름 짱짱해야 내륙의 부엌에서는 도마질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이것을 나는 노인처럼 편애하였다, 들창에 눈발 치는 날 달착지근한 무를 씹으면 입에서 눈 밟는 소리가 나서 좋았고, 덜 다져진 명태뼈가 가끔 이에 끼여도 괜찮았다 나도 얼굴을 본 적 없는 할아버지 맛있게 자셨다는 이것을 담글 때면 어머니는 솜치마 입은 북쪽 산간지방의 여자가 되었으리라 그런 날은 오지항아리 속에 먼 바다를 귀히 모신다고 생각했으리라 갓 담근 명태선을 놓고 아들과 함께 밥을 먹는 오늘 저녁, 눈발이 창가에 기웃거린다 북방한계선 밑으로 내려가고 싶지 않은, 수만 마리 명태떼가 몰려오고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은규 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삽십 분 김상혁 미친 아이가 집 앞에서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저기서 언덕을 밀고 있어요. 그래 나는 호의를 베풀려고 언덕이 얼마나 움직였는지 되물었다. -어제는 십분, 오늘은 이십 분을 밀었지요. 여름의 뜨거운 정오라서 먼 풍경은 흔들리고 있었다. 아이가 계속 잘하고 있었구나. 시간이 정말 흐르고 있겠구나. ----------------------------------------------------------------------------- ‘미친 아이’(아마도 세상이 그렇게 호명했을)와 ‘내’가 마주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고사, 우공이산(愚公移山)이 떠올리게 하는 시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지나친 고민의 시간 대신 발자국을 내딛는 시간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시는 어떤 말씀도 아니고 가르침은 더더욱 아니고, 한 방향을 다같이 바라보자는 정언명령이 아니지요. 그저 질문하고 답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백지 속에 찍힌 활자들이 서로 어울려 한 세계를 이루는 기적, 시만이 할 수 있는 그 능력을 바라봅니다. 아이와 나는 서로 조응하기도 하지만, 극과 극의 당김 속에 팽팽한 기류가 흐
이은규 시인의시로 쓰는 편지 거짓된 눈물의 역사 김중일 (…) 새벽잠에서 깨어난지 오래됐는데,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지 오래됐는데, 잠보다 너무 길고 어두웠던 꿈에서 깨어났을 때, 처음 맞닥뜨린, 내 옆에 모로 누운 허공의 어정쩡한 자세, 나 어렸을 때 병이 깊어 복수 찬 배를 땅에 질질 끌며 마당 한 바퀴 돌고, 집 버리고 나가 죽은 그 작던 강아지만한 눈물 한 방울이 오늘밤 내 발등에 떨어져 김이 모락모락 나도록 따뜻하고 축축하게 삶은 작은 행주 같은 혀로 내 발등부터 나를 닦아낸다 먹고 살고 죽는 저 높은 식탁위에 물얼룩처럼 묻은 나를 말끔하게 아무런 흔적도 없이 감쪽같이 ----------------------------------------------------------------------------- 시인은 역사에 대해 말합니다.‘거짓된 눈물’의 역사에 대해 말이지요. 어쩌면 역사란, ‘잠보다 너무 길고 어두웠던 꿈’일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 순간을 대면하는 것이 역사적 과제라고 할 수 있겠지요. 모든 인식적 가치를 지닌 작품은 인간과 세계에 대해 새로운‘무언가’를 알게 합니다. 그 ‘무언가’는 과학, 철학
이은규 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114 포도나무를 태우며 허수경 서는 것과 앉는 것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까 삶과 죽음의 사이는 어떻습니까 어느 해 포도나무는 숨을 멈추었습니다 … 어느 날 창공을 올려다보면서 터뜨릴 울분이 아직도 있습니까 그림자를 뒤에 두고 상처뿐인 발이 혼자 가고 있는 걸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어봅니다 포도나무의 시간은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에도 있었습니까 그 시간을 우리는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의 시간이라고 부릅니까 지금 타들어가는 포도나무의 시간은 무엇으로 불립니까 정거장에서 이별을 하던 두 별 사이에도 죽음과 삶만이 있습니까 지금 타오르는 저 불길은 무덤입니까 술 없는 음복입니까 그걸 알아볼 수 없어서 우리 삶은 초라합니까 가을달이 지고 있습니다 ----------------------------------------------------------------------------- 모국어에 대한 탁월한 감각, 삶을 탐사하는 고고학적 상상력, 울먹울먹한 감수성이 여기 있습니다. 인간의 근원적 슬픔을 노래해온 허수경 시인의 새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를 펼칩니다. 오늘의 시는 포도나무 이야기. 모든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