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노무현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었다. 설왕설래 말들도 많았지만 어찌했든 노 대통령은 길을 넘었다. 1990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장면과는 사뭇 다르지만 군사분계선은 보이지 않는 벽이었기에 그날 노 대통령은 남북 민족을 가르는 벽을 허문거다. 많은 사람들이 그 장면을 보면서 가슴 뭉클해 하고 감격했다. 군사분계선에는 물리적으로 아무것도 가로막혀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노 대통령도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반세기동안 민족을 갈라오던 벽을 허무는 거라고 말했다. 길을 열었다. 남북이 협력하고 공동 번영하고 더 나아가 통일을 할 수 있는 전초가 되는 길을 연 것이다. 그 길을 노 대통령이 넘었지만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걸어서 넘나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으면 걷기 편하고 정겨운 길이 된다. 이념이 달라서 같은 핏줄임에도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천형이다. 어찌 이보다 가혹한 벌이 있을 수 있는가. 부모 자식이 서로 떨어져 지척에 두고도 만나지 못하는 형벌.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친 벽 속에 갇혀 문을 겹겹이 닫아 걸고, 문마저 없애버렸으니 안타까운 역사다. 우리는 역사를 보면서 느끼고
제12회 부산국제영화제(PIFF)가 지난 4일부터 12일까지 일정으로 화려하게 진행됐다. 올해는 64개국 275편의 영화가 부산 앞바다에 돛을 폈다. 영화제가 열리는 10월은 영화에 환장한 씨네필이든 그저 가을바다가 보고픈 청춘이든, 누구나 가릴 것 없이 부산을 찾는다. 12회를 맞은 영화제는 국제 적인 명성을 얻으며 서비스업 이외의 이렇다할 핵심 산업이 없던 부산을 최고의 국제문화 도시로 탈바꿈 시켰다. △아시아 영화의 중심 부산. 부산국제영화제는 지난 1996년 9월 13일. 아시아 최고의 영화제를 목표로 화려하게 출발했다. 1회 대회에는 29개국 170여편의 영화들이 수영만 야외상영관과 남포동 극장가를 누볐고, 27개국 224명의 초청인사들이 부산으로 입성했다.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는 한국에서 열리는 첫 번째 국제영화제로서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작품들을 엄선하여 동적인 영화관람의 형태에서 벗어나 적극적이고 참여하는 영상문화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1회 대회 이후 PIFF가 아시아 최대의 영화축제로 자리잡으면서, 이번 12회 영화제에도 많은 영화들이 부산에서 처음 관객과 만났다. 275편의 영화 가운데 66편이 월드 프리미
용인시 기흥구 신갈저수지. 이곳은 용인시가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기흥호수공원 사업을 추진 중인 곳이다. 그러나 지난 여름 신갈저수지는 극심한 오염 상태를 드러내며 급기야 인근 주민들이 고통을 호소하며 관계기관에 정확한 원인 분석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극심한 악취, 고통 받는 주민들, 과연 오염의 원인은 무엇이며 책이은 누구에게 있는가! △극심한 오염 지난 8월 말 신갈저수지는 심각한 녹조현상과 수면위에 떠있는 부유물질이 썩어 심각한 오염상태를 적나하게 드러냈다. 주변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심각한 악취는 지난해부터 조금씩 나기 시작, 올 6월부터는 생활하기 조차 힘들 정도로 심각해 졌다. 지독한 악취는 급기야 저수지가 자리한 기흥구 하갈동 뿐 아니라 상갈동과 영덕동 일대를 뒤 덮었다. 20분 남짓 저수지 인근에서 서 있기 조차 힘에 겨운 상황. 머리에 어지러움이 느껴지고 구토가 날 정도였다. 수면위 썩은 부유물질은 저수지 어느 한 곳이 아니라 전체를 뒤덮고 있으며 더운 날씨에 생긴 녹조 현상이라 보기엔 그 심각성이 눈으로도 확인 될 정도. 저수지 입구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김진태(52`남)씨는 “심한 악취로 낚시꾼들의 발길이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그런데 한 길만 50년을 걸어온 사람이 있다. 강산이 변해도 몇 번은 변했을 시간동안 맞춤복 만들기에만 전념한 김종학 씨(63). 평생직장이라는 말이 옛 말이 된 요즘엔 만나기 어려운 얘기다. 처인구청 건너편에서 시장 쪽으로 걷다보면 만날 수 있는 ‘문화라사’. 크지 않은 점포라 관심이 없으면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곳이지만 김종학 씨는 이 자리에서만 30년째 일하고 있다. “저쪽 백암에서 65년에 처음 양장점 개업을 했었고, 그곳에서 2년 일하다가 군대를 다녀온 뒤엔 70년에 용인시장 안에서 가게를 열었어요. 76년에 현 시장약국 자리로 옮겼는데 78년에 지금 이 자리로 옮겨서 계속하고 있어요. 용인에서만 40년 맞춤복을 하고 있는 셈이죠.” 1945년 해방둥이로 용인 김량장동에서 태어났다는 그는 군대 3년과 기술연마를 위해 객지에 있던 시간을 제외하고는 줄곧 용인에서 살았다고 했다. 그가 옷을 맞추는 일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4살 때였다. 50년 전이다. 용인에서 대흥라사를 운영하던 소진흥 씨를 은사로 재단을 배우기 시작해 16살에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서울로 상경했다. 야학도 다녀봤지만 공
대통합 민주신당과 민주당의 후보경선,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선대위 구성 등 전국이 본격적인 대선구도로 접어든 가운데 내년도 총선을 바라보는 정객들의 움직임도 가속화되고 있다. 용인시의 경우 내년도 최소 1개 이상의 선거구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돼 정객들의 움직임은 더욱 분주한 분위기다. 특히 아파트 밀집지역인 수지와 기흥지역의 경우 한나라당이 다른 정당에 비해 월등히 우세한 것으로 알려진 탓에 많은 후보들이 자천타천으로 물망에 오르고 있어 본선보다 힘든 공천싸움이 될 전망이다. 또한 뚜렷한 지역 색을 갖고 있는 처인구는 재기를 노리는 기존 정객들과 젊은층의 신흥 정객들이 출마를 준비하고 있어 치열한 공천 쟁탈전을 펼칠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하지만 후보선출을 놓고 난항을 겪고 있는 대통합 민주신당과 민주당 등 범여권 세력은 몇몇 인사를 제외하고는 크게 가시화되지 않는 분위기다. 결국, 경선결과와 후보 단일화, 대선 결과 등을 보고 난 후 정객들이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현재까지 거론되는 출마예상자는 처인구 9~10명, 기흥구 8~9명, 수지구 9~10명 등 30여명이다. 일찌감치 각 정당의 후보라인에 줄을 선 정객들은
용인하면 개발도시라는 말이 떠오르는 시대다. 하지만 해주오씨 호군공파의 세거지가 자리 잡은 원삼면 죽능리 일원은 산위에 우뚝 솟은 송전탑을 제외한다면 그 옛날 시골의 정취가 가득한 곳이다. 조상들의 묘역이 있는 마을 이름도 승죽, 능말마을(산소골), 진밭골(중머루), 어현마을이라는 옛 이름들이 남아있다. 승죽에는 호군공선생이 모셔져 있으며, 능말마을에는 호군공선생의 아들, 손, 증손, 고손까지 모셔져 있다. 그리고 진밭골(중머루)와 학일리와 목신리 일대에도 묘역이 산재해 있다. 새롭게 한옥으로 예쁘고 단아하게 단장된 집에서 호군공선생의 유지를 받들며 호군공파 종중일에 누구보다도 앞장서고 있는 해주오씨 호군공파 오민근 고문을 만났다. 오고문은 지난 10여년을 종중의 호군공파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회장일을 보아 왔다. 지금은 오시준(吳時準)회장과 더불어 선조님들을 위한 숭조정신(崇祖精神)을 실천하고 있다. 해주오씨 호군공파는 현재 오시준(吳時準) 회장을 비롯 수환(壽煥) 민근(敏根)씨가 부회장을, 총무에는 주환(柱煥)씨가 맡고 있다. 또 재무에는 덕근(德根)씨, 서무에는 용근(龍根)씨, 그리고 영근(榮根)씨와 호근(浩根)씨가 감사를 맡
해주오씨(海州吳氏)는 고려 말에 원삼면 지역에 입향한 이래 주로 학일리와 죽릉리 일대에서 세거해 왔으며 원삼일대에서 가장 유력한 세력을 유지해온 가문이다. 해주오씨들이 원삼면지역에서 터를 잡기 시작한 때는 8세손인 오희보(吳希保; 1360~1426)로부터 유래한다. 희보는 고려 말에 용양시위사(龍侍衛司左領護軍)를 지냈으며, 말년에 원삼면 일대에 정착하여 많은 후손을 남겼다. 희보 이후에 해주오씨 후손들이 원삼면 죽능리를 중심으로 목신리, 학일리 등지에 세거하였다. 이들이 바로 해주오씨 호군공파 후손들이다. 이들 후손은 더욱 번창하여 13세손인 희문(希文)에 이르러서는 모현의 처가 쪽으로 이거하여 그 후손들이 오산리 일대에 세거하면서 동족촌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경기도지』의 기록에 의하면 해주오씨들이 원삼지역에 세거하게 된 시기는 550여 년 전이며, 160여 세대의 후손들이 거주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급속한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상당수의 후손들이 타지로 이거한 상태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200여호에 600여명이 거주하고 있어 가문의 성세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해주오씨의 성세를 말해주는 선현들의 묘역 원삼면
“낮아져야죠.” 1300년의 전통을 간직한 용덕사 주지로 있는 성효 스님(용인시사암연합회장)이 던진 첫 마디는 낮아짐이었다. 낮아짐! 낮아진다는 것은 탐욕과 오만으로 병들어 있는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화두다. # 고즈넉한 산사의 주인 용인 이동면 성륜산에 위치한 용덕사. 산 아래를 굽어보면 탁 트인 시야 속으로 푸른 하늘과 겹겹의 산들이 구름처럼 흘러가고 일순간 모든 번뇌 망상이 사라진다. 성효 스님은 고즈넉한 산사에서 세상 아래를 내려다 본다. 높은 경지에 있기에 더욱 낮아질 수 있는 세상의 진리. 성효 스님은 늘 낮은 곳으로 임한다. 성큼 속세로 내려와 활발한 사회 활동과 불교의 진리전파를 통해 세상을 상생과 조화의 터전으로 바꿔 나가고 있다. 1998년 이곳 용덕사 주지로 취임한 그는 중앙 조계종단의 일은 물론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다양한 활동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용인사암연합회장을 비롯 용인경찰서 인권위원, 경기경찰청 경승위원으로 포교활동을 통해 불교의 위상을 정립하는 것은 물론 재소자 교화 등 아픔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아픔을 덜어준다. “이동면에 공간을 마련하고 여성 재소자의 아이들을 돌봐오고 있어
# 임금님을 기다리는 그리움 옛날 어느 한적한 시골에 꽃과, 새와, 사슴만이 지내는 곳에 소하라는 소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풀 한포기를 친구로 삼고 자연적으로 산하를 돌아 댕길 때, 소하는 그곳을 지나는 임금님의 행차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행차를 이끄는 나리의 눈에 또 하나의 자연을 발견하고는 임금님 앞에 내세웠습니다. 소녀의 천진스런 자연스러움이 두려움으로 심장을 쥐어박았습니다. 무너지는 듯한 심장을 잘 달래여 임금님 앞으로 나아가 인사하게 되었습니다. 만인의 대표인 임금님도 그렇게 돋보이는 모습을 지금껏 본 기억이 없었던 것 이었습니다. 때마침 바람을 타고 온 순수한 소녀의 냄새에 임금님은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다가 나갔습니다. 봉긋한 소녀의 터져 버릴 것만 같은 신비의 신선함, 익어 오른 자태의 복숭아색 고운 살결, 우주의 탄생을 알리려 하는 듯한 수줍으면서도 초롱초롱한 까만 눈, 하늘을 안고 있는 소녀의 자태에 임금님은 한눈에 반해 신하를 시켜 그를 궁궐로 데려오도록 하였습니다. 지금은 남쪽으로 공무집행차 행차를 하니 돌아갈 때 데려가도록 하겠노라 하시며 약속하고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신기한 듯 그의 뺨을 어루만지고 돌아섰
안개처럼 떠다니던 삶이 가벼워 그들은 항상 술을 퍼마셨고, 가끔은 안개가 범람하는 김량천에 몸을 던졌다 안개를 몰고 다니던 신작로 가로등도 허기를 태워 불을 켜고 있는지 포장마차에서는 누구나 안개를 그냥 술처럼 마신다 흔들리는 불빛에 만취한 노래는 안개가 쌓인 둑방을 넘지 못해 김량천 너른 변에 서서 오줌을 갈긴다 일렬횡대로 웅크린 포장마차 불빛들은 안개의 생살을 찢고 나와 꽃상여처럼 두둥실 이따금 구겨진 담배꽁초들이 술 취한 언어와 함께 안개 속에 버려지고 그중 몇 놈은 욕설과 멱살잡이를 또 다른 몇 놈은 집어등(集魚燈) 같은 불빛을 따라 김량천 안개에 속살까지 흠뻑 적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