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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과 변혁으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용인 문학순례길을 걷다|-3

|용인 문학순례길을 걷다|

셋, 개혁과 변혁으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

   
▲ 식금리 마을회관옆에 있는 읍취헌 시비
안병춘의 식금리에서 허균의 묘역 맹리까지

용인 문학순례길의 3코스는 처인구에서도 가장 오지에 있는 양지면 식금리에서 시작하려 한다. 식금리를 시작으로 제일리와 양지리를 거쳐 원삼면 맹리에 이르기까지의 약 17km에 이르는 이 순례길을 ‘개혁과 변혁으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길’이라고 명명한다. 이 문학순례길에서 우리는 사회 개혁의 중심에 섰던 위대한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 안병춘의 고향인 식금리 마을 전경
개혁을 꿈꾸는 선각자 안병춘
식금리는 이천시 및 광주시와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용인에서도 가장 오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조선시대의 위대한 시인 읍취헌 박은 선생과 일제강점기에 노동운동가와 독립운동가로 투쟁의 삶을 살며 카프(KAPF,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의 맹장이 되어 비평가로 이름을 떨친 안병춘을 만날 수 있다.

식금리는 이천시 및 광주시와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용인에서도 가장 오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조선시대의 위대한 시인 읍취헌 박은 선생과 일제강점기에 노동운동가와 독립운동가로 투쟁의 삶을 살며 카프(KAPF,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의 맹장이 되어 비평가로 이름을 떨친 안병춘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마을에서 안병춘을 기억하는 사람을 만날 수는 없었다. 독립운동가로도 많은 업적을 남긴 안병춘은 1910년 6월 10일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식금리 108번지(당시는 양지군 주동면)에서 태어났다. 용인문화원 자료에 의하면 그는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관계하던 중 공작위원회에서 활동하였으며 귀국 후 고향에 살다가 광복을 맞이하고, 6․25전쟁 중인 1951년 12월 10일에 사망했다고 한다.

늘 가난 속에서 살았던 그는 양조장에서 노동자 생활을 시작했고, 보성고보(지금의 보성고등학교)에서 급사로 생활하다가 학생들과 함께 한 독서회 활동은 그의 인생을 바꾸는 커다란 분수령이 되었다. 그는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까지 한국 문학의 큰 흐름을 이룬 카프의 맹장이 되었고, 수많은 트로이카를 주도하며 일제에 항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차 경성트로이카 사건에 연루되어 김삼룡과 함께 체포된 후 3년의 수형 생활을 한다. 이 경성트로이카 사건은 역시 용인 출신 작가인 안재성에 의해 소설로 구성되어 출판되기도 하였다.

   
▲ 식금리 마을회관옆에 있는 읍취헌 시비
조선의 천재 시인 읍취헌을 만나다
식금리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읍취헌 박은이다. 읍취헌 박은(1479~1504)은 조선조의 천재 시인으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다. 그의 묘소(식금리 산 6-2번지)와 시비는 안병춘의 고향인 식금리에서 만날 수 있다. 박은 선생의 문학비는 마을회관과 250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느티나무 사이에 있었다. 그러나 주변에 아무 표식도 없고, 울타리 앞 비탈에 덩그러니 세워져 있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스쳐 지나기 쉽다.

식금리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읍취헌 박은이다. 읍취헌 박은(1479~1504)은 조선조의 천재 시인으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다. 그의 묘소(식금리 산 6-2번지)와 시비는 안병춘의 고향인 식금리에서 만날 수 있다. 박은 선생의 문학비는 마을회관과 250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느티나무 사이에 있었다. 그러나 주변에 아무 표식도 없고, 울타리 앞 비탈에 덩그러니 세워져 있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스쳐 지나기 쉽다.

이 문학비는 전국 시가비 건립동호회가 1984년 6월 10일, 박은이 화를 당한 지 여덟 번째의 갑자년을 맞이하여 세웠는데 용인 출신인 홍순석 강남대 교수(당시 단국대학교 동양학 연구소 재직)가 한시를 번역하고 김동욱 교수가 비문을 썼다. 문학비에 새긴 한시 「복령사(福靈寺)」는 박은 선생의 대표작으로 《읍취헌유고》에도 수록되어 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지만 남다른 시풍으로 일가를 이루어 ‘해동강서파’라 불린다. 그의 작품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절친한 친구였던 이행(李荇)의 도움이 컸다. 이행은 그의 시를 모아 《읍취헌유고》를 출간하는데, 이 책에 수록된 250여 편의 작품을 통해 그의 문학 세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그의 시는 주로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 온갖 고뇌로부터 평화로울 수 있는 현실초극의 노력과 주변 인물의 죽음을 통한 인생무상을 노래했다.

저항의 시대, 우리들의 파수꾼, 안재성
제일리는 1980년대와 1990년대를 통해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을 이끈 소설가 안재성의 고향이다. 1960년 제일리에서 태어난 소설가 안재성은 고향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여주로 이사를 한다. 강원대학교 축산학과에 재학 중이던 1980년에는 광주민주화운동에 관련되어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되고 학교에서 제적을 당하게 된다. 그 후 1983년부터 10여 년간 구로공단, 청계피복노동조합, 강원도 탄광지대 등에서 노동운동을 전개하다가 1993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또다시 구속되기를 반복한다.

제일리는 1980년대와 1990년대를 통해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을 이끈 소설가 안재성의 고향이다. 1960년 제일리에서 태어난 소설가 안재성은 고향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여주로 이사를 한다. 강원대학교 축산학과에 재학 중이던 1980년에는 광주민주화운동에 관련되어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되고 학교에서 제적을 당하게 된다. 그 후 1983년부터 10여 년간 구로공단, 청계피복노동조합, 강원도 탄광지대 등에서 노동운동을 전개하다가 1993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또다시 구속되기를 반복한다.

1986년에 「동지」를 발표하며 문단 활동을 시작한 안재성은 1989년에 장편소설 「파업」으로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고, 그 이후 「황금이삭」「경성트로이카」 등의 장편소설과 「이관술 1902-1950」「청계피복노동조합사」「이현상 평전」 등의 역사 다큐멘터리를 집필했다. 소설가 안재성은 일제강점기 노동운동을 이끌며 카프의 맹장이었던 안병춘과 많이 닮아 있다. 안재성은 언제나 역사와 함께 있었다. 이 시대의 파수꾼으로 시대정신을 이끌고 있는 작가 안재성. 그가 꿈꾸는 세상을 상상해 본다.

용인을 사랑한 작가, 천명관

최근에 소설가로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던진 작가는 천명관이다. 그는 소설가 안재성과 마찬가지로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적이 없다. 아니 천명관은 고졸 출신이다. 그는 2003년 《문학동네》신인상 공모에서 단편 「프랭크와 나」가 당선되어 등단했고, 이듬해인 2004년 장편소설 「고래」를 통해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을 받은 역량 있는 작가이다.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한편 최근에는 연극 연출을 하기도 했다.

최근에 소설가로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던진 작가는 천명관이다. 그는 소설가 안재성과 마찬가지로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적이 없다. 아니 천명관은 고졸 출신이다. 그는 2003년 《문학동네》신인상 공모에서 단편 「프랭크와 나」가 당선되어 등단했고, 이듬해인 2004년 장편소설 「고래」를 통해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을 받은 역량 있는 작가이다.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한편 최근에는 연극 연출을 하기도 했다.

소설가 천명관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양지리이다. 그는 이곳 양지리에서 태어나 양지초등학교와 용동중학교를 다녔다. 그 후 수원에 있는 유신고등학교로 진학하기 전까지 유년의 대부분을 고향에서 보냈고, 이런 유년의 기억은 그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소설 「고래」에 등장하는 여러 지명을 이곳에서는 낯설지 않게 만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 양천 허씨 묘역의 난설헌 허초희 시비
이상향을 꿈꾸는 풍운아 허균, 비운의 여류시인 허난설헌

양지리에서 허균 일가의 묘역이 있는 원삼면 맹리까지는 약 9.5km. 백암 방면으로 17번 국도인 죽양대로를 따라 직진하면 능안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굴다리를 지나 죽양대로 1650번 길을 따라 약 800m 정도를 더 들어가면 허균의 가묘를 비롯하여 허씨 5문장으로 유명한 아버지 허엽과 형 허봉과 허성의 묘가 있는 양천 허씨의 묘역을 만난다.

   
▲ 홍길동전으로 개혁을 꿈꾸던 허균 묘소
양지리에서 허균 일가의 묘역이 있는 원삼면 맹리까지는 약 9.5km. 백암 방면으로 17번 국도인 죽양대로를 따라 직진하면 능안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굴다리를 지나 죽양대로 1650번 길을 따라 약 800m 정도를 더 들어가면 허균의 가묘를 비롯하여 허씨 5문장으로 유명한 아버지 허엽과 형 허봉과 허성의 묘가 있는 양천 허씨의 묘역을 만난다.

묘역에는 1969년에 국어국문학회에서 세운 허난설헌의 시비가 세워져 있어 출가로 인해 함께 할 수 없는 누이의 애틋한 마음을 전하고 있다. 시비의 앞면에는 ‘蘭雪軒許楚姬詩碑(난설헌허초희시비)’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좌측 상단에는 허난설헌의 친필을 새긴 ‘閒見古人書(한가하면 옛 사람의 글을 읽어라)’ 라는 문구가, 하단에는 김성립에게 출가한 사연이 기록되어 있다. 시비 뒷면에 새긴 「感愚(감우)」를 통해 허난설헌의 마음을 되새겨 본다.

조선조의 가장 대표적인 개혁가 허균은 1569년 11월 3일에 동인의 영수가 된 아버지 허엽과 어머니 강릉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허균의 집안은 문장이 뛰어난 명문가로서 그 역시 형인 허봉과 허성, 누나인 허난설헌과 함께 시적 재능이 매우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허균이 「홍길동전」을 쓴 것은 그의 나이 44세인 광해군 4년으로 추정된다. 「홍길동전」은 현존하는 최고의 한글소설이라는 명성만으로도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고 있지만, 이 작품을 더 빛나게 하는 것은 조선시대 당시의 사회제도가 지닌 모순, 특히 적서 차별에 대한 항거와 정치 개혁에 대한 허균의 사상이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허난설헌은 신사임당, 황진이와 함께 여류삼절(女流三絶)로 불리는데 1563년 강릉시 초당동 고택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열다섯에 안동 김씨인 김성립에게 시집을 갔으나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바람기 많은 남편과의 갈등, 고부간의 갈등, 아들과 딸의 죽음은 허난설헌이 한스런 삶을 살게 하였고, 2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허난설헌의 시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허균에 의해서였다. 허균은 누이의 유고를 수집하여 정리했고, 중국 사신인 주지번(朱之蕃)이 조선을 방문하였을 때 시를 소개하며 유고를 넘겼다 한다. 주지번은 허난설헌의 시에 크게 감동하여 중국 낙양에서 시집인 「난설헌집」을 처음으로 간행하였다. 그 후 조선에서는 다음 해인 1607년에 허균에 의해 목판본으로 출판되었다.

문학의 세계는 현실을 반영하여 재창조한 세계다. 이 말은 문학도 현실의 문제를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문학은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어 나가는 힘은 지녀야 하며 그에 따른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용인의 문학순례길 3코스는 개혁과 변혁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작가들의 사상을 좇고 어두운 현실을 돌아보며 한 줄기 빛을 밝히는 순례길이 될 것이다.
<용인문학 편집주간 안영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