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딜리아니 삶은 어떤 의미에서 누구나 홀로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풍경 속을 걸어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순간에서 순간으로 이어지는 고유한 빛에 의지하면서 자신의 폐허를 지나가지요. “나는 이 세상엔 맞지 아니하므로/ 병들어 있으므로/ 머지 않아 죽을 거야/ 끝없는 평야가 되어/ 뭉게 구름이 되어/ 양떼를 몰고 가는 소년이 되어서/ 죽을거야 ”(김종삼,「그날이 오면」부분) 라는 시가 공중의 새떼처럼 이상한 슬픔으로 흐릅니다. 시인의 비극적 세계인식이 죽음을 암시하지만, 그것은 평야, 구름, 소년 같은 평화로운 이미지와 만나 영생의 길을 가고자 하는 시인의 꿈을 엿볼 수 있습니다. 죽음은 생의 소멸인 동시에 해방이며, 죽음이 있다는 그곳을 향해 불구의 영혼을 이끌고 가는 시인의 사유가 나타나 있습니다. 저녁이 흘러가는 방향을 쫓다가 떠나간 별빛들을 생각하는 밤하늘에는 죽은 새의 고요가 흐릅니다. 문득, 고독의 자화상을 그려내는 모딜리아니의 긴 손을 떠올려 봅니다. 사람의 손에서 흘러나온 한 인간의 푸른 허무를 우리는 보게 되지요. 가난과 술과 병에 걸려 허덕이던 그의 삶은 우리를 날카로운 종이에 베인 듯 아리게 합니다. 한없는 고독 속에 요절한 모딜리아니의
연꽃 보러 온 나비를 보듯 “벽이 걸어온다. 늙은 회나무가 걸어온다./ 머리가 없는 인형이 걸어온다./ (어디서 오는 것일까,)/ 노오뜰담 사원의 회랑의 벽에 걸린 청동시계가/ 반 한시를 친다.// 어딘가, 늪의 바닥에서 거무리가 운다./ 그 눈물 위에 떨어져 쌓이는/ 뿕고 뿕은 꽃 잎,”(김춘수,「벽壁이」전문)의 이미지가, 이미지 밖으로 걸어 나와 진열되며 시인의 깊은 실존의 고뇌를 보여줍니다. 벽은 보이면서 보이지 않는 존재이지요, 그것은 가로막음으로써 가로막음을 벗어나기도 합니다, 존재란 이렇게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답답하다고 생각하는 벽이 없는 순간은 우리를 질식시킬 수도 있다는 얘기지요, 그것이 있기 때문에 가까운 꽃이 갑자기 나타나기도 한다는 말이지요, 그곳에는 주체의 판단을 중지하며 낯선 이미지들이 단지 비애의 색조를 띠고 존재할 뿐입니다. 어떤 대상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대상이 되는 것이지요. 의미를 거느린 말로 표현하는 순간 그 아름다움이 희석되어 버린다는 듯이 붉고 붉은 꽃잎이 서늘한 비애로 떨어져 쌓입니다. 푸른 해면으로 살아서 오는 파도와 죽어가는 파도가 파도일 뿐이라는 인식으로 세
세상의 모든 꽃은 절규 끝에 피는 것 세상의 모든 꽃은 절규 끝에 피는 것 여기 특정한 시간이 멈춰있지요. 어떤 소용돌이는 절규처럼 인간의 삶을 훑고 지나갑니다. 모든 방향으로 휘어져 버린 삶의 막다른 골목을 지나가는 새의 날개는 얼마나 절박할까요? 총성은 제 심장을 향해 폭주합니다. 이런 시가 있습니다. “등뒤를 몇 개의 어두운/ 그림자, 쉽게 부러지는 이 거리의/ 난간들, 나는 온힘을 다해 아주 오래된 멜로디를/ 떠올렸으나 네거리의 저 거대한 주유소,/ 그리고 붉은 불빛의 편의점 앞에서/ 결국 뒤돌아보게 되리라, 결국 되돌아/ 보는 그 순간 나는 어떤 눈빛을 지니게 될는지/ 두 손으로 두 귀를 막고 어떻게/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지/ 다만 몇 개의 그림자, 그리고// 등뒤의 세계,”(이장욱, 「절규」부분)라고 진술하면서 시인은 내면적 탐험에 집중합니다. “등뒤의 세계”는 인간이 저질러온 부정적 이미지들이 들끓고 있습니다. 그곳은 어쩌면 죽을 때까지 싸워도 극복할 수 없는 공간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자신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입속에 들어있는 검은 기억을 뱉어 내려고 합니다. 그 때 나타나는 현상이 절규이지요. 물질문명의 격랑 속에서 인간의 정신과 영
장미꽃은 장미가 그린 자화상이지요 들판에 나가 살아 있는 것들을 일깨우며 날아오르는 새 떼를 봅니다. 나는 조금 어두워져서 구름이 가득한 내 영혼의 태엽을 감아 봅니다. 허공 속으로 사라지는 새들의 영혼처럼 저녁 쪽으로 우리는 날마다 기울어집니다. 목마른 잎사귀들이 햇빛을 흔드는 소리가 가득합니다. 서쪽으로 난 질문의 창을 두드려 봅니다.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주체의 눈이 돋아나기를 기다리며, 또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공중의 한 가운데에 바람이 붑니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숲이 깊을수록 길을 지워버리는 들에서/ 무엇인가 저기 저 길을 몰고 오는/ 바람은/ 저기 저 길을 몰고 오는 바람 속에서/ 호올로 나부끼는/ 몸이 작은 새의 긴 그림자는 ”(오규원, 「순례 序」부분) 이 시는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 되고 있습니다.「순례 序」에서는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의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는 구절을 빌려 사용하고 있지요. 바람이 부는 일은 인생의 시련에 대한 은유일 수도 있고, 움직이는 대상에 대해 강하게 느끼는 생명력 같은 자각 일 수도 있습니다. 시가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요? 어떤 길은 막막하고 다리가 아프지만, 걷다보면 삶의 고통을 통
밤의 절벽을 건너가는 새 ‘별이 빛나는 밤에‘는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는 라디오 프로그램 입니다. 그 방송을 들으며 별이 빛나는 밤을 꿈꾸며 우리는 밤을 건너 왔지요, 밤은 별이 있어서 아름답고, 별은 밤이 있어서 살만하지요. 밤과 별이라는 서로 극단적으로 대립 된 이미지를 모아놓으니, 낭만적이지 않은가요? 여기, 절실한 노을빛을 따라 날아가는 새가 있어요.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현실의 좌절을 떨치며 날아오르고 싶은 자아 의지의 치환물이겠지요. 사람이 품었던 비애의 윤곽이 선명해지는 지상의 새, 복잡한 그늘의 퍼즐을 맞추듯이 아픈 방향으로 날아갑니다.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 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 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천상병,「새」부분) 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가난한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면서 사랑의 하늘을 날아가는 시인의 하늘이 보입니다. 무너져 내리는 몸으로 허공을 거슬러 영혼의 집을 찾아가는 생각들이 일몰을 이루고 있습니다. 수천의 꽃송이들이 꽃의 방
최서진 시인이 쓰는<최서진의 문학, 명화를 읽다>라는 코너를 이번호부터 신설, 매주 독자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은 사랑바랍니다. <편집자 주> 최서진 충남 보령 출생. 문학박사. 2004년 《심상》 등단. 시집 『아몬드 나무는 아몬드가 되고』가 있다. 물과 바람 밖에 떠 있는 수련 수련이 이상한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것은 시시각각 움직이고 있습니다. 빛의 넌센스 같다고나 할까요.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면 빛에 따라 변화하는 물과 하늘의 그림자가 흘러들어옵니다. 끊임없이 공기와 물이 만나 풍경을 이루는 어떤 기도를 만납니다. 누군가 물가에 다가가 얼굴을 비춰보고 있습니다. “수련꽃 무더기 사이로/ 수많은 물고기들의 비늘처럼 요동치는/ 수없이 미끄러지는 햇빛들// 어떤 애절한 심정이/ 저렇듯 반짝이며 미끄러지기만 할까? ”(채호기, 「수면 위에 빛들이 미끄러진다」부분) 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수련의 꽃봉오리가 연못의 나라에서 동화처럼 떠 있는 시간입니다. 물의 몽상이 수련으로 실현되었을까요? 수련이 피기까지 자신을 들끓게 했던 심연 속 시간이 그곳에는 떠있는 것입니다.시간도 위치도 없이…… 그것은 어디쯤에 닿은 것일까? 그는 이렇게 한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