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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문화의 시조로 추앙되는 왕인(王人)박사의 터전

   
 
일본 문화의 시조 왕인박사
왕인은 백제의 오경박사(五經博士)였다. 백제 근구수왕(近仇首王) 때 일본에 건너갔다. 지금의 오사카[大阪]지역을 통치하던 백제인 오진천황[應神天皇]이 아라타와케[荒田別] 등을 보내어 학자와 서적을 청하였기 때문이다. 왕인박사는 백제왕의 손자 진손왕(辰孫王)과 함께《논어(論語)》10권과 《천자문(千字文)》1권을 가지고 건너갔다.
왕인이 일본에 처음으로 가지고간 천자문은 훗날 계속 필사되어 전한다. 왜국에 간 그는 백제인 오진천황의 태자에게 글을 가르쳐 일본에 한문학(漢文學)을 일으키게 했다. 그의 후손들은 서부 일본의 가와치(河內; 지금의 오사카)에서 살았다. 그의 이름이 일본《고사기(古事記)》에는 ‘와니키시[和邇吉師]’라 기록되어 있고,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와니[王仁]’라 기록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보통 와니[ワニ-]라고 부른다.

일본문화의 시조로까지 추앙되던 왕인박사의 묘는 오랜 동안 잊혀져 있었다. 1731년 교토의 유학자인 가와[□川五一郞]에 의해 왕인박사의 묘소가 비로소 확인되었다. 그는 고문헌을 바탕으로 묘역 중앙에 있는 자연석을 발견하고 고증하여 <왕인박사의 묘>라는 표석을 세워 두었다. 에도(戶都)시대부터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왔다.

1938년에 오사카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한 채 묘역이 방치되어 왔다. 본격적으로 그를 선양하기 시작한 것은 근래의 일이다. 1984년 11월 3일 제1회 왕인박사축제가 열리고 무궁화동산이 조성되었다. 이어 1985년에 <왕인박사묘를 지키는 모임>이 발족되고, 1988년에 사적 지정 50주년을 맞이하여 대대적인 묘역환경 정화사업을 하였다. 근처에는 왕인공원도 조성되어 있다.

왕인박사의 터전 - 묘역과 공원
왕인박사의 묘소는 오사카 변두리 작은 도시에 소재해 있기 때문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오사카부(大阪府) 히라카타시[枚方市]에 있으며 JR교바시[景橋]역에서 가타마치센[片町線]으로 갈아타고 후지자카(藤阪)역에서 내리거나 게이한센[京阪線] 히라카타역에서 버스로 30분 거리이다. 작은 골목을 헤집고 한참을 걸어가고 나서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 왕인묘소이다. 1600년 전에는 왕릉만큼 크게 자리 잡았을 묘역이 지금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아마도 왕인공원으로 알려진 공간이 모두 왕인의 묘역이었을 것이다.

처음 왕인묘역을 방문하는 한국인들은 당혹스러울 것이다. 분명 백제인 왕인의 묘역인데,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일본전통의 납골묘이니 말이다.

우리의 선조가 아니라 일본인들의 선조를 경배하는 것 같아서 감히 머리 숙여 예를 올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은표와 지연이도 한참 왕인박사의 업적과 일본인들의 문화의식을 듣고 나서야 수긍하였다. 무더운 날 고생하면서 찾아온 왕인박사 묘역인데, 돌아서는 발길은 모두가 가볍지 않았다.

한국에 있는 왕인의 유적
왕인박사는 전남 영암군 군서면(郡西面) 동구림리(東鳩林里)에서 태어났다. 이곳에 면적 163㎡ 규모로 왕인의 탄생지를 조성하고 휴식공간과 편의시설을 제공하고 있다. 1986년 6월 23일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으며, 왕인박사유적지 등의 역사문화자원과 월출산국립공원 일대의 자연관광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이곳에는 왕인묘(王人廟:사당) △내삼문(內三門) △외삼문 △문산재(文山齋) △양사재(養士齋) △전시관 △왕인상 △책굴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왕인사당에는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해마다 제사를 지낸다. 문산재와 양사재는 왕인이 공부하고 후진을 양성하였다는 곳으로, 월출산(月出山) 서쪽 산 중턱에 터만 남아 있던 것을 복원하였다. 책굴은 왕인이 학문을 수련할 때 쓰던 석굴이다. 전시관에는 탄생도 △수학도(修學圖) △도일도(渡日圖) △학문전수도 등이 걸려 있다.

이 밖에 일찍이 외국문화를 받아들이고 전수하는 대외무역항구로서 선사시대부터 문화가 발달되고, 왕인이 일본으로 떠날 때 배를 탔던 상대포(上臺浦)도 복원되었다. 또, 왕인이 고향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마을을 돌아보았다는 돌정고개도 남아 있는데, 이곳은 백제 때의 토기제조촌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이 지방에서 벌어지는 산유놀이 때, 왕인이 마셨다는 성천(聖泉)의 물을 마시면 왕인과 같은 훌륭한 사람을 낳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매년 4월에왕인 춘계대제 등 왕인문화축제와 벚꽃축제가 열린다.

일본을 관광한 사람들 가운데 오사카성을 관람하지 않은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공한 왜장의 유적을 일일이 관람하면서도, 오사카부에 소재한 왕인의 묘역을 찾는 이는 거의 없다. 교통편이 불편한 것도 이유이겠지만, 일본에 왔으니 일본 것만 보고 가자는 속내도 없지 않을 것이다. 일부러 왕인의 묘소를 찾는 이는 많지 않다.

다행히도 전남 영암군이 국제문화교류 차원에서 왕래하며 왕인축제를 하고 있다. 금년도엔 영암왕인문화축제 세계축제원년을 선포하고 대대적인 행사를 가졌다. 구체적으로 염암의 왕인유적지에 일본 특별 천연기념물인 ‘수양벚나무’가 심어진데 이어 일본의 왕인묘소에는 한·일 상생의 ‘신성 태극정원’이 조성되었다.

점차 관심이 기울여지고 있음에 기대도 크다. 쿄도에 있는 ‘미미츠카(耳塚)’도 처음엔 방치되었던 곳이다. 이젠 한국인들의 필수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왕인박사의 묘역도 머지않아 그렇게 되길 기대한다.
(글·사진: 홍순석 hongssk@kangnam.ac.kr/강남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