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78 3분 동안 최정례 3분 동안 못할 일이 뭐야 기습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지 다리가 끊어지고 백화점이 무너지고 한 나라를 이룰 수도 있지 그런데 이봐 먼지 낀 베란다에 널린 양말들, 바지와 잠바들 접힌 채 말라가는 수치와 망각들 뭐하는 거야 저것 봐 날아가는 돌 겨드랑이에서 재빨리 펼쳐드는 날개를 저 날개 접히기 전에 어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야지 도장을 찍고 악수를 청하고 한 나라를 이루어야지 비행기가 떨어지고 강물이 갇히기 전에 식탁 위에 모래가 켜로 앉기 전에 찬장 밑에 잠든 바퀴벌레도 깨워야지 서둘러 겨드랑이에 새파란 날개를 달아야지 ----------------------------------------------------------------------------- 시공간을 넘나드는 분방한 상상력과 독특한 화법으로 개성적인 시 세계를 펼쳐온 최정례 시인의 시입니다. 3분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시인은 말합니다. “기습 결혼을 하고/아이를 낳을 수 있지/다리가 끊어지고/백화점이 무너지고/한 나라를 이룰 수도 있”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왜 일상의 과제들을 마치는 데는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
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77 사랑법 강은교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 만약 사랑을 완성하는 방법이 있다면, 모두 귀를 기울이지 않을까요. 여기 시인이 들려주는 ‘사랑법’이 있습니다. 묵독도 좋지만 낭독이 더 알맞은 시편이지요. 대상이 원하는 것을 존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답니다.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침묵할 것.” 어쩌면 존중 이후의 침묵이 곧 사랑의 완성인지도 모르겠군요. 꽃과 하늘과 죽음에 대해 침묵의 언어로 소통하는 일은 경지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너무 쉽게 꿈꾸고, 쉽게 흐르고,
용인신문-시로 쓰는 편지 76 반송 주영헌 창밖 전화선에 가만히 손을 올려 실을 뜨다 찌릿한 느낌에 손가락을 들여다본다. 회오리치는 지문 속으로 누군가가 보낸 감정이 누전된 것만 같다. 실뜨기를 해 본 사람만이 손과 실의 연결을 이해한다. 실뜨기란, 허튼 고백이 아니라면 만날 수 없는 두 손으로 줄의 긴장감을 이어가는 일 혹은 마음에 새길 다음의 무늬를 짐작하는 일 실의 가닥에서 당신의 감촉을 기억한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맥박(脈搏) 느껴지지도 않은 작은 감정에 설레어 본 적이 있었던가. 전송하지 못하고 면도날처럼 입안에서 맴돌던 몇 줄의 모호한 문장과 눈(目) 속에서 무음으로 잠기던 그대의 뒷모습, 긴 머리카락 생각해보면 모호한 감정의 발신은 잊을 만큼 반송이 늦고, 단호한 몇 개의 단어는 긴 문장을 갈음한다. --------------------------------------------------- 오늘의 시는 ‘마음들’의 이야기. 시인은 우리에게 마음과 마음의 연결지점에 대해 들려주고 있습니다. ‘누군가 보낸 감정’을 ‘누군가 받는 것’. 안타깝지만 ‘시차’를 두고 도착한 마음은 이미 ‘희미하게 느껴지는 맥박’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가하면 ‘전
용인신문-시로 쓰는 편지 75 밀물 김어영 손녀가 할아버지 등에 손가락으로 쓴다 보리 싹 같은 감촉 재미있다는 듯 깊이도 쓴다 할아버지의 등에 혼미가 찾아온다 각질이 무디어진 탓일까 염전의 갈라진 등을 태양이 잠식하고 있다 지난여름 모래 위에 쓰고 지우던 어지러운 마음, 밀물이 가져갔는지 깨끗하다 그새 일 년이 가버렸구나 눈 감으면 가슴에 파도가 밀려온다 -------------------------------------------------------------------- 김어영 시인은 ‘기억의 연금술사’인 것 같습니다. 기억이 밀물처럼 밀려옵니다. 그 기억의 풍경을 펼치면, 손녀와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지요. 손녀는 할아버지 등에 무슨 문장을 남기고 싶은 걸까요. 문장보다 중요한 것은 ‘보리 싹 같은 감촉’일 것. 손끝에서 묻어나올 것 같은 보리향이 풍경을 가득 채웁니다. 일순 환해지는 풍경이란 이런 시공간을 가리키는 것이겠지요. 할아버지께서 손녀의 문장을 읽어내지 못하시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보리 싹 같은 감촉’을 느끼셨다면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겠지요. 문득, 우리는 지난여름 수없이 썼다 지워버린 마음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 어지러운
용인신문-시로 쓰는 편지 74 걸음 차성환 걸음은 걸으면서 걸음마다 피는 꽃들과 녹아내리는 얼음을 생각하고 방향이 없이 방황하는 걸음은 구두 뒤축처럼 딱딱하게 굳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다른 걸음이 올 것 같은 골목에 서서 걸음 속에 걸음이 왼발과 오른발이 번갈아 움직이면서 엉덩이와 어깨가 춤추듯이 흔들리는 길을 따라 흘러가는 걸음의 리듬을 기다리는데 나는 걸음을 가두는 걸음에 갇힌 채 걷지도 못하고 바다로도 가고 싶은 걸음이 산에도 못가고 집에도 못가고 걸음을 포기하고 걸음으로 남아 어디에도 가지 못하는 걸음을 자책하며 눈물을 흘리고 걸음이 흘러내리고 녹아내리고 바닥에 스며 새로운 걸음을 완성할 때까지 또 다른 걸음을 꿈꾸는데 계단을 오르고 횡단보도를 건너고 걸음을 따라 걸으면 죽은 걸음이 온통 가득 넘쳐 출렁이는 걸음의 파도 걸음의 슬픔 걸음의 얼음 걸음의 덧없음 걸음의 넘어짐 움직이지 못하는 걸음 그대로 압정으로 벽에 꽂아 걸음을 걸어놓고 걸음걸이를 감상하고 그러고 보면 걸음은 걸음을 멈출 때 가장 걸음에 가깝고 걸음은 내 시의 거름이 되어 치사하게 머릿속에 얼어붙은 걸음으로 시를 쓰고 나를 여기서 저기로 옮겨주는 걸음은 문이 없는 걸음으로 걸음을 끝내려
용인신문-시로 쓰는 편지 73 단풍주의구간 안영선 풍경은 말의 재단사였을지도 몰라 (단풍주의구간입니다 주의 운전하시기 바랍니다) 내비게이션의 낭랑한 소리가 들렸지 알록달록 물든 단풍이 골짜기를 품고 있었어 하늘은 온통 바다 빛으로 채색된 날이었을 거야 말은 저속으로만 풍경을 즐기는 시간을 허락했어 아내는 모든 말이 단풍처럼 선홍색이거나 노란색이었으면 좋겠다고 했지 풍경은 차창에 가까워질 때마다 선명한 말을 쏟아냈어 저 앞선 곳 고라니 한 마리 풍경에 갇혀 쓰러져 있었지 (야생동물출몰지역입니다 주의 운전하시기 바랍니다) 붉게 물든 풍경은 가끔 말을 놓치기도 하나 봐 말을 놓친 풍경이 도로 위에서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지 단풍주의구간 아내에게서 처음 들어본 말이야 두근대는 아내의 속내를 귀가 먼저 읽어낸 말이지 도로표지판에 없는 말 인터넷에 검색되지 않는 말 풍경이 꼭꼭 숨겨두었다 이 계절에만 끄집어내는 말이었지 아내는 시월이면 단풍주의구간을 달리고 싶어 했어 풍경이 전하는 말을 듣고 싶어 했지 ----------------------------------------------------------------------------- 처서가 지나고, 이제 초록들은
용인신문-시로 쓰는 편지 72 통영 ―책 이은봉 무엇인들 책이 아니랴 오랜만에 들린 통영에서도 보고 배울 책은 많았다 구중서 선생님과 통영에 놀러가서는 먼저 박구경 시인이 소개한 ‘호두나무실비집’이라는 책부터 읽었다 정가 2만 5천 원인 이 책의 주요 내용은 맛있는 음식을 과식하지 않고 먹는 법이었다 빠른 리듬에 쫓기다 보니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한참 지난 뒤에야 겨우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식욕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일까 배가 불러 힘들어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김덕우 시인이 소개한 또 한 권의 책을 읽게 되었다 ‘한산 호텔 부속 횟집’이라는 책이 그것이었다 이 책에는 첫 페이지부터 과식은 당뇨병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씌어 있었다 책의 내용은 어렵지 않았지만 책의 내용대로 살기는 어려웠다 책을 읽고 있으면서도 책의 내용을 지키지 못한 셈이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달라 통영에서도 내내 괴로웠다 끝내는 배탈이 나서 설사를 하고 말았다 책을 읽고 있으면서도 책의 내용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내 오랜 병통, 통영에서는 이제 더 이상 책을 읽지 않기로 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용인신문-시로 쓰는 편지 71 처서(處暑)라는 말의 내부 천서봉 골 진 알밤, 무딘 칼날 세워 보늬 긁는다. 겨의 주름 깊이 길이 나 있다. 더위가 물러가는 길, 길을 따라 또 길이 돌아오는 길. 죽은 할미도 달의 오래된 우물도 모두 내 안구 속으로 돌아와 박힌다. 깊어가는 수심의 습지에서 남보다 더 오래 우는 개구리의 턱이 깊다. 지나간 애인들의 뒤통수가 전봇대마다 건들건들 매달려 있다. 울음소리를 참아온 나무들이 투명한 손바닥을 여름의 뒷등에 비빈다. 앵앵거리는 추억은 다만 비틀어져갈 뿐, 하나도 안 아프다. 그런 모기의 주둥이처럼 저녁이 오고, 한두 겹의 내력을 더 견디며 나는, 고요의 중심으로 천천히 내려가리라. 더위가 물러가는 길, 파르라니 깎은 몇 개의 알밤을 바가지에 담그면 달의 손바닥들이 내 오래된 뇌(腦)를 쓰다듬는다. 서늘한 나의 카르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처서(處暑)는 여름 더위가 그치는 날. 입추와 백로 사이의 절기이지요. ‘처서가 지나면 풀도 울고 지나간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시에
용인신문-시로 쓰는 편지 70 다섯 개의 계절 박진성 계절이 다섯 개가 있다면 한 계절은 죽어 있어도 된다면 나는 너의 무덤에 있을 거야, 네 번째 계절이 끝나는 곳에 나무를 떨어뜨릴 거야 감정 노동자의 감정을 제거할 수 있다면 그리고 초록이 지겨운 초가을의 나무들을 닫을 수 있다면 다섯 번째, 다섯 번째, 자, 이렇게 시간은 흐른다, 나무들이 맹목을 버린다면 우릴 쳐다보는 모든 눈동자들이 흰 자위만 남는다면 구름처럼 구름 아래의 구름처럼 아래의 아래의 …… 빙빙 도는 새들이 떨어진다면 아이들이 갑자기 노는 일을 중단한다면 다섯 번째, 다섯 번째 꿈이 시작된다 잠들 수 있다면 쫓기고 있어요, 네 꿈의 창백한 환자가 내 꿈으로 이동한다면 안아줄 텐데 자신이 가여워서 우는 사내를 네가 본다면 없는 죄를 만드는 사내의 입술을 본다면 말의 힘줄과 말의 불안과 말의 꽃들을 네가 밟는다면 다섯 번째 계절엔 병원이 없을 텐데 안녕 지하실들아 모든 시간들이 모이는 바닥들아 네가 그곳에 눕는다면 …… 너의 아래를 기어다닐 수 있다면 시간이 사라질 텐데 날씨가 악기가 될 수 있을 텐데 악기의 북쪽으로만 만든 음악일 텐데 계절이 다섯 개가 있다면 그렇게 죽어 있어도 좋아 죽은
시로 쓰는 편지 69 여름 한철 도종환 동백나무 묵은 잎 위에 새잎이 돋는 동안 아침 창가에서 시를 읽었다 난초잎이 가리키는 서쪽 산 너머 지는 해를 바라보며 바로 세우지 못한 나랏일에 마음 흐렸다 백작약 뿌리를 다려 먹으며 견디는 여름 한철 작달비 내리다 그친 뒤에도 오랜 해직 생활에 찾아온 병은 떠날 줄을 몰랐다 여름밤 깊고 깊어 근심도 깊은데 먼 마을의 등불도 흔들리다 이울고 띠구름 속에 떴다 지는 까마득한 별 하나 ------------------------------------------------------------------- 오늘의 시에 ‘여름 한철’이 그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번 여름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요. 한 사람이 아침을 맞아 새잎 돋는 소리를 들으며 시를 읽었답니다. 저녁에는 노을 앞에서, “바로 세우지 못한 나랏일에 마음 흐렸”음을 고백하고 있네요. 마음이 흐려지면 몸은 덩달아 무거워집니다. 이를 다스리기 위해 백작약 뿌리에 기대어 보기도 하고요. 작달비가 시원스레 내려도, 삶의 이력이 가져다준 병은 떠날 줄 모르나 봅니다. 시인의 산문을 함께 읽다 밑줄을 그었습니다. “충분히 사유할 시간 없이 쫓기던 삶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68 버찌 이정원 파편이 거리에 넘치던 밤 있었다 파편에 찔린 가로등 야위던 밤 있었다 가슴을 다쳐 압박붕대를 감고 앓던 밤 멍들이 자랐다 누르면 고집의 멍울들 울울해 지는 꽃 보면서도 눈치 못 챘다 꽃 진 자리에 산탄이 맺힌다는 걸 떫고 시큼한 주기율표의 원소들처럼 나란히 나란히, 서로 같은 듯 다른 표정으로 나란히 나란히, 산탄은 언제 터질지 몰라 멍이 익어갔다 속으로부터의 반란이었다 달거리의 시간 달이 차오를 때 꽃피는 혓바늘처럼 한 시절이 불쑥불쑥 터지고 있었다 멍들이 으깨지며, 앓고 난 발바닥을 깨물며 낙관을 찍고 있었다 검은 피의 날이 보도블럭으로부터 올라올 때 숨겼던 산탄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때론 가슴에서 꺼내기도 했다 검은 피의 목록들이 피어났다 ------------------------------------------------------------------- 벚나무의 열매, 버찌. 시인은 오늘의 시를 통해 과거와 미래를 말하고 있습니다. 파편과 압박붕대의 나날. 멍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도처에 자리한 산탄들이 그려집니다. 사회라는 공동체는 구성원의 연대감을 필요로 합니다. “서로 같은 듯 다른 표정으로 나란히
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67 한 사람이 있는 정오 안미옥 어항 속 물고기에게도 숨을 곳이 필요하다 우리에겐 낡은 소파가 필요하다 길고 긴 골목 끝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작고 빛나는 흰 돌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나는 지나가려고 했다 자신이 하는 말이 어떤 말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진짜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반복이 우리를 자라게 할 수 있을까 진심을 들킬까봐 겁을 내면서 겁을 내는 것이 진심일까 걱정하면서 구름은 구부러지고 나무는 흘러간다 구하지 않아서 받지 못하는 것이라고 나는 구할 수도 없고 원할 수도 없었다 맨 손이면 부드러워질 수 있을까 나는 더 어두워졌다 어리석은 촛대와 어리석은 고독 너와 동일한 마음을 갖게 해달라고 오래 기도했지만 나는 영영 나의 마음일 수밖에 없겠지 찌르는 것 휘어 감기는 것 자기 뼈를 깎는 사람의 얼굴이 밝아 보였다 나는 지나가지 못했다 무릎이 깨지더라고 다시 넘어지는 무릎 진짜 마음을 갖게 될 때까지 ------------------------------------------------------------------- 여름, 숨 막힌다는 느낌은 꼭 기온 때문만은 아니겠지요. 젊은 시인이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어항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