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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큐멘터리 처음에 우리나라 제작진이 칠지도를 보기 위하여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예를 갖추게 하는 모습이 비쳤다.
일본 사람들의 문화재에 대한 태도와 우리들은 어떻게 문화재를 관리하고 관람했는가를 돌아다 볼 수는 좋은 기회였다. 편집자도 그런 의도에서 내보인 것 같다.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은 일본 최고(最古)의 신사(神社) 가운데 하나이다. 나라현 천리시(天理市) 호우류조(布留町)에 위치하고 있다. 천리대학과 지척간에 있어서 필자가 자주 찾아가서 쉬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 신궁에는 많은 일본의 국보가 소장되어 있다. 우선 신궁의 배전(拜殿)부터 국보이다. 이소노카미신궁의 배전은 내산 영구사(內山永久寺)가 폐사되자, 이 절의 진수사(鎭守社)의 배전을 이전하여 건축한 것이다.
중앙에 1칸의 마도(馬道)로 불려지는 통로를 열어놓은 할배전(割拜殿)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여기에는 백제의 지도(七支刀)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환두대도병두(環頭大刀柄頭),철순(鐵楯) 등 중요문화재도 적지 않다.
이 신궁에서는 매년 6월 30일 두 종류의 신사(神事)가 행해진다. 칠지도의 모형을 본떠 만든 신검을 꺼내다가 행하는데, 매우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하나는 신검도어제(神劍渡御祭)로 오후 1시에 신검을 고우다신사(神田神社)까지 모시는 행사이다. 이 때 이 신사에서는 모심기 신사(神事)가 베풀어진다.
다른 하나는 하월대발식(夏月大□式)인데, 오후 5시에 경내에서 신검 머리 부분에 띠로 만든 고리를 묶는 행사이다. 이 신궁에서 행해지는 신사가 모두 신검인 칠지도에 관련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만큼 칠지도는 일본에서 신적 존재로 추앙되고 있다.
칠지도(七支刀)의 일본 역사상 위치
칠지도는 길이 74.9cm의 칼로 곧은 칼의 몸 좌우로 가지 모양의 칼이 각각 3개씩 나와 있어 모두 7개의 칼날을 이루고 있다. 칠지도라는 이름이 그래서 붙여졌다.
1953년에 일본국보로 지정되었다. 한국에는 이에 관한 문헌기록이나 실물이 없으나,《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기(神功記)에는 “백제가 일본에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4세기 후반 백제의 근초고왕이 재위할 무렵 일본으로 전해진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칠지는 단철(鍛鐵)로 만들어졌으며 백제의 뛰어난 제철 기술을 보여준다. 칼몸[刀身]의 앞뒷면에는 61자가 금상감(金象嵌)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학생들에게 칠지도의 역사적 의미를 매우 강조하고 있다. 구체적인 사례로 고등학교에서는 <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문>을 왜곡하면서 임나일본부설을 가르치고 있으며, 칠지도의 명문도 그 사실을 증명하는 증거라고 강조한다. 4세 무렵 왜국이 한반도를 직접 지배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칠지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한국의 고대사 연구가들도 칠지도의 진품을 직접 본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모조품조차 보기 쉽지 않다. 칠지도의 탁본만이 회랑에 진열되어 있다.
칠지도(七支刀)에 대한 한·일 역사가의 이견
칠지도는 오랫동안 비장(秘藏)되어오다가 1874년에 이소노카미신궁의 대궁사(大宮司) 간마사도모[菅政友]가 명문(銘文)을 판독하여 발표하면서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이후 학자들의 노력으로 대체적인 내용과 글자가 추가 판독되었으나, 명문의 마멸 부분 및 해석에서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명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앞면)
“태□(泰□) 4년 □월 16일 병오일 정오에 무쇠를 백 번이나 두들겨서 칠지도를 만든다. 이 칼은 백병을 피할 수 있다. 마땅히 후왕(侯王)에게 줄 만하다.
(뒷면)
“선세(先世) 이래 아무도 이런 칼을 가진 일이 없는데, 백자왕(百慈王)은 세세로 기생성음(奇生聖音)하므로 왜왕 지(旨)를 위하여 만든다. 후세에 길이 전할 것이다.”
(1993.6월 蘇鎭轍의 해석)
위의 명문을 두고 남북한과 일본 학계에서는 연호(年號)와 전래 경위에 관련하여 서로 대립된 주장을 펼쳐왔다. 즉, 백제왕이 왜왕(倭王)인 지(旨)에게 하사한 것이냐, 헌상한 것이냐를 둘러싸고 한일 양측이 대립하고 있다.
우리측의 해석은 “백제 왕세자가 왜왕을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라.” 는 것이고, 일본은 “천황의 장수를 기원하는 내용” 이라고 한다.
일본은 증거를 또 하나 제시하는데 그것이 바로《일본서기》의 신공황후전이다.
여기에는 “신공황후 52년 백제의 구저가 칠지도와 칠자경을 비롯하여 각종 귀한 보물들을 가져왔다.” 는 내용이 있다. 이보다 앞서 신공황후 9년에는 “일본이 신라를 정복하자 백제와 고구려가 이에 놀라 무릎을 꿇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것이 칠지도가 헌상된 것임을 보이는 증거라는 주장이다. 한국 쪽 주장의 가장 유력한 증거는 바로 후왕 (候王)이란 글자와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傳示後世)이다.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백제왕이 중국의 연호나 사용하는 제후와 같은 존재였다면 왜왕을 ‘후왕’이라고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라는 글귀는 도저히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할 수 없는 말이거니와 헌상하면서 이런 글 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광개토호태왕비와 칠지도를 증거로 삼아 일본이 우리나라를 직접 지배하였다고 주장한다. 무려 8시간이나 배정하여 칠지도를 학습시킨다. 우리는 어떠한가? 역사 시간에 칠지도를 공부한 적이 있는가? 우리의 많은 문화재를 그들이 소유하고 있다. 왜 그들은 우리 문화재에 그다지 집착한다고 보는가? 칠지도가 우리의 박물관에 보존되었더라면 일본 사람들은 어떤 주장을 했을까? 독도의 문제가 다시금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이때, 칠지도에 새삼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글·사진: 홍순석 hongssk@kangnam.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