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삼손이 헌헌장부의 때 다시 올 수 없는 아름다운 시절에는 델릴라에게 빠져 영안이 흐렸으며 눈을 떴을 땐 낙타 턱뼈로 삼천 명을 쳐 죽였으며 그가 눈을 감았을 땐 신전을 무너뜨려 그 안에 모든 사람을 깡그리 죽였다. 그는 행운아다. 눈이 멀어 괴물이 된 자신을 보지 못했으니까. 삼손을 신전에 묶지 않고 그냥 보내 줬더라면 모두가 살지 않았을까. 어둠을 많이 본 사람은 눈이 먼다<마6:22-23>. 삶이란 가끔이지만 살아온 순간들이 나를 정의할 때도 있다. 이 점이 인간이 종교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종교의 가르침은 삶에 대한 진지한 물음에서 시작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눅9:18>’는 예수의 돌연한 물음은 삶의 표층이 아닌 깊이다. 그 중심에 실천으로서의 기독교가 있다. 가장 으뜸가는 계명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예수는 이렇게 답한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막12:31>.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며<마5:39>,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에 나오는 말이다. 이 숨 막히고도 절대 불가능한 명제 앞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용인신문] 기원전 369년 전 일이다. 여러 날을 굶주린 장주가 위나라 문후文侯 감하후監河候를 찾아가 저간의 사정을 말하며 당장 먹을 끼니를 구걸했다. 이에 감하후는 그런 일은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며 문무백관들과 회의를 거친 후 백성들에게 세금을 공표해서 그때 걷어진 세금으로 300금씩이나 주겠다고 한다. 그때가 언제쯤 되냐고 되물으니 “아마도 올해 안에 이뤄지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장주 왈, 내가 감하후를 만나러 오는 길에 수레바퀴에 패여 생긴 웅덩이에 물고기가 있었다고 한다. 물이 점점 말라가자 물고기가 내게 도움을 청한다. “물이 말라 죽어가고 있으니, 물 좀 달라”고 해서 내가 동해에 가서 물을 잔뜩 퍼다가 주겠다 하니 물고기가 절규한다. “나는 당장 죽어가고 있습니다. 한 모금의 물만 필요합니다.”라고. 여기서 나온 고사가 학철부어涸轍鮒魚이다. 장자 외물 편에 나오는 말이다. 그로부터 2000년이 훨씬 지난 지금 나라 안 국민은 중국 우한발 코로나 19로 인해 그야말로 풍비박산 일로에 있다. 이에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에게 4인 가족 기준 100만 원씩 긴급재난지원금을 주겠다고 한다. 여기에 맞물려 치러진 게 4월 15일 21대 국
[용인신문] 초나라 임금은 어려서 형명학을 익힌 법가 출신 소왕召王인데 법에 밝기가 가차 없었다. 누구든지 법을 어기면 무덤까지 파내서 매질을 해서라도 벌을 준다. 그런 연유로 초나라에서는 감히 누구도 법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소왕의 아들 혜공惠公과 며느리 혜미비惠美妃와 사돈댁이 집을 짓는 재료인 목재와 땅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농간이 심했고, 그 이득이 상당했다. 그렇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뭔 배짱으로 토를 달랴마는 그저 속으로 분을 삼키는 게 백성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소왕의 법이 남에게는 가혹하고 철저했지만 정작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와 사돈댁에 대해서는 마피아 총대로 잰 고무줄 잣대였던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법을 쥔 자들의 문제는 남에게는 가혹한데 자신에게는 그렇지 않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래서 법가는 “정치를 하면 안된다.”는 범수의 말이 유효한지도 모른다. 진효공 영거량을 도와 진을 천하제국으로 이끈 위나라 출신 법가 상앙은 사지가 찢겨 죽었고 영거량의 4대손 진나라 시황제를 도와 천하통일을 일궈낸 이사는 저자거리에서 아들과 함께 허리가 잘려 죽는다. 그의 꿈은 갓 쉰나이인 오십 줄에 아들과 손자와 함께 누렁이 개 한 마
[용인신문] 왕이 말하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민유방본民惟邦本>, 먹는 것이 백성의 하늘이다<식위민천食爲民天>.” -중략- “만약에 한 명의 백성이라도 굶어 죽은 자가 있다면如有一民飢死者 감사監司나 수령守令이 모두 교서를 위반한 것으로써 죄를 논할 것이다竝以敎旨不從論.” 세종실록 3권 1419년 세종 1년 2월 12일 정해 4번째 기사다. 민유방본民惟邦本 식위민천食爲民天은 서경書經 출전인데 세종의 인용인 셈이다. 나라가 비록 수한풍박<水旱風雹 홍수, 가뭄, 폭풍, 우박>은 아니어도 코로나19로 인한 나라 안 서민의 경제는 그야말로 파탄일로다. 그 와중에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당선인들의 책임이 막중하다 하겠다. 국회의원이란 자리는 민의를 대변하는 자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간의 국회의원들은 물론 일부이겠지만 어떤 국회의원은 탄핵 대통령 박근혜를 구하지 못해 죄송하다며 눈물로 사죄하는가 하면 어떤 국회의원은 윤석열 검찰총장에게 충성(지키겠다며)하겠다며 혈서를 쓰기도 했다. 이를 지켜본 국민들의 시선은 경악, 그 자체다. 국민을 제대로 섬기지 못함을 죄송해야 하고 국민을 위해서 혈서를 써도
[용인신문] 논어論語 안연편顔淵篇에서 공자孔子는 자솔이정子帥以正 숙감부정孰敢不正이라 했다. “내가 먼저 바르게 행한다면 누가 감히 바르지 않겠는가”라는 말이다. 이 문장을 평생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던 이가 곡성현감을 지낸 김사원金士元이다. 그의 아들이 급汲인데 중용을 지은 공자의 손자 자사와 음이 같다 하여 당시 사대부 사이에서 꽤나 맘고생을 했던 이름이다. 왜냐면 성현의 이름은 후학이 함부로 따라 지으면 안 되는 기휘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곧 성현의 이름과 같은 음으로 이름을 지었다 가정할 때 그 아이가 자라서 성현처럼 훌륭한 인물이 못 된다면 되려 성현의 이름을 욕보이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감히 성현과 같은 이름을 짓는 무모한 모험을 하는 후학은 없는 것이다. 이를 모르지 않을 그가 아들이 이름을 공자의 손자와 같은 이름을 지었다는 것은 그 나름의 야망 이 있었던 것이다. 일종의 자식의 명운을 놓고 가문을 위한 도박을 한 셈이다. 종횡가의 비조라 불리는 귀곡자의 글에 보면 독특한 문장 하나가 나오는데 이대동자성현명二代同字聖賢名이면 지우삼대필현달至于三代必顯達이라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자식 대에 이르러<二代> 이름이 성현들과 같다면
[용인신문] 구경팔조九經八條라는 말이 있다. 대학의 팔조목과 중용中庸 20장의 정치를 묻는 애공哀公에게 공자가 제시한 구경九經, 곧 나라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벼리다. 그 벼리란 것이 치국의 요결로 수신修身·존현尊賢·친친親親·경대신敬大臣·체군신體群臣·자서민子庶民·내백공來百工·유원인柔遠人·회제후懷諸侯의 9경으로 대학의 8조목은 표가 되고, 중용의 구경은 리가 되어 표리치보表裏治寶라 불리는 서로 대구對句를 이루는 요결要訣이다. 경전주석사에서 대학 8조목은 진덕수眞德秀가 대학연의大學衍義라는 제하의 글에서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풀어놨다. 문제는 치국평천하의 조목을 밝히지 못하고 붓을 놓았다는 것. 이유가 무척이나 겸손했는데 “군주가 된 적이 없어서 신하가 어찌 감히 치국을 논하랴.”였다. 물론 이는 표면상의 이유이고…. 존 칼빈이 성경주석 전권을 토씨 하나도 안 빠트리고 주석을 달았는데 유독 요한계시록 3장까지만 풀고 책을 덮은 일과 유사하다. 존 칼빈은 자존심이 센 인물로 누구의 말도 안 듣고 나만 옳다는 인물인데 그런 그가 “요한계시록 3장 이후는 인간이 함부로 다룰 일이 아니다” 라며 주 달기를 멈췄을 때는 칼빈 만이 아는 감당할 수 없는 뭔가가 있었으리라.
[용인신문] 조朝 문도聞道 석사夕死 가의可矣. 논어 리인里仁편에 나오는 이 문장은 ‘아침에 집을 나서’ 도道를 들은 자는 ‘저녁에 돌아오다’ 죽어도 여한은 없다는 말이다. 공자는 일평생 네 가지를 실천하기 위해 애쓴 인물로 뜻은 도道에 두었으며 생활은 덕德으로 했으며, 신념은 인仁을 따르며 쉼은 예藝에서 취했다<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游於藝 논어述而>. 범부로 태어났지만 막살지 않기 위해 그만큼 몸부림 쳤다는 말이다. 세상은 이런 공자를 향해 성인聖人과 만세사표萬世師表. 이 두 가지를 합친 대성인지성선사大成人至聖先師라 불렀다. 오소야천吾少也賤으로 시작해서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에 이르도록 절차탁마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그야말로 道를 위해 일이관지一以貫之를 생활화했던 사내임에는 분명했다. “사람이 능히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은 아니다”라며 신과 인간을 명징하게 구분했던 철저한 인본주의자이다<人能弘道 非道弘人 논어衛靈公>. 그럼에도 그의 삶은 감히 ‘윗사람에게는’아첨함이 없었으며 ‘높은 자리에서 누군가를 족칠 때’고집함을 미워했다<非敢爲佞也 疾固也>고 논어헌문편 주자의 주는 전한다. 쉽게 말해서 높은 자리
[용인신문] 예배가 무너졌던 시대가 있었다. 일제치하의 신사참배가 그것이다. 뼈아픈 기억이 역사에 생생하거늘 이제는 코로나19로 인해서 또 한 번 예배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중국 무한<우한>발 코로나19를 대하는 문재인 정부의 초기대응은 적절했음에도 코로나19가 휘발성을 띠고 폭발적으로 일어난 데는 한국기독교회에서 이단으로 낙인 찍힌 대구 발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교회의 공헌이 지대했다. 저들은 사람과 사람사이에서는 은밀했고 정부에 대해서는 교활스럴 정도로 비협조적이었으며 세상에 대해서는 너무 거짓으로 똘똘 뭉쳤다. 이쯤에서 직격탄을 맞은 것이 정통 교단이라 말하는 한국기독교회다. 내막은 이렇다 ‘지금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모든 교회들은 주일 예배를 온라인으로 하자’. 누구 입에서 시작됐는지는 모르나 이 말을 쉽게 말하면 예배를 폐하자는 말이다. 교회에서 예배를 빼앗아가려는 사탄의 시도는 늘 있어 왔다. 그럴 때마다 한국기독교회는 금식 기도와 회개의 눈물로 예배하고 찬송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라”고 히브리서10:25절에 명토박아 있었기 때문이다. 신께 드려지는 예배는 타협이 아니다. 예배는 거룩함에서 드러나는
[용인신문] 역병(疫病) 코로나19의 창궐은 확진자가 7000명을 넘긴 시점에서 국민들에겐 분명 불안을 넘어선 충격과 공포 그 자체이다. 이쯤에서 대한민국 도시는 코로나19 창궐로 그 기능이 마비되어가고 있는 중이고, 모든 국민은 1회용 마스크 한 장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야말로 조선시대 사화(士禍)를 훨씬 능가하는 재앙(災殃)이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국제적으로는 천하의 모든 나라들로부터 봉쇄당하고 있는 중이다. 그 중심에 역병의 슈퍼전파자로 주목받고 있는 종교단체가 있으니 한국기독교단에서 이단으로 낙인찍힌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교회가 그들이다. 보도된 이만희 교주의 말을 빌면 금번 병마 사건은 신천지가 급성장함을 마귀가 보고 이를 저지하고자 일으킨 마귀 짓이라며 말씀과 믿음을 지키자 우리는 살아도 죽어도 하나님의 것이다<요 11:25-27>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한다. 또 보도에 따르면 전염병 방역이 심각 단계로 올라간 날 한기총 회장 전광훈 목사는 광화문 광장에서 신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코로나여 물러가라.” 저들의 뜨거운 믿음을 폄훼하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
[용인신문] 군주의 나라에서는 백성이 가난하거나 생활이 궁핍하거나 굶주리면 오롯이 군주의 책임이다. 군주가 무능하여 생긴 일이기 때문에 어떤 이유에서건 군주는 백성을 잘살게 해줘야 할 의무와 권리가 있는 것이다. 기원전 209년 쯤 머슴을 살던 어떤 사내가 느닷없이 서너 개월 동안 왕 노릇 하다가 목이 잘려 죽어나간 일이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가 왕이 됐는지 뭘했는지 까지는 알지는 못해도 그가 했다는 말 쯤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사즉거대명이死卽擧大名耳’가 그것이다. 풀어보면 죽을 때 죽을 망정 이름 정도는 크게 떨쳐야 되지 않으랴. 그러면서 천고의 경책을 남겼는데 왕후장상영유종호王侯將相寧有種乎가 그것이다. 말인즉 “왕후장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으랴.”라며 목에 핏대를 세우고 눈알을 부라리며 외치는 중국 최초의 농민반란군 진승陳勝의 절규에 900여 명의 오합지졸 무지렁이 농민 반란군들은 분기탱천하여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다<사기 진섭세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처자식이 굶어 죽어 나가는데 눈알이 뒤집히지 않을 아비가 어디 있겠는가. 군주의 나라에서도 백성의 가난에 대해서 만큼은 이렇게 책임을 지거늘 천지개명한 이 시대에 국민이 선출한 민선투표의
[용인신문] 맹자 양혜 왕 장구하편에 “우리 임금님은 음악을 좋아 한다면서 어찌해 백성을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는가?”라는 아찔한 기록이 나온다. 고대시대에 있어서 지도자가 음악을 듣는다함은 음악을 통해서 조화로움을 배우기 위함이요, 그 조화로움은 백성들의 삶에 지위고하를 무론하고 모자람도 더함도 없는 고른 은덕을 끼치기 위함이다. 곧 시대정신이 요구하는 심층적 검증을 거친 자만이 백성을 이끌어갈 위치에 있어야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말을 더 쉽게 풀어쓴다면 세종대왕의 국리민복(國利民福) 제 1항인 ‘백성에게는 밥이 하늘이고, 임금에게는 백성이 하늘이다'라는 말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는 곧 윗사람 아랫사람 서로 뜯어가려는 상하교정(上下交征)이 아닌 함께 즐기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이다. 세종대왕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여민가의(與民可矣)를 말하면서 백성을 위함에 삼민(三民)을 말했는데 여민(與民) 위민(爲民) 애민(愛民)이다<세종실록 재위12년 12월20일>. 여민이 됐건 위민이 됐건 애민이 됐건 자구의 해석은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방점은 백성들을 잘 먹고 잘 살게 함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왕께서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 하신다면 정
[용인신문] 계강자가 공자에게 정치를 물으니 공자가 “정치라는 것은 바로잡는다는 것이다. 높은 자리에 있는 너만이라도 바르게 살면서 이끈다면 어떤 백성인들 감히 바르게 되지 않겠는가.” 고 말했다. 논어 안연 편 17문장에 나오는 말이다. 그러자 19문장에서 계강자가 또 묻는다. “만약에 무도한 자를 죽여서 도를 실천하는 건 어떻습니까?” 공자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그를 보면서 말한다. “정치를 한다면서 왜 살인을 말하는가?” 이 문장의 방점은 18문장에 있다. 정치한다고 나대는 너만 바르면 백성들은 도둑질을 하라고 고사를 지내도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는다는 말로, 정치하는 자들만 바르게 산다면 백성들은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바루어진다는 말이다. 다산은 이를 이렇게 풀었다. 정치는<政也者> 바름이고<正也> 백성을 균등히 잘살게 하는 것<均吾民也>. 여유당전서 원정原政에 나오는 말이다. 그래서 정치인은 늘 자기 개혁이 요구되는 것이다. 개는 자기<己>를 쳐서<攵> 고치는<改> 것이고, 혁革은 개가죽을 벗겨 뒤집는 것이다. 그만큼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본래 政이라는 피정의항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