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박완호
어둠이 닳아서 새하얀 빛이 될 때까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절망의
투명한 그물이 촘촘하게 날 에워쌀 때까지
시를 쓰다가
시가 되지 않는 말들과 함께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어느 먼 곳을 꿈꾸는 시간
닳다 만 어둠 같은,
더는 깊어지지 않는 절망 같은,
꽃 피지 않을 생각이
되지도 않게 시가 되려는 것을
가까스로 막아가며 어떻게든
어둠이 다 닳을 때까지
절망이 더는 깊어지지 않을
바닥에 누울 때까지
어떤 꿈도 더는 나를 가두지 못할
눈물의 바탕에 기어이 다다를 때까지
단 하나, 시인이라는
휑하니 빛나는 이름을 갖게 될 때까지
그것마저 죄다 떨쳐낼 때까지
안간힘을 다해 버텨보려는 것
약력: 충북 진천 출생. 1991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시집 『나무의 발성법』 외 다수. 김춘수시문학상, 한유성문학상, 경희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