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축축해 김수복 하루 한번은 눈물이 난다 잘 모르지만 슬퍼진다 그럴 때 마다 뭔가 채우려 초라해지는 쓸쓸함이 안겨온다 문득 젖을때마다 물이 떨어지던 축축한 내 신발을 바라본다 행복하려 노력하면 마음이 먼저 울던 그런 날이 떠오른다 한 숨이 새오나오는 삶 무지개 빛 희망을 꿈꾸던 삶 참 삶 축축하다 - 장애인 평생교육시설 '가온누리평생학교' 학습자
은행나무길 박상돈 허기져 배고프면 눈 앞이 노래지듯 반 십리 은행나무길 하염없이 걷다보니 문득 그대 보고파 샛노래지는 이 마음 가도 가도 끝이없을 아 찬란한 황금빛 그리움의 길 약력: 전 용인시문화복지국장 경기도기술학교장 현 대한노인회 처인구지회 노인문학회장
꽃이 핀 밤나무 홍재석 그대 귀가 있던 자리에 낙엽지는 걸 본다 그 낙엽 시들 지 않아 칼날같은 한철 끝나지 않는다 꽃 같은 그대의 귀 를 베고 간 칼날, 그 칼날 몸속에 흐르므로 그대는 지금 낙엽으로 붉게 젖은 자리를 지난다 식지 않은 낙엽을 밟 으며 그대는 그대를 꽃 피게 한 사랑을 미워한다 그대는 꽃이 났던 자리가 아프고 그 자리에 다시는 꽃눈 맺지 않 을 거라 생각한다 허나 그대는 스스로 비명을 듣지 못하 므로 아프지 않기로 한다 몸속에 흐르는 칼날이 소용돌이 치는 날, 피지 않는 꽃과 시들지 않는 낙엽 사이에서 그대 는 봄날처럼 미쳐버리고, 봄날은 찾아오지 않고, 그대의 절망 새싹처럼 깨어있다 뭇엇도 잠들지 않는 폐허, 같은 그대의 화원 그대는 거기서 푸른 새싹과 뜨거운 낙엽으로 나를 그린다 지금 나는 그대의 척추 같은 나무가 된다 그 러니 그대는 그대 사랑했던 자리마다 나를 세워두도록 한 다 그리고 시월의 밤나무가 그러하듯이 그대가 흘린 뜨거 운 낙엽 책임지지 않도록 한다 이듬해 봄이 다 오도록 굳 지 않고 맥박치는 낙엽이 있거든 나 또한 잠들지 않고 미 쳐버리면 된다 미쳐서 나의 가지는 스스로를 벨 칼날이 되고 그 베인 끝자락마다 아프다는 소리
나는 행복한 사람 장진수 노래자랑에 참가해서 나는 행복한 사람을 불렀어요. 비에 젖은 무대엔 경사로가 없었죠. 무릎으로 경사로를 만들었더니 바지가 다 젖었어요. 관객들이 박수로 격려해 주었어요. 나는 행복해지려 열창했어요. 젖은 청바지는 빨아서 말렸지만 젖은 무릎은 생채기로 남았어요. 장진수 장애인 평생교육시설 '가온누리평생학교' 학습자 뇌병변, 지적장애
철구소 다슬기 권지영 짙은 무더위에 익숙해졌지만 늦은 때란 없는지 배내골 철구소로 피서를 갔어. 너럭바위에 짐을 놓고 앉으려는데 빗방울이 소리 없이 떨어지기 시작했어. 물 위로 둥근 무늬가 번질 때마다 흰 나비가 팔랑거려. 빗방울이 그리는 무늬마다 빛이 퍼졌어. 수많은 둥근 반짝임이 물 위에서 연주를 하듯 퍼져 나갔어. 계곡 아래로 푸른 수초들을 건드리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며 밀려갔어. 바위 아래 물속에서 다슬기들이 올려다보고 있었지. 권지영 시인 2015 《리토피아》 신인상, 저서 『아름다워서 슬픈 말들』 『누군가 두고 간 슬픔』 『푸른 잎 그늘』 『천개의 생각 만개의 마음;그리고 당신』등.
엄지의 유영 김선수 거리에서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은 대부분 무언가를 귀에 꽂고 있어요 달팽이가 여린 몸을 동그랗게 말고 제 집으로 들어가 다리를 뻗듯 엄지를 닮은 이어폰을 귓바퀴 속으로 밀어 넣고 듣고 싶은 소리를 고르네요 노이즈캔슬링은 참 편리해요 소란스러운 세상을 피해 나만의 바다가 생기거든요 바람이 내는 소리 풀잎에서 이슬이 떨어지는 소리 다정한 음성 절박한 비명 따위는 들리지 않아요 아무래도 뇌가 점점 작아지는 중입니다 이어서 심장도 쪼그라들고 세상도 엄지만큼 작아지는 중 같습니다 살아가는 일이 크게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밤이면 케이스에 들어가 금속의 점들과 접선을 하고 딸깍, 뚜껑을 닫고 나서야 안도의 잠을 충전합니다 아침이면 배꼽에 탯줄을 연결하듯 어머니 뱃속을 유영하러 다시 길을 나서겠지요 내일은 귀를 기울여 살면서 놓친 소리를 찾아내면 좋겠습니다 김선수 약력 <문파문학>시 등단(2021) 용인문인협회 회원. 문파문학회 회원. 아주문학 동인. 한국여행작가협회 회원 브런치 작가
노란 외로움을 끓여 먹는다 공다원 한밤 주방 서랍을 뒤진다. 요행이 하나 남은 라면이 반갑다. 그것을 끓여 냄비째 서서 후루룩 먹는다. 긴 면발을 타고 한참 먼 기억 속으로 들어간다. 엄마가 쥐어준 17원 단걸음에 색도 고운 라면 한 봉지를 사 온다. 일곱 식구 먹을 라면을 못 사고 언니, 오빠 학교 간 틈타 엄마는 노란 냄비를 화로에 올려 보글보글 노란 라면 을 끓여주셨다. 약력 단국대학교 일반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현재 용인중앙IL, 가온누리평생학교 대표 대표저서 2014년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 <기울지 않는 조각배>
흔들리다 스며들다 최정용 스며든 게다, 우리는 돌이키면, 몇 번의 조우(遭遇)도 조심스레 피하며 서로의 마음 다듬었던 게다 서둘러 상처 되지 않도록, 상처주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던 게다 옹이며 거친 결, 녹이고 다듬어 눈 쌓인 새벽 길 순결한 첫 걸음, 그 마음 보듬어 흔들며 흔들리며 다가선 게다 하여, 운명의 순간 봇물로 하나 된 게다 푸른 하늘이 붉은 대지 만나 사랑의 사막에 꽃이 피고 마침내 푸른, 사랑의 정원 빛 고운 떨림으로 우주에 번져 저물지 않는 이름으로 지지 않는 그리움으로 처음 온 곳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스며드는 게다, 우리는 -. 강원도 속초시 청학동 출생 -. 2014년 서정시학 신인상 -. 경기신문 지역사회부 용인담당 국장
압화壓花 류미월 사선으로 내리꽂히는 햇살은 슬프도록 눈부셔라 끝났나 싶으면 다시 시작되는 미로 모퉁이에선 시궁창 냄새가 나고 우당탕 가파른 절벽에서 무작정 뛰어내리는 폭포수처럼 기우뚱 닳은 구두를 꺾어 신고 여기까지 왔네 여기 섰네 암몬조개처럼 무겁게 닫힌 입 막다른 코너에 쏠리듯 여기 섰네 약력 2008년 <창작수필> 등단 2014년 <월간문학> 등단.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운영위원. 농촌여성신문 객원기자. 용인문인협회 수필분과장 시집 『나무와 사람 』, 산문집 『달빛, 소리를 훔치다』. 가람시조문학신인상 수상
꽃 진 자리 함동수 봄밤의 가로수를 보니 화사한 꽃잎은 간데없이 꽃 진 자리만 푸르르 날리는데 꽃 진 자리도 저리 애절한데 사람이 진 자리라 생각하니 아득하다 끝도 없이 꽃이 피고 꽃이 지면 너도 나도 언젠간 소리 없이 지는 법 괜스레 꽃 진자리 서성이지 말자 오늘은 그저 화사한 봄밤이니까 함동수 약력 강원 홍천에서 태어나 <문학과 의식>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하루사는 법』, 『은이골에 숨다』,산문집 『꿈꾸는 시인』,연구서 『송은 유완희시인의 문학세계』를 펴냈다. 제9대 용인문협 지부장 역임. 2019년 용인문화상을 수상했다.
둘레길을 걷다 김옥남 겨우내 봄을 기다리며 얼었다 녹았다 하던 물의 언어가 눈부시게 훤하다 고개 내민 냉이와 이름 모를 풀잎들 봄의 향기를 내뿜는다 발걸음 맞추며 둘레길을 걷는다 봄볕에 밝아지는 모습도 잠시 이야기 속에 온갖 걱정으로 깊어지는 주름 고통으로 다가오는 육신의 삐걱거림 호수 수면에 내려앉은 청둥오리 보란 듯이 목청껏 노래하며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깍지 낀 우리의 두 손 햇살 흐르는 호숫가를 걷는다 김옥남 약력 2010년 계간⟪문파⟫시로 등단 시계문학회 회장역임.한국문인협회 저작권 옹호위원. 한국문인협회 용인지부 부회장 시집:⟪그리움 한잔⟫
껍데기論 김호삼 우리는 모두 버려진 껍데기 자꾸만 치받는 속 끝까지 감싸 안는 껍데기 껍데기 없는 속 있을까 조개껍데기 없는 진주 있을까 태양을 출산하는 동녘 세상의 어미는 저처럼 피 흘리고 모든 목숨은 함부로 찢긴 태반에서 잉태되는 것 하늘의 허물은 구름 구름은 비가 되고 눈이 되고 그것 먹고사는 우리는 꽃이고 나무고 우리는 함부로 버려진 껍데기 자식 가진 것 다 내어주고 텅 빈 저 쭉정이 정읍 칠보 출생. 방송통신대 국문과 졸업. 『월간 문학』으로 등단. 시집 『남몰래 가슴에 새겨진 비문』 『즐거운 이별』 『999』(2024, 별꽃)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