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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특집기획>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감춰진 진실

김민철<칼럼니스트>

[용인신문]  

 

본 글은 언론의 우크라이나 사태 보도와 너무 달라 독자들이 혼란스러울 수 있다는 점을 먼저 밝힌다. 본 글은 사소한 오류는 있을 수 있으나 전체적으로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에 근거했음을 밝힌다. 본 글은 용인신문의 편집 방향이 아니라 전적으로 필자 개인의 철학과 역사관을 담아 진실에 기초한 사건과 기록을 기술한 것이다. 본 글에 대한 책임은 필자에게 있다. 다음에는 “러시아의 저력 슬라브주의와, 유럽과 미국, 세계는 러시아에 막중한 역사적 부채를 지고 있다”를 싣는다. 筆者 注

 

※ 이 원고는 수정본입니다.

 

누굴 위한 전쟁인가, 그 배경과 파장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USSR) 시절, 소비에트 연방을 구성하고 있던 15개 공화국 중 가장 중요했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벌이고 있다. 1941년 6월, 나치 독일의 전격적인 침공을 맨 앞에서 받아내야 했던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연방의 중추인 러시아 3국이 지금 전면전에 돌입한 것이다.

 

이들 3국은 1991년 12월 8일 벨라베자 조약을 체결하고 같은 해 12월 21일 발트 3국과 조지아를 제외한 11개 국가가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회동, 소비에트 연방을 해체하고 독립국가연합(CIS)결성을 결의하는 알마티조약에 서명했다. 이로써 독립국가연합(CIS-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이 결성되었다.

 

현재 CIS는 9개국(러시아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몰도바)이며 준회원국 1개국(투르크메니스탄) 참관국 2개국(몽골, 아프가니스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크라이나(2018년)와 조지아(2008년)는 탈퇴하였다. 발트 3국은 가입하지 않았고 현재 유럽연합(EU)과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이다.

 

1991년 12월 26일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는 조지아(그루지아)가 가장 먼저 1991년 4월 9일 독립을 선언(독립은 12월 25일 완결)하며 시작되었다, 이어서 발트 3국(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이 1991년 8월 20~21일 소비에트 연방을 탈퇴, 독립하였다. 아르메니아, 몰도바, 아제르바이잔도 8월 23~30일 독립하였다. 벨라루스(8월 25일),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이 12월에 각각 독립하였다.

 

1991년 12월 25일 이름뿐인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사임하자 소비에트 연방은 자동으로 해체되었다. 이로써 러시아(6월 12일 주권 선언, 12월 26일 결정)가 소비에트 연방의 법적 승계자가 되었다.

 

# 고르바초프의 등장

 

1985년 3월 11일 54세의 젊은 정치인이 소비에트 연방의 권력 서열 1위인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에 지명되었다.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가 역사의 전면에 화려하게 등장한 것이다. 미국을 위시한 서방의 지도자들은 그에 대한 정보가 제한적이었다. 74세의 비교적 고령인 전임 콘스탄틴 체르넨코(1911.9.24.~1985.3.10.)가 사망한 다음 날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고르바초프는 유리 안드로포프(1914.6.15.~1984.2.9.)가 공산당 서기장에 오르면서 이데올로기 담당 서기로 발탁되었다.

 

고르바초프는 쟁쟁한 선배 정치국원들을 해임했다. 당 핵심부를 쇄신하기 위해 고르바초프는 비교적 개혁적인 인물들을 정치국원과 각료에 임명하였다. 그는 자신을 서기장으로 추천한 정치국원 겸 외무상인 안드레이 그로미코(1909.7.18.~1989.7.2.)를 국가수반인 소비에트 연방 최고 평의회 의장에 추대했다. 이어 그루지아(조지아) 공산당 제1서기 에두아르도 셰바르드나제를 외무상에 발탁하였다. 고르바초프는 셰바르드나제를 앞세워 서방세계와 적극적으로 교류하면서 동-서 냉전을 해소하고 전략무기를 감축하는 등 세계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199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공산당에 대한 부분적인 비판을 허용하는 등 괄목할만한 언론의 자유도 보장하였다. 고르바초프는 소비에트 연방에 만연한 인민들의 두려움을 해소하고 활력을 불어넣어 인간적인 사회주의 공동체 사회 건설을 목표로 내세웠다. 모스크바 시민들의 표정은 부드러워졌고 동구권에 대한 간섭도 대폭 줄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고르바초프는 사실상 독일통일을 승인하였다.

 

# 페레스트로이카 - 글라스노스트의 실패

 

고르바초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 연방의 경제 사정은 개선되지 않았다. 통제가 느슨해지면서 연방을 구성하고 있던 공화국들의 분리주의-민족 갈등이 폭발하였다. 여기에 공산당 보수파들의 조직적인 반발이 더해졌다. 그의 개혁-개방정책은 구호만 요란했을 뿐 실속이 없었다. 가장 결정적인 실책은 73년간 소비에트 연방과 인민을 영도해온 당을 완벽하게 장악하지도 못한 채 서구식 복수정당제를 도입한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최고 인민대표자회의 직접선거와 대통령제를 정치개혁이라 믿었다.

 

권력의 중심인 공산당이 복수정당제하에서 경쟁하여 집권할 수 있다고 믿은 그는 공산당이 70% 이상의 의석을 차지한 최고 인민대표자회의 간접선거로 1990년 3월 15일 소비에트 연방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는 서방식의 선거를 통한 공산당의 집권이 가능하리라 믿었던 이상주의자였는지 모른다. 고르바초프의 이상이 실현되려면 공산당의 강력한 지도하에 최소 50년의 번영을 누려도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였다. 고르바초프는 덩 샤오핑에게 가르침을 청했어야 한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는 이상과 목표는 물론 권력 운용의 메커니즘이 전혀 다르다. 결국, 대통령제와 자유 선거는 고르바초프의 몰락과 공산당 해체의 시발점이 되었다.

 

#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상반된 목표를 지향(指向)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기본적으로 탐욕과 대량소비, 무한경쟁을 통해 유지된다. 반면 공산주의의 달성은 인간의 도덕적 엄격함과 소유에 집착하지 않는 공동체 사회가 기반이 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목표이다.

 

자유를 보장하되 책임을 다하는 자유, 평등을 추구하되 공정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는 철학이 바탕이 되어야 공산사회 실현의 기본토대가 마련되는 것이다. 문화적 소양을 높이며 환경의 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연과 인류의 공존 사상이 체화되지 않으면 공산주의는 그저 꿈일 뿐이다.

 

소비는 미덕이 아니라 자연 훼손의 값비싼 대가라는 사실이 일반상식으로 통용되는 자율적인 공동체 사회가 조성될 때 비로소 공산사회 초입에 도달한다. 고르바초프는 그것을 몰랐다. 서방을 모방하면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예견된 길을 그는 요란하게 내달렸다.

 

# 수준 미달, 권력의 화신 보리스 옐친의 권력 장악

 

소비에트 연방의 몰락은 보리스 옐친(1931.2.1.~2007.4.23.)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옐친을 발탁하고 출세 가도를 달리게 길을 닦아준 장본인이 고르바초프라는 것이다. 옐친은 공산당 중앙위원회 직할인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인민대표자 회의 선거를 통해 권력의 중심에 진입했다. 옐친은 독립국가연합(CIS)의 결성을 주도하여 소비에트 연방을 해체했다.

 

옐친의 배후에는 미국의 전방위적인 지원이 있었다. 미국은 옐친의 권력 장악을 지원함과 동시에 73년 공산당 지배체제를 신속하게 붕괴시켰다. UN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지위는 CIS가 아니라 러시아 연방공화국이 승계했다. 1만7500여 기에 달하는 핵탄두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벨라루스 등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는데 약 75%가 러시아 연방에 속해 있었다. 벨라루스는 가장 먼저 핵미사일을 러시아에 이관했고 1994년까지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도 핵을 보유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미국의 입장에서 가장 민감했던 핵미사일 문제가 해결되자 다국적 자본이 발 빠르게 구 소비에트 연방의 에너지 산업을 잠식했다.

 

유대계 자본이 장악하고 있던 석유산업은 미하일 호도르콥스키(유코스 창립자), 로만 아브라모비치(첼시 전 구단주) 등 유대계 러시아 청년 사업가들을 바지사장으로 고용한 미국 중심의 다국적 석유자본은 구 소비에트 연방의 석유와 천연가스를 40%나 먹어 치웠다.

 

# 미국의 꼭두각시로 전락한 옐친 대통령

 

보리스 옐친은 권력 유지를 담보로 미국과 다국적 석유자본의 요구를 충실하게 들어주었다. 루블화는 가치가 폭락하고 러시아 주요 기업은 헐값에 다국적 자본에 매각되거나 불하되었다. 해체된 공산당과 KGB는 재빨리 경제인으로 변신했다. 악명높은 러시아 마피아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마피아는 러시아 정치-경제-사회 전반을 재빨리 잠식했다.

 

구 소비에트 연방 브레즈네프 시절, 풍족하지는 않았으나 생활고를 겪어본 적이 없던 인민들은 물자 부족과 사회 안전망의 급속한 붕괴로 고난의 긴 터널에 내던져졌다. 고르바초프와 옐친은 인민의 공적이 되었다. 기성세대는 공산당 시절을 그리워했고 옐친의 지지도는 3% 미만으로 급전직하했다. 반면 러시아연방 공산당 서기장 겐나니 주가노프의 지지도는 37%까지 치솟았다.

 

1996년 러시아연방 대통령 선거에서 옐친의 패배는 확실해 보였다. 다급해진 미국은 CIA를 비롯한 정보기관과 정치-언론산업 종사자들을 선발해 러시아 대선에 긴급 투입 했다. 스탈린 시절의 공포정치를 주제로 한 대량의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어 온종일 방송되었다. 공산당이 재집권하면 스탈린 시대와 같은 공포정치가 다시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폭넓게 퍼졌고 결국 53.7%의 득표로 옐친이 승리했다.

 

옐친의 두 번째 임기는 보드카에 취해 횡설수설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옐친은 러시아 국민의 자존심만 극도로 상하게 했다. 그는 취중에 좌충우돌로 일관하였고 해외 방문 중 술에 취해 비행기에서 내리지 못해 정상회담이 취소된 경우도 있었다. 러시아 국민은 옐친의 존재 자체가 수치스러웠다.

 

보리스 옐친은 임기 말 체첸 분쟁에 개입하면서 미국과도 대립 관계가 되었다. 무절제한 생활로 건강이 악화된 옐친은 1999년 12월 31일 정치신인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를 대통령권한대행에 지명하고 자진 사임하였다.

 

보리스 옐친은 개혁파도 아니었고 슬라브주의자도 아니었으며 탐욕에 가득 찬 권력의 화신일 뿐이었다. 옐친 시절 러시아는 더이상, 나빠질 수 없을 만큼 만신창이가 되었다.

 

 

# 위대한 러시아 재건을 내세운 푸틴 시대의 개막

 

블라디미르 푸틴은 2000년 5월 7일 정식으로 러시아 연방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4년간 총리직을 맡은 것을 포함하여 21년간 장기집권 중이다. 푸틴은 2000~2008년 집권 기간 중 구매력 기준 72%의 GDP 성장, 실질 소득 2.5배, 임금 3배 인상을 달성하여 국가부도 상태의 러시아 경제를 회생시켰다.

 

푸틴은 옐친 시절 다국적 석유자본에 의해 잠식된 에너지 자원을 되찾기 위해 유코스 등 민간석유기업의 탈세를 대대적으로 조사하고 바지사장 호도르콥스키를 전격, 구속수감 했다. 명목상 회사의 대표인 호도르콥스키는 러시아 정부의 공탁금만 받고 기업을 몰수당했다. 아브라모비치 등 시류에 밝았던 바지사장들은 자진하여 러시아 정부 소유의 국영 에너지 공사 가스프롬에 기업을 자진 매각하였다. 러시아 에너지 민간 산업의 실소유주였던 유대계 다국적 석유자본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석유자본의 반격은 미국 정부를 통한 압력으로 나타났다. 미국은 체첸 분쟁을 부채질하고 러시아 내 반체제 언론과 인사들을 지원했다. 대부분 에너지 수출에 의존하고 있던 러시아 산업의 취약한 고리를 타격하기 위해 국제유가 조작을 수시로 자행하였다.

 

미국의 압박으로 러시아는 석유 수출가격 대폭 인하라는 출혈을 감당할 수밖에 없었고 고속성장도 제동이 걸렸다. 푸틴은 대통령 3선 연임금지조항을 회피하기 위해 자신의 측근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를 후계자로 삼아 대통령 후보에 지명하였다. 메드베데프는 70%의 득표율로 당선되었고 푸틴은 연방 총리에 취임했다. 메드베데프를 대리 대통령으로 세운 뒤 실권은 푸틴이 강력하게 틀어쥐었다. 푸틴은 2012년 다시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연방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 임기를 6년으로 연장하고 연임금지 조항도 삭제하였다.

 

# 장기집권 토대를 구축한 푸틴과 미국의 충돌

 

연방헌법 대통령 선출조항의 개정으로 현재 69세인 블라디미르 푸틴은 건강만 허락한다면 2036년까지 집권할 수 있는 장기집권 토대를 구축했다. 안정된 집권 체제를 구축한 푸틴은 군 현대화 계획을 추진했다. 200만에 달하는 비대한 군병력을 100만으로 감축하고 직업군인 위주의 편제로 개편했다. 군 장비의 현대화 계획도 병행 추진하여 명중률이 대폭 개선된 마하 10의 극초음속 전략 미사일을 개발하여 실전 배치했다. 이에 더해 전략 핵잠수함 성능의 대폭 개선과 스텔스 전투기 생산, 최신형 아르마타 전차의 개발 등 군대의 전력을 대폭 현대화하여 미국의 선제공격에 즉각 보복할 수 있는 안정된 전력을 갖추었다.

 

푸틴의 장기집권에 반대하는 여론도 상당한 수준이지만 현재 러시아에서 푸틴을 대체할 정치인과 세력은 미미한 수준이다. 러시아 국민도 이점을 잘 알고 있다. 푸틴이 못마땅해도 그를 대체할 세력이 없다는 사실을 러시아 국민은 고르바초프와 옐친 시절, 절실하게 깨달았다. 푸틴을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은 미국 정부와 경제사회문화 전반을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금융독점자본을 정점으로 한 석유-군사-언론-정보산업의 강력한 카르텔이다.

 

미국 연방정부를 앞세운 독점자본의 세계지배는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폭주 기관차와도 같다.

푸틴이 건설하고자 하는 유라시아 연합과 위대한 러시아 건설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미국을 정점으로 한 서방세계 전체와 충돌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국가 간 충돌에서 서방 자본의 총공세로 전환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난하며 러시아에 진출했던 서방 기업이 속속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철수하고 있고 구글 애플 등 독점 정보산업은 러시아를 정보의 사각지대에 몰아넣는 공세를 펼치고 있다. 게다가 문화-예술, 체육계도 러시아를 철저하게 고립시키고 있다. 지금 러시아는 중대한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 예카테리나 2세 때부터 크림반도는 러시아 영토이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소치 동계올림픽이 끝난 직후여서 그 파장은 더욱 컸다. UN 안보리가 소집되고 총회에 회부 되는 등 난리가 난 것도 현재 상황과 비슷하게 전개되었다.

 

러시아는 크림반도가 우크라이나 영토라고 인정한 적이 없다. 역사적으로 볼 때 크림반도는 러시아 영토가 맞다. 제정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전성기를 연 예카테리나 2세는 오스만 제국과 흑해의 지배권을 놓고 길고도 긴 전쟁을 벌였다. 예카테리나 2세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크림반도와 우크라이나, 폴란드, 발칸반도 일부까지 러시아 제국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흑해의 지배권은 당연히 러시아에 귀속되었다.

 

러시아 제국이 1917년 2월혁명에 의해 무너지고 10월 25일(러시아 구력) 볼셰비키 혁명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퇴장되자 전 세계 자본가 계급은 충격에 휩싸였다. 프랑스 혁명으로 인한 파장의 수십 배 강도의 충격파가 선진자본주의 국가에 휘몰아쳤다. 자본가 계급은 경악했고 노동자와 지식인 계급은 고무되고 열광했다. 볼셰비키는 러시아에 인류역사상 최초로 노동자계급이 주도하는 정권을 수립했다. 볼셰비키 정권에 대항하여 군주제와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백군이 결성되어 러시아는 내전(1917.11.7.~1923.6.16.)에 돌입했다.

 

볼셰비키 정부는 레프 트로츠키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대대적인 징병제를 실시, 적군(赤軍)을 조직하였고 총력전에 돌입했다. 백군(白軍)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 제국주의 열강을 주축으로 중국의 북양군벌(위안스카이)까지 가담한 18개 국가와 정권이 급파한 간섭군 25만여 명이 러시아 내전에 긴급 투입되었다. 러시아 내전은 자본주의와 신생 사회주의가 대결하는 국제적인 계급전쟁으로 비화(飛火)되었다.

 

# 소비에트 연방의 성립과 우크라이나 분할

 

러시아 내전에서 적군이 승기를 확고하게 구축한 1922년 12월 30일 소비에트 연방(USSR)이 성립되고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국제공산당)이 결성되었다. 볼셰비키와 적군은 백군과 잔존 간섭군을 1924년이 되어서야 일소할 수 있었다. 러시아 내전에서 700만에서 1200만 명으로 추산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소비에트 연방이 성립되면서 발트 3국(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은 독립하였다.

 

푸틴이 우크라이나는 레닌에 의하여 세워졌다고 주장하는 논거는 바로 소비에트 연방의 결성으로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공화국이 성립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이전에는 우크라이나는 민족과 문화는 있었으나 국가는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갈망하던 민족주의 무장 운동단체들은 독립을 선언했다. 우크라이나는 정세변동에 따라 러시아와 독일제국에 교차 편입되는 아픔을 겪어왔다. 볼셰비키 정권 수립으로 우크라이나 독립의 기회가 찾아왔으나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폴란드가 독립국이 되면서 우크라이나 민족의 꿈은 무산되었다. 우크라이나는 다시 러시아와 폴란드로 분할되어 양분되었다.

 

크림반도가 우크라이나 공화국에 편입된 것은 1954년 니키타 흐루쇼프에 의해서다. 흐루쇼프는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로 출세 가도에 올랐다. 독소전쟁에서 소비에트 연방 중앙위원회 서기 자격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 최고정치지휘관에 임명되어 6개월의 공방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젊은 시절 대부분을 우크라이나에서 보냈던 흐루쇼프의 지대한 관심과 애정에 힘입어 크림반도가 우크라이나에 무상 양도되었다. 흐루쇼프의 결정은 소비에트 연방 해체 이후 우크라이나가 크림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로 작용했다. 결국, 크림반도의 소유권 분쟁의 발단은 흐루쇼프의 충동적인 결정의 산물인 셈이다.

 

#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분쟁은 필연적이었다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고 러시아가 구소련의 권한과 법적 지위를 승계하면서 저지른 실수가 두 가지 있다. 첫째 크림반도를 되돌려 받지 않고 방치한 것, 둘째 핵무기를 즉각 회수하지 않은 것이다. 크림반도는 우크라이나가 독립할 당시 당연히 러시아가 회수했어야 했다. 핵무기의 소유권은 소비에트 연방의 법적 승계자가 러시아이기 때문에 우크라이나는 핵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었다.

서방 언론은 크림반도는 원래 우크라이나 것인데 러시아가 강제 병합한 것으로, 핵무기는 양보한 것처럼 호도하여 본질을 흐리고 있다. 명백한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여 우크라이나 사태를 바라보면 보다 객관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할 때는 크림반도가 안고 있는 분쟁의 요소가 드러나지 않았다.

분쟁이 표면으로 분출된 것은 2004년 이른바 오렌지 혁명으로 우크라이나 민족 분리주의자들이 전면에 등장하면서부터다. 2014년 3월 11일 대부분 러시아계로 구성된 크림 자치공화국이 우크라이나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자 러시아 연방 국가두마는 즉각 이를 승인하고 군대를 진주시켰다. 크림 공화국은 3월 16일, 주민투표를 하여 97%의 압도적 찬성으로 러시아와 병합을 결의하고 3월 18일 합병하였다.

 

 

# 크림병합의 직접적인 동기가 된 세바스토플

 

러시아가 크림반도 병합에 적극적으로 나선 배경은 우크라이나가 세바스토플 군사(해군)기지를 미국 지중해함대(제6함대)의 기항으로 제공하기로 함으로써 비롯되었다.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중대한 사태였다. 독소전쟁 당시 치열했던 세바스토플 전투는 독일군의 전면 공격에 맞서 러시아가 결사 항전한 10개월 동안(1941년 10월 30일~1942년 7월 4일)의 격렬한 공방전이다. 전황이 세바스토플 요새의 함락으로 기울면서 전투지휘부는 자폭하고 9만5천여 명의 사상자를 낸 끝에 러시아군은 전멸했다.

 

러시아로서는 도저히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처절한 항전이었다. 독일군의 피해도 막심하여 독일-루마니아군 13만 5000여 명이 죽거나 중상을 입었다. 세바스토플을 점령하여 카스피해 연안의 유전지대를 장악, 안정적인 석유공급라인을 구축하려던 독일의 계획은 러시아의 결사 항전으로 심각한 차질을 빚었다.

 

에르빈 롬멜이 지휘하는 독일의 북아프리카 전차군단이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이 이 이끄는 영국군에게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패퇴했다. 연료 보급이 차단된 결과였다. 몽고메리와 패튼 장군의 미영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했다. 연합군의 이탈리아 공격으로 나치독일의 서유럽 전선의 한 축이 무너지고 제2 전선이 구축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 우크라이나의 급격한 친미 노선에 대한 러시아의 대응

 

러시아의 크림병합은 친러파 야누코비치의 몰락이 확실시되고 유로마이단의 무장투쟁으로 우크라이나에 친미 정권의 등장이 기정사실로 된 가운데 벌어진 사건이다. 독소전쟁을 알지 못하면 크림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강경한 입장을 이해하지 못한다.

 

제4대 대통령에 친러파인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대선에서 경쟁자였던 율리아 티모셴코가 이에 불복하여 대항하다 투옥되었다. 야누코비치는 골수 친러 주의자로 서방에 배타적이었다. 그는 전임 정권에서 체결한 EU와의 경제협력 추진정책을 백지화하여 유로마이단(유럽연합을 지지하는 반정부시위 연합단체)의 유혈 봉기를 불사한 격렬한 투쟁을 자초했다. 야누코비치는 유로마이단의 무장봉기로 결국 축출되었다.

 

2014년 6월 조기 대선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페트로 프로센코는 친 서방주의자로 초콜릿을 비롯한 과자 산업으로 부를 쌓은 억만장자이다. 그는 급격하게 미국에 기울어진 골수 반러 정치인이다. 프로센코는 러시아를 노골적으로 배격하고 미국과 서방을 거의 맹목적으로 추종했다.

프로센코에 이어 2019년 5월 20일 우크라이나 제6대 대통령에 당선된 블라디미르 젤린스키는 전직 코미디언 출신의 정치인이다. 그는 ‘인민의 종’이라는 드라마에 출연, 대통령역을 맡아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고 내친김에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압도적인 득표로 당선되었다. 젤린스키 역시 친미, 친 유럽연합 노선을 고수했고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무리하게 추진했다.

 

젤린스키는 대통령 취임 이후 이렇다 할 지도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유럽연합과 나토 가입이 유일한 해결책으로 믿었다. 러시아로서는 우크라이나의 반러-친미 노선은 배신행위였다. 러시아는 소비에트 연방 해체 이후 우크라이나에 막대한 원조와 천연가스 반값 공급을 감당해왔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중립국 선언과 러시아계 밀집 지역인 돈바스 지역의 완전한 자치공화국 인정, 크림반도 거주 주민의 선택 존중(투표에 의한 러시아 귀속)을 요구해 왔다. 미국과 유럽연합을 지나치게 믿은 젤린스키는 러시아의 요구를 일축했다. 양측의 강경한 대립은 결국 전쟁으로 치달았다.

 

# 우크라이나 NATO 가입은 러시아의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여론이 대다수일 것이다. 당사자인 러시아에게 우크라이나 NATO 가입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NATO는 1949년 동서냉전이 본격화되자 미국 주도로 서유럽의 방어를 목적으로 결성된 국제 군사기구이다. NATO의 초대 사령관은 미국 34대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이다.

 

러시아는 이에 대항하여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결성했고 양대 군사기구는 동서냉전의 상징이었다. 양대 기구에 가입된 국가가 외부의 공격을 받으면 자동으로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되는 상황이었다. 동구권이 붕괴되고 바르샤바조약기구가 해체되었지만, 나토는 그대로 존속되었다. 이것이 군사적 불균형의 단초가 되었다. 헬무트 콜 독일 연방 총리는 고르바초프에게 통일을 용인해주면 나토를 탈퇴하고 미군의 철수를 요청하겠다고 약속했다.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나토를 탈퇴하는 것은 물론, 해체하겠다고 공언했다. 미국 조지 H 부시 행정부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도 나토의 해체를 약속했다(프레시안 정욱식 칼럼 참조).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고 미국의 단일한 지배체제가 구축되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미국과 유럽 주요국의 NATO 해체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오히려 가속화되었다.

 

나토를 해체하는 것은 미국의 핵심 전략산업인 전쟁 산업자본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공수표가 될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서방의 약속을 믿고 싶었던 고르바초프는 어리석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고르바초프가 그만큼 다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의 국제정세였다.

 

 

# 미국의 팽창야욕은 브레이크가 없다

 

미국의 군사적 팽창을 제어할 브레이크는 존재하지 않았다. 동유럽의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몰도바를 제외한 국가들이 NATO의 회원국이 되었다. 러시아는 하다못해 나토 가입 의사를 밝히기도 했으나 거부되는 수모마저 감수해야 하는 치욕을 겪었다.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이 허용되면 이것은 러시아의 무조건 항복과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것과도 같다. 미국이 우크라이나 방어를 명분으로 사드와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한다면 제2의 쿠바사태가 발발한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터키에 중거리 핵미사일을 배치하면서 촉발된 것이다. 흐루쇼프 서기장은 육군 원수에 2차대전 서부전선 미-영 연합군 총사령관과 초대 NATO 최고 지휘관을 역임한 노련한 아이젠하워에게는 강경하지만 형식적인 항의만 했다. 흐루쇼프는 1960년 35대 대통령 선거에서 경험이 부족한 존 F. 케네디가 당선되자 쿠바에 중거리 핵미사일을 배치하는 맞불 전략으로 응수했다.

 

케네디-존슨 행정부에서 국방성 장관을 지낸 로버트 맥나마라는 쿠바 미사일 위기는 3차 대전 직전 상황까지 갔었다고 회고했다. 케네디와 흐루쇼프는 핫라인을 통해 미-소 양국이 동시에 터키와 쿠바에서 핵미사일을 철거하는 것으로 가까스로 전쟁을 막아냈다. 우크라이나가 NATO에 가입하고 미국의 팽창전략이 지속되면 제3차 세계대전으로 연결된다. 전쟁 산업자본이 영원히 번창하기를 바라는 세력과 신냉전 시대의 도래를 열망하는 전쟁광들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본질을 모른다. 아니면 알면서도 진실을 외면하고 싶어 한다. 그들에게 전쟁은 오로지 돈벌이 수단일 뿐이다.

 

# 미국은 시작부터 전쟁국가였다

 

미국은 본질적으로 전쟁국가이다. 영국 식민지 시절부터 시작하여 1776년 독립선언 이후에도 인디언 토벌은 계속되었다. 인디언 토벌이 종료된 것은 1920년이다. 앵글로색슨족이 주류인 신대륙 이민자들은 원주민을 배척하고 멸절시키는 인디언 전쟁을 무려 265년 간 지속했다. 수백만의 원주민을 몰아내고 살해하면서 미합중국을 건설했다. 우생한 종에 의한 열등한 종의 멸절, 후일 나치 독일은 미국의 인디언 전쟁을 교범으로 삼아 유대인과 슬라브 민족, 장애인과 성 소수자,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반체제 지식인의 멸절을 정당화했다.

 

미국은 멕시코로부터 본토 면적의 40%를 빼앗거나 강제로 병합했다. 1904년 스페인과 전쟁을 벌여 쿠바와 카리브해 일대를 점령했다. 미국은 필리핀과 3년 전쟁 끝에 식민지로 삼았다. 필리핀 점령 전쟁에서 필리핀은 5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었다. 미국은 스페인이 영향력을 상실한 라틴 아메리카로 침탈의 발길을 돌렸다. 이른바 바나나 전쟁으로 불리는 미국 자본의 라틴 아메리카 유린은 1920년대에 시작되어 1세기가 지난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

 

# 1세기에 걸친 미국의 라틴 아메리카 유린

 

미국은 러시아 혁명의 여파로 라틴 아메리카에서 사회주의적 저항운동이 일어나자 철저하게 탄압했다. 1956년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가 이끄는 82명의 민족해방유격대가 멕시코를 출발, 쿠바에 상륙했다. 쿠바 동남부 시에라 마에스트라산맥에 거점을 둔 혁명군은 3년여에 걸친 게릴라전을 펼치며 바티스타 정부를 압박했다. 1959년 1월 8일 카스트로와 혁명군은 수도 아바나에 입성, 친미 괴뢰정권 바티스타 정권을 붕괴시켰다. 바티스타가 도주하고 피델 카스트로 정부(쿠바 공화국)가 수립되자 CIA는 정권 전복을 위한 카스트로 암살 공작을 줄기차게 597회나 벌였다. CIA의 카스트로 제거 공작은 모두 실패하였다.

 

미국은 이에 그치지 않고 1970년 직접선거에 의해 합법적으로 수립된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인 칠레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를 1973년 9월 11일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을 앞세운 군사 쿠데타로 전복시켰다. 아옌데는 대통령궁을 폭격하는 쿠데타군에 맞서 기관총을 들고 항전하다가 사살되었다. 이후 니카라과 엘살바도르 베네수엘라를 비롯한 남미 나라들의 좌파 정권을 쿠데타를 사주하여 전복시켰다. 오늘날 라틴 아메리카는 미국의 공작에도 불구하고 좌파 정권 수립이 대세가 되고 있다. 어느 대선 후보가 비판했던 해방신학과 종속이론은 미 제국주의의 라틴 아메리카 침탈의 당연하고 정당한 반동(Reaction)이며 필연적인 결과이다.

 

# 석유를 장악하기 위한 미국의 중동 전략

 

미국의 신제국주의 팽창전략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그리스 내전에 개입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미국은 1953년 8월 이란의 합법적인 총리 모하마드 모사데크를 축출했다. 미 CIA는 국왕 친위대를 주축으로 타격대를 조직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모사데크를 축출하고 팔레비 국왕의 친정체제로 바꾸었다. 이란의 정치체제는 입헌군주제에서 전제군주제로 시대를 역행했다.

 

미국이 영국과 합작하여 모사데크를 축출한 이유는 그가 영국이 지배하고 있던 석유산업을 국유화했다는 것이 동인(動因)이다. 모사데크를 축출한 후 이란의 석유는 미국과 영국이 나누어 가졌다. 모사데크는 이슬람 사회주의자로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은 중동지방의 석유를 장악하기 위한 수순(手順)이었다.

 

전제정치를 펼친 팔레비 국왕은 미국 일변도의 친미 정책으로 일관하다 1979년 4월 아야툴라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슬람 혁명으로 축출되어 해외로 도피했다. 이후 이란은 신정국가(神政國家)로 전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미국의 가혹한 이란 봉쇄정책은 이슬람 혁명 이후, 2022년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미국의 쿠데타를 사주한 정권 전복은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정권의 타도에 이어 파키스탄 줄피카르 알리 부토를 군부 쿠데타로 축출하고 처형되도록 방조했다. 줄피카르 알리 부토는 파키스탄 인민당을 창당한 아랍 세계로부터 존경받는 정치인이었다. 두 차례 파키스탄 총리를 지내고 2007년 12월 27일 암살된 베나지르 부토가 그의 딸이다.

 

미국은 군사 쿠데타를 사주하여 미국에 우호적이지 않은 제3세계와 개발도상국 정권을 전복시키는 방법으로 신제국주의 세계지배 목표를 달성했다. 전 세계에서 발생한 쿠데타의 배후는 대부분 미국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발생한 국제분쟁의 90%는 미국이 배후세력이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정세 인식이다.

 

# 프랑스-미국의 침략에 맞선 인도차이나 민족해방 30년 전쟁

 

인도차이나 전쟁은 무려 30년간 지속된 20세기 최장의 전쟁이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일본군이 동남아시아를 점령하자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 동남아시아를 일백 수십 년간 식민지로 지배해왔던 유럽의 열강은 패퇴하였다. 인도차이나반도의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를 지배했던 프랑스도 축출되었다. 프랑스는 1953년 인도차이나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다시 진출했다. 호치민을 중심으로 단결한 인도차이나 인민전선은 일본군이 물러가자 이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1954년 하노이 인근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과 호치민이 이끄는 인민전선 군대가 격돌했다. 결과는 프랑스의 무조건 항복이었다.

 

미국을 비롯한 프랑스-영국은 베트남을 북위 17도 선으로 잠정 분할하고 2년 후인 1956년 인도차이나의 독립을 인정한다는 제네바 협정(베트남 전쟁/영화 인도차이나 참조)에 서명하면서 1945년부터 10년간 벌어진 인도차이나 1차 전쟁은 종결되었다.

 

미국은 프랑스가 철수하자 1954년 응오딘지엠(고 딘 디엠)을 지원하여 남베트남 괴뢰정부를 수립했다. 남북 베트남 총선거로 새로운 베트남 유일 합법정부를 수립하겠다던 미국과 프랑스의 약속은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미국은 제네바 협정대로 1956년 남북 총선거가 시행되면 호치민이 80% 이상의 득표로 통일 베트남의 국가주석에 선출될 것으로 보았다. 뿐만 아니라 의회의 절대 다수의석을 호치민이 지도하는 인민전선이 석권할 것이라는 결과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다.

 

# 명분 없는 침략전쟁에서 패배한 미국

 

남북 총선거는 미국의 시나리오대로 무산되었고 남베트남에서는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결성되어 무력에 의한 통일을 목표로 게릴라전이 전개되었다. 베트남 내전이 본격화되자 미국은 초기에는 군사고문단 파견과 전쟁물자 지원 등 소극적인 개입을 펼쳤으나 민족해방전선의 승리가 굳어지자 1964년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직접적인 군사개입을 감행했다. 미국은 파병 규모를 대폭 늘려 54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고 한국도 3개 전투사단(육군 2, 해병대 1) 과 공병-의료부대를 파병했다.

 

베트남 괴뢰정권 수반으로 옹립되었던 응오딘지엠은 미국에 의해 용도 폐기되어 군사 쿠데타로 실각, 호송 중에 처참하게 처형되었다. 미국은 북베트남의 직접적 군사개입을 차단하기 위해 캄보디아, 라오스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을 단행했고 인도차이나 전역이 전쟁에 휩싸였다. 베트남 전쟁을 이끌었던 존슨 행정부가 물러나고 정부를 승계한 리처드 M 닉슨은 베트남 철군을 약속했다. 1972년 헨리 키신저와 레둑토가 주도한 파리협상에서 2년 후 미군이 전면 철수한다는데 양측은 합의했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길고도 길었던 인도차이나 30년 민족해방전쟁은 막을 내렸다.

 

세계 최고-최대의 군사 대국을 상대로 한 전면전에서 아시아의 후진 산업국이자 농업국인 베트남이 승리한 것이다. 베트남 전쟁, 정확하게 표현하면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의 인명 피해는 1천여만 명의 사상자와 5~6백여만 명의 실종자와 난민이 발생했다(로버트 맥나마라 회고록과 베트남 전쟁 다큐멘터리 참조).

 

# 68혁명의 도화선이 된 제국주의 침략전쟁

 

베트남 전쟁은 서유럽에서 68혁명이 일어나 전 세계로 전파되는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최초의 TV 전쟁이었던 인도차이나 전쟁은 미국의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본질을 생생하게 유럽의 가정에 전달하였고 반미, 반전, 반제국주의 사상은 물론 탈(脫)자본주의와 민족해방이론이 급속하게 전 세계에 퍼졌다.

 

미국도 반전 물결을 피할 수 없었다. 밥 딜런, 존 레넌 등 불멸의 뮤지션(musician) 들이 반전 대열에 가담했다. 68혁명은 인종차별정책을 철폐시키는 동력이 되었다.

 

68혁명은 미국의 고질적인 인종차별 장벽을 허무는 것을 최소한 수년 앞당겼고 지식인과 청년층은 자신의 조국이 정의롭지 않은 나라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68혁명은 아쉽게도 세계를 한 바퀴 돌고 일본까지 상륙했으나 대한해협(현해탄)은 건너지 못했다. 결과론적으로 68혁명의 물결이 한국에 상륙하지 못한 결과, 병영문화와 군사독재가 20년간 더 지속되었다.

 

# 중동으로 전쟁의 무대를 옮긴 미국

 

베트남 전쟁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미국은 전쟁전략을 수정한다. 고강도 전쟁을 회피하고 지역분쟁을 유발시키는 전략으로 수정한 미국의 다음 타겟은 중동이었다. 미국은 먼저 아프가니스탄을 목표로 했다. 당시 이슬람 사회주의를 내건 정치세력이 쿠데타로 아프가니스탄에서 집권하자 미국은 이에 반발하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무자헤딘)들을 규합,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아프가니스탄은 전면적인 내전에 돌입했다.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무자헤딘은 카불 정부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카불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소비에트 연방에 카불의 방위를 요청했다. 당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공산당 서기장은 중앙위원회에 파병 여부를 상정, 열띤 격론 끝에 참전을 결정한다. 카터 행정부 국가안보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이제 소비에트는 끝났다는 비밀보고서를 대통령과 연방의회에 제출했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의 장담대로 소비에트 연방은 아프간 전쟁의 수렁에 빠졌다. 아프간 전쟁은 결국 동서냉전에서 미국이 승리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폴란드계 유대인으로 그의 저서 ‘거대한 체스판’을 통해 미국의 유라시아 지배전략을 노골적으로 제시했다).

 

#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된 1차 이라크(걸프) 전쟁

 

무자헤딘은 탈레반 정권을 수립하였고 이후 미국과 20년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미국은 CIA를 앞세워 사담 후세인, 오사마 빈 라덴을 비롯한 이슬람 국가 장교와 전사들을 친미 진영으로 포섭했다. 사담 후세인은 이라크의 대통령이 되기까지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미국은 후세인을 사주하여 이란과 8년 전쟁을 벌이도록 공작했다. 미국 41대 대통령 조지 H 부시가 CIA 국장으로 재임할 당시 후세인을 포섭했고 레이건 행정부의 부통령이 되자 이란-이라크 전쟁을 벌이도록 사주했다. CIA에 의해 훈련되어 테러단체 알카에다의 수장이 된 오사마 빈 라덴은 아프간 전쟁에서 무자헤딘의 중심적인 지휘관으로 일관되게 친미 노선을 걸었다.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하자 오사마 빈 라덴은 자신과 알카에다 소행이었음을 스스로 밝혔다. 오사마 빈 라덴은 당일로 미국의 제거 대상 1호가 되었다.

 

사담 후세인은 이란과의 전쟁을 수행하면서 자신이 미국의 이용대상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미국의 지원으로 현대화된 군사력과 세계 2위의 매장량을 가진 석유 자원을 바탕으로 중동의 패자, 즉 아랍 이슬람권의 지도국가가 되고자 하였다. 1990년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에 이어 세계 3위의 석유매장량을 보유하고 있는 쿠웨이트에 진격, 전격적으로 접수한 사담 후세인은 미국이 군사력을 동원하여 반격하리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사우디와 쿠웨이트에서 생산되는 석유는 채굴과 유통을 장악하고 있는 석유메이저(미국 주도의 다국적 독점석유자본)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 사실상의 대주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은 즉각적으로 쿠웨이트를 원상회복 시킨다는 명분으로 UN을 앞세워 다국적군을 편성하였고 제1차 걸프전(이라크 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서방의 언론은 미국 국방성이 제공하는 이라크 공습화면을 게임을 즐기듯이 중계해야 했다. 군사 목표만 족집게 같이 가려내어 타격하는 미국의 정밀타격 능력에 전 세계가 경탄했고 게임을 하듯 전쟁을 즐겼다. 후일 밝혀진 사실이지만 미국의 신무기는 명중률이 그다지 높지 못했다. 미군의 오폭으로 집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라크 국민이 폭격의 직접 피해자가 되었다.

 

대대적인 융단폭격으로 미국이 보유하고 있던 전쟁 재고 물량을 거의 소진하고 나서야 미국은 지상군을 투입했다. 전쟁 쇼와도 같은 일방적인 진격이었고 싱거운 전투였다. 미국은 소기의 군사적 목표를 달성하자 일방적으로 종전을 선언했다. 사담 후세인은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것이 제1차 이라크 전쟁의 결과이다. 전쟁에도 불구하고 사담 후세인은 건재했고 미국의 군수 산업자본은 새로운 전쟁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내셔널지오그래픽 유튜브 방송 갈무리. 

 

# 9.11 테러가 명분이 된 미국의 전면적인 이라크 침공

 

2001년 뉴욕의 맨해튼 무역센터와 미 국방성 건물인 펜타곤이 공격을 받자 미국은 알카에다를 배후에서 사주한 것이 사담 후세인이라고 발표했다. 전 세계언론의 70%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유대계 언론은 이라크를 멸절의 대상으로 연일 선전 선동했다. 조지 W 부시, 미국 43대 대통령은 아버지 부시가 후세인을 제거하지 않은 것이 늘 불만스러웠다. 아들 부시는 이라크를 재차 침공하여 사담 후세인을 확실하게 제거하겠다는 전쟁 계획을 수립하고 이라크가 화학무기를 비롯한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UN의 사찰을 요구했다.

 

UN은 사찰단을 구성, 이라크 전역의 대량살상무기 은닉 의심 장소를 전방위적으로 사찰했다. CIA는 자체 조사로 9.11 테러와 이라크는 무관하다는 장문의 보고서를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부시 대통령은 보고서가 너무 길으니 A4 3페이지 분량으로 축약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축약된 보고서의 요지도 “이라크는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지 않고 있으며 사담 후세인은 알 카에다의 배후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부시는 CIA 보고서를 읽지도 않고 폐기했다.

 

방침은 이미 정해졌다. 무조건 이라크를 침공하기로 아들 부시 정권은 이미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딕 체니, 도널드 럼즈펠드, 폴 월포비츠, 존 볼턴 등 네오콘에 포위된 부시는 이라크 원유를 장악하기 위한 석유자본의 요구에 충실했다. 조지 부시는 2003년 3월 20일 공격 명령을 내렸다. 미군은 이라크를 전면적으로 침공했다. 전쟁 전, 미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요식행위인 UN의 이라크 제재 결의와 동맹국에 참전을 종용(사실상 강요)하는 과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영국은 참전하고 프랑스와 독일, 캐나다와 호주도 참전을 거부했다. 한국은 비전투 부대(자이툰 부대)에 국한했지만 병력을 파병했다(프레시안 정욱식 칼럼 참조/ 정욱식은 군사 전문 칼럼니스트로 객관적인 분석과 대안 제시로 정평이 났다).

 

미국은 후세인을 제거하고 2011년 12월 15일 종전을 선포했다. 이라크에는 친미 괴뢰정부가 들어섰다. 종전 이후 이라크에서는 본격적으로 추악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ISIS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수니파와 시아파의 내전으로 이라크는 복구 불능의 수준으로 초토화되었다. 아이러니한 역사적 진실은 ISIS의 수뇌부 대부분이 CIA에 의해 양성된 테러 분자였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이라크 2차 침공은 수백만의 사상자와 1500만 이상의 전쟁 난민이 발생하는 결과를 낳았다. 미국은 이라크에서 발을 빼고 2021년 20년간 전쟁을 벌여온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했다.

 

중동을 수십 년 동안 전쟁의 참화에 몰아넣었던 미국의 전쟁전략은 다른 타겟을 물색하게 된다. 그 1차적 목표가 중국이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인권 문제를 빌미로 중국에 가해진 압력은 무역전쟁의 범주를 벗어난 것이었다. 필자는 미국이 중국을 극도로 압박하는 배경에는 지난해 위구르 타림분지에서 발굴된 160억 톤에 달하는 양질의 석유매장량과 연계된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타림분지 일대는 얼마만큼의 석유가 매장되었는지는 추정 불가이다. 일부 외신에 의하면 향후 50년간 중국이 자급할 수 있는 석유가 매장되었을 것이라는 보도도 있다.

 

중국의 소수민족 억압을 빌미로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외교사절을 보내지 말라는 미국의 압력은 유일 패권국가를 지향하는 미국의 억지였다. 미국의 전방위적인 압력에도 불구하고 베이징 동계올림픽은 비교적 성공리에 막을 내렸다.

 

# 새로운 전쟁이 필요한 미국

 

미국은 새로운 전선이 필요했다.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을 국가 명운을 걸고 저지해야 했던 러시아는 아주 손쉬운(?) 타겟이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국경에 병력을 집결하면서 미국에게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포기시키고 중립국화하라는 시그널을 지속적으로 보냈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를 끝내 묵살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미국과 러시아의 무한 대립을 중재하기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동구권 붕괴 이후 미국은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 가능성을 내세워 나토를 효과적으로 지배해왔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해체되자 발칸의 종교-인종 전쟁에 나토의 직접 참전을 강요하여 관철했고, 유럽의 안보를 위해 NATO의 지속적인 유지가 필요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해 왔다. 미국의 군사력에 의존함으로써 영국, 프랑스, 독일은 군사비 지출을 동결하거나 감축할 수 있는 쏠쏠한 반대급부를 채길 수 있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러시아의 팽창전략을 억제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NATO를 반영구적인 볼모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UN의 실제 주인이 미국이듯이 NATO의 명실상부한 절대 지배자 역시 미국이다.

 

미국의 군사전략은 동시에 두 개의 전쟁을 수행할 수 있도록 수정되었다. 이러한 전략 변화는 중국-러시아와 동시에 전쟁을 수행할 수도 있다는 것을 대내외에 천명한 것이다. 미국은 신장 위구르 분리독립 추진과 대만을 활용하여 중국에 도발하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홍콩의 자유화 시위를 물밑에서 지원하는 전략은 중국 정부의 강력한 대응으로 일단 수면 아래로 잠복했다. 북한 핵을 활용한 한반도 긴장고조정책 유지도 중국을 봉쇄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다. 미국은 한국 차기 정부에 북핵을 이유로 더 많은 군사비 지출을 요구할 것이 틀림없다.

 

# 미국이 한반도 평화를 원한다고 믿은 것이 문 대통령의 착오였다

 

문재인 정부의 가장 큰 판단 착오는 북한과 미국을 중재하여 한반도 비핵화를 달성하고 평화 체제를 구축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미국은 내부적으로는 사실상 북핵을 묵인-방조하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의 주된 관심사는 북한의 핵기술과 핵물질이 제3국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북한 핵 문제를 적절하게 활용하여 한국과 일본을 3각 군사동맹의 고리에 묶어 놓고 필요할 경우 북핵을 이용, 동북아 정세를 일거에 긴장 상태에 빠트릴 수 있다는 점은 미국에게 정말 매력적인 카드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그의 외교-안보 참모들은 미국의 본질과 동북아시아 지배전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남북화해와 평화체제구축을 위한 문재인 대통령의 열정은 순수했지만 지나치게 순진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정부의 외교-안보 핵심 참모들 역시 태생적으로 친미적일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현실을 간과했다. 남북경제협력도 무산되고 전시작전권 회수도 사실상 물 건너갔다.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지극히 관념적인 친미로 무장한 외교-안보 초보 정치인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비록 0.73%의 근소한 표 차라고 해도 민주당은 패배했고 문재인 정부는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 세계평화는 미국이 패권 유지 정책을 포기해야 가능하다

 

미국이 패권 추구를 억제하고 정상적인 국가로 변모하지 않는 한 크고 작은 국제분쟁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더이상 세계의 경찰을 자임해서는 안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보여준 미국의 국가 정체성은 금융독점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전쟁 국가였다.

 

미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은 극소수 유대 금융자본이다. 이들은 1913년 연방준비제도(Fed)를 창설, 연방은행으로 위장한 민간은행을 설립했다. 록펠러, J.P 모건, 로스차일드 등 극소수의 유대계 가문으로 구성된 금융독점자본은 미국의 금융산업을 완벽하게 장악했다.

 

연방준비제도는 소유주인 유대 금융자본이 내세운 7명으로 구성된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에 의해 운영된다. 달러를 무제한 발권할 수 있는 권한을 이용하여 석유산업-전쟁산업-언론산업-IT산업-식량산업을 완벽하게 장악했고 연방정부를 충실한 대리인으로 만들었다. 미국 연방정부는 자본이 요구하면 전쟁도 불사한다. 자본에 이득이 되면 교육 법무 군사 등 전 분야를 민영화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미국은 1%를 위한 나라가 된 지 오래다. 문제는 이들의 이데올로기를 자유 수호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전 세계에 강요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국민의 80%가 미국을 지지하고 좋아한다는 여론조사도 있다. 정작 미국 시민들은 자신들의 체제에 심각하게 회의하고 더이상 조국이 자랑스럽지 않다고 여기며, 45% 이상이 근본적인 체제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한국의 지도층 인사(정확하게 말하면 지배층)들에게 미국은 신성불가침의 성역이다. 그들은 한미혈맹(韓美血盟)의 영원한 존속과 분단 이데올로기야말로 기득권 유지의 굳건한 토대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체득하고 있다.

 

한국은 사실상 미국의 준(準) 식민지나 다름없다. 전시 국군통수권은 한미연합군 최고 사령관인 미국 대통령이 행사한다. 한국 대통령이 할 수 있는 것은 직책을 걸고 전쟁에 반대하거나 동의하는 길밖에 없다. 통화량과 금리도 미국 연준의 정책 결정과 연동하여 결정해야 한다. 한국 기업에 미국이 경제제재를 가하는 나라와 교역하지 말라 명령하면 이를 따라야 한다. 문제는 미국의 이러한 압력이 국제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자국의 국내법에 의해 강제되고 있다는 점이다. 더 큰 문제는 역대 한국 정부는 미국의 요구에 알아서 굴복해왔다는 것이다.

 

미국과 포괄적인 동맹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치인들이 의외로 많다. 이는 나라의 주권을 송두리째 미국에 갖다 바치자는 것과도 같다. 한미동맹은 군사동맹 하나로 족하다. 미국의 51번째 주로 편입할 것이 아니라면 포괄적 동맹을 주장해서는 안된다. 1905년 을사늑약과 같은 불평등 강제조약이 21세기 한국에서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곤란하다.

 

한국 정부와 국민은 미국에게 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이 진정한 주권국가가 되려면 더 이상의 일방통행은 곤란하다고 미국 정부에 항변할 수 있어야 한다. 거듭 강조한다. 미국은 일방적인 패권주의를 포기해야 한다. 미국이 세계지배를 위한 패권을 포기하면 먼저 미국 시민이 더 좋은 나라, 풍요롭고 안전한 사회에서 살 수 있다. 미국 시민은 너무나 긴 세월을 미국은 기회의 땅이며 민주주의 수호 국가라는 이데올로기에 강요된 고단한 삶을 살아왔다. 1% 부자를 위한, 부자에 의한, 부자의 나라였다는 사실을 미국 시민은 코로나 펜더믹 사태를 계기로 절실하게 깨달았다.

 

미국은 즉각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를 전면적으로 해제하고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미국, 러시아, 우크라이나, EU 주요 국가는 철군 이후 전후처리 방안에 대해 진지하게 인도주의적으로 협상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 비극적인 전쟁을 멈출 수 있다. 전쟁이 길어지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국민의 극심한 고통만 가중될 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