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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산동성 답사기

중화사상의 원류 공자 맹자의 고장을 찾아(下)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양사언의 시조로 유명한 태산(泰山)을 등정하기 위해 답사 셋째 날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다. 그러나 며칠 전 내린 눈으로 입산이 통제되고 있다는 말에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어쩌겠는가. 등정은 다음으로 미루고 태산 아래에 있는 대묘(岱廟)를 찾았다. 泰山은 예부터 신령한 산으로 여겨 역대 황제들이 봉선(封禪) 의식을 거행하던 곳이다. 하늘에 제사하는 봉(封)은 태산 정상에서 올리지만 땅에 제사하는 선(禪)은 이곳 대묘에서 이루어졌다.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 대묘는 한나라 때 처음 세워졌고 지금의 건축물은 송나라 때 지은 것이다. 건축형식은 제왕들의 궁성양식과 비슷하여 입구에 들어서니 어느 왕조의 황궁에 온 느낌이 들었다. 둘레가 1.5㎞나 되고 경내의 천황전(天皇殿)은 자금성의 태화전(太和殿), 공자묘의 대성전(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라 한다.

다음 행선지는 공자의 3대 유적이 있는 곡부(曲阜)다. 공자의 탄생지로 유명한 곡부는 주공(周公)의 아들 백금(伯禽)이 다스리던 노나라의 도성으로, 일찍이 소동파는 “옛날의 기풍이 남아있어 10만에 이르는 사람들의 글 읽는 소리가 거리에 넘친다”고 한 곳이다. 지금도 219개의 각급 학교에 학생 수만도 14만여 명이나 되는 학문의 고장이다.

곡부의 중심에는 유학의 시조인 공자를 모신 공묘(孔廟)를 비롯하여 공부(孔府), 공림(孔林) 등 삼공(三孔)이 있다. 마을은 공자님이 살던 ‘궁궐 마을’이란 뜻으로 궐리(闕里)라 한다. 공묘 입구에는 우리나라 홍살문 격인 중국 특유의 패방(牌坊)이 서 있는데 금성옥진(金聲玉振)이라 쓰여 있다. 음악을 합주할 때 먼저 편종 소리를 내고 편경을 울려 마무리한다는 뜻으로 공자의 사상을 함축하고 있다. 대성전에 이르기 위해서는 7개의 문을 지나야 한다. 문을 통과할 때 마다 수백 년 된 측백나무들이 울창하고 곳곳에 역대 황제들의 찬문이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런가 하면 2200년 전 분서갱유의 흔적과 문화대혁명의 상처가 여기저기에 보였다. 공자의 기가 빠져 나오지 않도록 공묘 담 주변을 연못으로 파 둔 것과 공자의 벽중서를 지키기 위해 보관했던 우물, 그리고 봉건주의 타파를 외치며 홍위병들이 동강냈던 비석들의 흔적이 그것이다.

공자님을 모신 대성전 앞에는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행단(杏壇)이 있고 앞에는 살구나무를 심어 놓았다. 우리나라에서는 행(杏)을 은행나무라 여겨 성균관을 비롯하여 전국의 향교와 서원에 은행나무를 심었는데, 여기 와 보니 살구나무 행(杏)이라 한다. 우리 조상들이 이것을 몰랐을까? 대성전은 황궁양식인 구오제(九五制)와 겹침지붕 양식을 채택하고 있었다. 공자를 거의 황제 대우를 했다는 얘기다. 또 대성전을 받치고 있는 28개의 돌기둥 중 앞쪽의 10개는 쌍룡이 여의주를 물고 비상하는 문양을 조각했고, 양쪽과 뒤쪽의 18개의 팔각기둥에는 매 기둥마다 72마리의 용을 음각하였다.

공부(孔府)는 공묘 뒤쪽에서 동편으로 살짝 비켜선 곳에 있었다. 공자 가문의 자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저택과 곡부 지역을 다스리는 관청이 결합된 봉건시대 장원이다. 1038년에 지어졌고 증축이 계속되어 청대에 와서 현재와 같이 공무를 집행하는 곳, 가족들이 거주하는 집, 후원과 책을 읽고 공부하는 곳, 손님을 접견하는 곳 등 모두 463칸의 공부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건물배치는 앞쪽에는 관청, 뒤쪽으로는 주택과 화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문에서 세 번째 문이 중광문(重光門)인데 제후만 통행이 허락되고 평소에는 닫혀 있어 색문(塞門)이라 불린다. 중광문을 지나면 공부의 관아(官衙)가 펼쳐지고 관아를 지나 안채로 들어서면 영벽(影壁)에 탐(貪)이라는 동물 벽화가 그려져 있다. 용의 머리에 개의 몸, 원숭이 꼬리, 기린의 피부, 소 발굽을 하고 뜨거운 태양을 집어삼킬 듯한 자세다. 과욕을 부려 태양까지 집어삼키려다 자신이 망한다는 동물이다, 공자 집안사람들이 안채에서 나올 때마다 “그대여,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마오!(公爺過貪了)”라고 외쳤다고 한다. 과욕을 경계하는 가훈인 것이다. 안채 뒤쪽에는 화원(花園)이 조성되어 있는데 태호석을 쌓아 가산을 조성한 중국 전통 정원의 전형적인 양식을 볼 수 있었다.

공부를 나와 공림(孔林)을 찾아갔다. 공림은 공자의 묘소가 있는 곳으로 그의 아들과 손자를 비롯하여 대대손손 수많은 공씨들이 묻혀 있다. 10만 기가 넘는 세계 최대의 씨족 묘지이다. 공자의 묘를 중심으로 뒤쪽에 후예들의 묘소가 장방형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전국시대 묘지는 공자묘 주변에 있고 서쪽에서 동쪽 방향으로 한대, 명대, 청대 순으로 연결되어 있다.

공자묘에 다다랐다. 공자묘 오른쪽에는 그의 아들 공리(孔鯉)의 무덤이 있고 앞쪽에는 <중용>을 쓴 손자 공급(孔伋), 즉 자사(子思)의 무덤이 있었다. 이처럼 ‘品’자와 같은 묘의 배치는 자식을 데리고 손자를 품에 안은 형태를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공자묘에 예를 갖춰 참배를 하고 잠시 생각에 잠겨 본다. 역대 노벨상 수상자들이 모여 인류가 앞으로 계속 생존하기 위해서는 2500년 전으로 돌아가 공자에게서 지혜를 배워야 한다고 선언했던 적이 있다. 세계 최고 지식인들이 인류에게 이런 충고를 한 것은 공자야말로 인류의 미래까지 내다본 영원한 스승이란 뜻이 아닐까.

다음날 아침 공자연구원을 찾았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의 학맥을 정리해 놓았고 중국의 대표적인 유학자들의 흉상이 전시되어 있었다. 2층에는 아시아 각국의 유학의 전파와 흐름을 보여주는 자료가 정리되어 있었다. 그 첫 번째가 한국관으로 역대 유학자들이 소개되어 있고 전국 향교지도까지 걸려 있었다. 특히 2008년 포은학회에서 제작한 정몽주 선생의 흉상과 우리나라 곡부공씨의 시조인 공사소(孔思紹)의 흉상이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공사소(孔思紹)는 공자의 54세 적손으로 원나라의 노국대장공주가 고려 공민왕에게 시집올 때 공주를 모시고 오면서 우리나리에 터전을 잡게 된 인물이다.

곡부를 떠나 공자의 아성(亞聖)으로 추앙받는 맹자를 만나기 위해 25㎞ 거리에 있는 추성(鄒城)으로 향했다. 맹자는 공자 사후 107년 뒤에 노나라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훈육과 자사(子思)의 가르침을 통해 공자의 도를 계승하여 인의(仁義)를 중시하는 왕도정치를 역설한 인물이다. 군주가 바른 정치를 하지 않으면 백성이 쫓아낼 수도 있다는 그의 주장은 역성혁명이론의 기초가 되었고, 이런 진보 성향 때문에 명나라 시대에는 <맹자>가 금서로 분류되기도 했다. 맹묘(孟廟)의 부지면적은 5만여㎡로 고색창연한 분위기 속에 수 백년 된 고목들이 연륜을 느끼게 했다. 여기에도 수많은 찬문의 석비들이 세워져 있었고,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를 했다는 맹모삼천사(孟母三遷祠), 맹자가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오자 어머니가 짜던 베를 칼로 끊고 훈계했다는 맹모단기처(孟母斷機處)가 우리의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그곳에도 문화대혁명의 상처는 어김없이 남아 있었다.

맹묘의 중심 건물인 아성전(亞聖殿)에 이르니 건륭황제가 쓴 금박 현판이 걸려있고 감실에는 면류관을 쓴 맹자의 소상이 보였다. 아성(亞聖)이란 버금가는 성인이라는 뜻으로 공자 다음가는 성인(聖人), 즉 맹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아성전을 돌아 나와 서쪽 담 너머에 위치해 있는 맹부(孟府)를 찾아갔다. 맹자의 후예들이 생활하던 공간인 맹부는 장방형 구조로, 앞쪽은 대당과 홀이 있는 관아이고 뒤쪽은 가족들의 안채이며 그 뒤는 화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의 중심 건물인 대당(大堂)은 공적 업무를 보던 곳이고 양쪽의 행랑은 맹부의 살림살이를 맡은 관리원이 살던 곳이다. 대당 뒤에는 중국의 전형적인 주거 양식인 사합원(四合院)으로 지어진 주택이 있는데, 바로 맹자가 생활하던 곳이다.

답사 마지막 일정을 청도에서 보냈다. 청도는 산둥반도의 남서쪽에 튀어나온 반도로 중국에서 네 번째로 큰 항구 도시이다. 청나라 말기에 구미열강의 침략을 막지 못하고 독일의 식민지로 전락했지만 오히려 1898년 독일에 의해 개항된 이후 급속한 성장을 이룬 도시이다. 그 영향으로 ‘중국 속의 유럽’이라는 애칭도 가지고 있다. 소어산, 독일총독 관저, 잔교, 소청도, 팔대관 등을 답사했다.

이렇게 해서 4박 5일의 중국답사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그동안 치박, 제남, 태안, 곡부, 추성, 청도 등 수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도(古都)를 답사하면서 중국의 정신과 문화를 온몸으로 느끼고 확인했다. 18세기 이후 영국과 미국 중심의 서구사상과 영어문화가 세계를 지배해 왔다면 21세기에는 중국 중심의 동양사상과 한자문화가 세계의 패권을 쥐게 될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지정학적 위치뿐만 아니라 동양사상과 한자문화권에 속하는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유사 이래 최대의 기회가 오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미래를 예측하고 철저한 준비를 해 나가야 할 것이다. <김장환 용인문화원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