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농의 세설 국민은 재벌들의 노예가 아니다 지난해 갑오년 최고의 갑질은 까까 미개봉사건 전말에 관한 보고서다. 일명 땅콩회항사건이다. 거기서 누군가의 자식이며 누군가의 가정을 책임진 가장인 아무개 남자 사무장은 부사장 앞에서 폭행을 당하고, 무릎까지 꿇리는 모욕을 당했다. 아니 굴욕을 동반한 치욕을 당했으나 더 이상 개처럼 살지 않겠다는 인간선언을 하게 된다. 월급쟁이들에게 사장이란 국가기관에 끌려가서 고문당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존재다. 월급쟁이들에게 있어서 사장이란 곧 하늘이다. 더군다나 아버지 빽만 믿고 앞뒤분간 못하는 세습사장이라면 그건 그야말로 으스스한 하늘이다. 이런 갑들의 전쟁통에서 총알받이로 살아남아야하는 을들의 고군분투는 실로 눈물겹다. 특히 대한민국 작금의 기업 조직에서 월급쟁이들은 직장인이라기보다는 노예라는 말이 더 적확한 표현 아닐까. 생존에 필요한 것은 인간의 덕목이 아닌 노예의 덕목이다. 작고한 아동문학가 권정생은 혁명가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잘못되고 공정치 못한 일이라면 희생을 해서라도 바로 고쳐나가는 사람이 바로 혁명가다라고 말했는데, 이들이야 말로 우리시대의 영웅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들은 우리를 짓누르는 이 무력감,
우농의 세설 리언(俚諺) 왈, 군자는 곁불을 쬐지 않는다. 목이 말라도 도천의 물은 마시지 않으며(渴不飮盜泉水 갈불음도천수) 더워도 나쁜 나무 그늘 에서는 쉬지 않으리(烈不息惡木陰열불식 악목음) 나쁜 나무엔들 어찌 가지가 없으랴(惡木豈無枝 악목기무지) 뜻있는 선비는 모든 면에서 마음이 고하구나.(志士多苦心 지사다고심) 진(晉)나라 육기(陸機)가 쓴 맹호행(猛虎行)모두(冒頭) 장(章)으로 문선(文選)에 실린 글 이다. 설원(說苑說叢)의 기록에 의하면 공자는 문도들과 천하를 주유(周遊)하면서 죽을 만치 목이 마른 적이 두 번 있었으나 물을 마시지 않고 지나간 곳이 있다 한다. 승모 마을에 도착해서 물을 마시지 않은 일과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사수현(泗水縣)에 있는 도천(盜泉)의 샘물을 지나면서 물을 마시지 않은 일이 그것이다. 승모(勝母)라는 말은 자식이 어머니를 이긴다는 말로 세상에 이보다 더 패륜은 없으리라. 도천이란 말은 본래 도천(道泉)으로 임지에 부임하기 전에 도덕적으로 깨끗한 목민관이 되겠다고 다짐하며 마시는 물인데 훗날에는 많은 관리들이 도와는 상관없이 습관적으로 이 물을 마셨다한다. 그 후 관리들의 부패는 하늘을 찔렀고, 백성들 사이에서는 도학자
우농의 세설 양들의 침묵 말(談)중에 최고는 덕담(德談)이다. 덕담을 주는 자는 영광이 되고, 받는 자는 복이 된다. 그 이유는 덕담이 지니는 말의 향(香) 때문이다. 나이든 사람들은 배움의 길고 짧음의 유무를 떠나서 자신이 살아온 인생관이 응축된 철학을 젊은이들에게 나눠줄 의무와 책임이 있다. 예기 대학 왈, 돈은 집을 윤택하게 하고 덕은 몸을 윤택하게 하니 마음이 넓고 몸은 편하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뜻 본말에 성실해야 한다.(富潤屋 德潤身 心廣體胖故 君子 必誠其意) 분명한 것은 돈과 재물은 본이 아니다. 덕이 본이다(德本財末)라는 말에 대해 대학은 지극히 당연한 가르침을 준다. 군자는 먼저 덕을 쌓아야 하며. 덕이 있으면 사람이 있게 되고, 사람이 있으면 땅이 있게 되고, 땅이 있으면 재물이 있게 되나니덕은 근본이고 재물은 말단이다.(君子 先愼乎德 有德此有人 有人此有土 有土此有財 德者本也 財者末也) 쉽게 말해서 돈을 벌 때는 반드시 도덕적으로 깨끗한 바탕위에 벌라는 말이다. 전국책 왈, 마음 씀씀이가 후한 사람은 남을 해쳐가면서 자신을 이롭게 하지 않는다. (厚者不毁人以自益也.) 제나라 경공은 말 4000필과 천하를 얻을 정도의 부자였으나
우농의 세설 사과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고려사 106권 열전 19권에 그는 성품은 강직했으며 삶은 소박했고, 사람 사이에 무례가 없었다. 고려 말 충렬 왕 때 좌사간을 거쳐 민부상서와 예문관 제학을 지낸 동양의 바이블이라는 명심보감을 지은 로당(露當) 추적이 그다. 그 명심보감에 복 있다고 복 다 누리지 마라. 복 다하면 몸이 빈궁하게 될 것이요, 권세 있다고 권세 다 부리지 마라. 권세 다하면 원한 산 사람을 만날 것이다. (有福 莫享盡 福盡 身貧窮 有勢 莫使盡 勢盡 相逢 明心寶鑑) 금쪽같은 이 말을 순암 안정복이 사족을 단다. 사람의 일상에서 가장 힘쓸 것은 예다. 절세의 재주와 최고의 지략이 있더라도 예가 없으면 사람이 될 수 없다.(人之用力, 不過彛倫日用之常. 於此蹉失, 則雖有絶時之才高世之略, 不可爲完人也.安鼎福 順庵集 卷十四 示弟鼎祿子景曾遺書) 그렇다. 굳이 증거를 들이대지 않아도 세상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다. 공부를 아무리 잘하고 돈이 아무리 많고 권세가 있다한들 예(禮)가 없다면 그는 인간 말종이라는 사실을. 예는 절도를 넘지 않고, 남을 업신여기지 않고, 누구에게도 버릇없이 굴지 않으며, 예는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농의 세설 공자의 제자 재여와 박지만 논어에는 재여와 관계된 문장이 5번 나오는데 공자가 직접 재여를 언급한 대목 선진을 빼면 모두 재여를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재여는 불성실했으며, 근거 없는 말로 현혹했으며, 전통을 부정했으며, 스승을 시험한다. 재여는 노나라 출신으로 자(字)가 자아(子我), 재아(宰我)다. 자공과 더불어 언어에 뛰어났으며, 공자를 모시고 14년의 풍찬로숙(風餐露宿)을 견뎌낸 후대 왕조에서는 공(公)으로 존숭된다. 재여는 어떤 인물일까. 공자의 제자 중에 가장 똑똑하고 가장 말 잘하고, 가장 몹쓸 제자 역시 재여다. 공자에게 있어서 재여는 아픈 손가락이다. 재여는 성실하지도 않을 뿐더러 공자학당의 규칙도 안 지키고 늦게 일어나는 일은 다반사고, 암튼 애물단지지만 공문십철(孔門十哲)에 드는 빼어난 제자임에 분명했다. 그는 자공과 동년배로 유일하게 속내를 말할 수 있는 막역지우다. 한동안 나타나지 않아서 모두들 궁금해 하던 차에 재여가 오찬(午餐)장에 불쑥 나타난다. 모두 그를 반겼다. 스승인 공자도 오랜만에 재여와 겸상을 하니 좋았다. 그런데 재여의 표정은 심각했다. 밥을 미처 먹기도 전에 스승께 묻는다. 우물에 사람이 빠지면 마땅히 뛰어
우농의 세설 문고리 권력 고려 제7대 목종(穆宗)(집권 997~1009년) 임금 모친 천추태후(千秋太后)는 목종이 집권한 12년 동안 섭정을 하지만 말로가 불행했다. 20년 봄 정월 계사일(癸巳日) 천추태후(千秋太后) 황보씨(皇甫氏) 훙(薨) 유릉(幽陵)에 장사하다. 고려사 현종세가 그 시발은 천추태후와 그의 내연 남 김치양과의 궁궐 안 밀회다. 남편인 제5대 경종 임금이 죽고 천추태후가 대비가 되자, 내연 남 김치양은 궁궐 출입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승려를 가장해 태후의 처소를 출입한다. 소문은 장안을 덮었고, 제6대 임금 천추태후의 오빠 성종은 김치양에게 곤장을 친후 귀양을 보냈다. 고려사 김치양전 참고로 천추태후의 남편인 경종이 죽자 당시 두 살인 태후의 아들 목종이 너무 어리므로 태조의 손자이자 경종의 사촌 형제이며 태후의 오빠인 성종이 왕이 된다. 성종이 죽고 목종(997)이 왕이 되면서 두 사람 사이는 다시 뜨거워진다. 당시 34세인 정력 왕성한 천추태후는 정7품 하위직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벼슬을 제수하며, 김치양을 정부(情夫)로 끌어들인 후 오늘날의 차관급인 정2품 상서도성 우복야겸(右僕射兼) 정3품 삼사사(三司事)로 승진시킨다. 이일 후
우농의 세설 낙방거사가 부르는 절창 남창지름 선비가 일생을 두고 해야 할 공부는 경전을 읽는 것이다. 밥을 굶을 수는 있지만 글 읽기를 멈출 수는 없다. 선비 삼로(三衫勞 옷깃을 여미고 힘쓴다)라 하여 선비는 세가지 일에 힘을 쓰는데 글 읽는 일, 상소문 쓰는 일, 그리고 부학이다. 부학(副學)은 네개가 있는데 시서화금(詩書畵琴)이다. 선비가 잡기에 능해서는 안되지만 시서화금은 부학이라 하여 잡기와는 구별을 한다. 계(紒)상투하고 치포관(緇布冠)을 쓰고, 청금의(靑衿衣)나 학창의(鶴氅衣)를 한 선비는 시(詩)즉 한시에 운자(韻字)를 놓을 줄 알아야 하고, 서(書) 즉 붓글씨를 쓸 줄 알아야하고, 화(畵) 즉 사군자를 칠 수 있어야 하고, 금(琴) 즉 시조창을 읊을수 있어야 한다. 시조창이라는 명칭은 가람 이병기(1891~1968)선생은 시절을 노래한다는 시절가로서 시절가조(時節歌調)의 줄인 말이라 했다. 본래 이 말은 서천 화양인(人) 영조 때 시인 석북 신광수(申光洙) 숙종 38년 1712년~영조 51년 1775년의〈석북집〉관서악부 15장에 있는 말로서 관산융마(關山戎馬)기록에 의하면 시조는 장음과 단음을 늘어놓은 것으로 장안의 가
우농의 세설 청와대 CCTV가 있는 이유 대한민국 헌법은 외국 어느 나라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명토 박아 놓은 헌법 제 1조 1항의 문구가 그것이다. 그 다음 대한민국헌법의 꽃이라는 헌법 제1조 2항은 기막힌 문장으로 쐐기를 박는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세상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문장이 또 있을까? 민주공화국 국가에서 대통령은 국민투표를 통해서 국민으로부터 국가를 운영할 권한을 한시적으로 위임받은 큰 일꾼이다. 그러므로 대통령으로 선출된 순간부터 사생활은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해서도 안 된다. 대통령의 권한 행사 또한 헌법과 법률에 따라 제한적으로 이뤄져야 하며 반드시 명심해야할 것은 대통령 재임기간 대통령의 행동은 국민의 여론과 함께 가야한다. 청와대에 CCTV가 존재하는 이유도 그중 하나다. 청와대에 CCTV를 설치한 이유는 국민이 대통령을 감시하기 위함이 아니라 대통령이 국민에게 투명하기 위함이다. CCTV하면 오버 랩 되는 것이 지난4월16일 세월호 침몰 당시 대통령의 청와대 경내 7시간의 행적이다. 이를 두고 김기춘 비서실장은 박근혜
우농의 세설 가장 위험한 삐라. 1000년 동안 잊혀진 사상가를 꼽으라면 단연 맹자가 으뜸이다. 그런 그가 남송의 유학자 주자에 의해 재해석되면서 아성(亞聖)의 반열에 선다. 결국 맹자는 진보 유학자들에 의해 논어가 성리학의 이념을 지탱해주는 책이라면 맹자는 성리학을 뿌리내릴 수 있게 하는 국가 이데올로기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좌우서가 된다. 하지만 맹자라는 책은 기존 권력을 잡은 자들에게는 목에 걸린 가시와 같은 책이다. 결코 권력 이데올로기로 순화될 수 없는 책이란 말이다. 그만큼 맹자라는 책은 급진적 혁명사상을 담고 있는 매우 불온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책이다. 삼봉과 포은은 서당동기지만 포은이 오년 배다. 일찍이 삼봉은 맹자를 천 번 이상 읽은 사람이다. 정도전은 20세에 성균관에서 경전을 공부할 수 있는 진사시에 급제, 얼마 후 부친상으로 3년 시묘를 사는데 포은이 맹자 책을 준다. 서당시절 삼봉이 맹자를 외운다는 걸 포은이 모르지 않을 터. 고개를 갸웃하며 포은이 건네준 맹자 책을 토씨하나 안 빼놓고 하루 반 장 이상을 넘기지 않으며 아주 느리게 경전 해석하듯이 읽는다. 그렇게 시묘 살이 3년 기간 동안 맹자를 읽으면서 비로소 역성혁명을 꿈꾼다
우농의 세설 한 줄에 목숨을 걸다. 1. 경(經)과 전(傳). 주(注)와 소(疎) 그리고 비지(備旨) 오래됐다고 보물은 아니다. 가치가 있어야 보물이다. 이는 고전(古典)이며, 그중 핵심을 경(經)이라 하고 이를 전함을 경전(經傳)라 한다. 본래 경과 전은 천년의 시차를 두고 각각 쓰이던 말로 사마천에 이르러 사기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 경전이란 말을 묶어서 쓴다. 대저 유자들은 육예(六藝)로서 법을 삼으나 육예의 경전은 천만 가지나 된다.(夫儒者以六藝爲法, 六藝經傳以千萬數), 박물지(博物志/ 張華, 232~300). 성인이 지은 것을 경이라 하고, 현인이 풀이한 것을 전이라 한다.(聖人制作曰 經, 賢人著述曰 傳) 즉 성인의 말이 경이요, 경을 입으로 전해준 것이 전이다. 시경 서경이 있었고, 훗날 입으로 전해 시전 서전이 됐고, 주자에 이르러 경과 전에 대한 해설집 사서집주(四書集注)가 나왔다. 후대에 이르러 집주에 대한 해설집 소(疏) 다산의 논어고금소(論語古今疎)라는 또 다른 해설이 나왔다. 이에 대한 또 다른 해설로 비지(備旨)까지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재술하면 전은 경을 말로 전한 것이고, 주는 전을 해석한 것이고, 소는 주를 해석한 것이고,
우농의 세설 옥갑야화는 이렇게 말했다. 호암은 집이 부자였던 관계로 훈도(訓導)를 모셔와 사서 논어맹자중용대학를 익혔다. 그때 호암의 나이 7세 미만이었다. 유달리 총명했던 호암은 논어 499문장 중 위령공편의 학야녹재기중(學也祿在其中)에서 크게 깨닫는다. 반면에 아산은 집이 가난했던 탓에 직접 서당 훈장(訓長)에게 찾아가서 글을 배운다. 그렇게 읽은 것이 대학 책이다. 훈장은 대학 책을 사마천 사기에 빗대어 가난으로부터 부를 얻는 데는 농(農)은 공(工)만 못하고, 공은 상(商)만 못하다며 사마천 사기를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로 어린 아산의 가슴속에 콕콕 박아 준 것이다. 대학 책은 대학강어, 대학혹문, 대학연의. 이렇게 세권의 별책이 붙을 만치 제왕의 학이기 때문에 대학 책은 천하에 뜻을 둔자가 아니면 읽을 이유가 없는 책이다. 그때 아산의 나이 9세다. 훗날 호암과 아산은 거부가 되어 삼성과 현대라는 대한민국 경제를 지탱하는 양대 산맥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제 창업주 선대는 떠나고, 2세 경영에서 삼성 이건희 회장은 현대 정몽구 회장을 제치고 공히 수 십 년을 대한민국 넘버원으로 군림하다가 근자에 와서 이건희 회장의 와병으로 인해 3세 경
우농의 세설 귀신도 울고 갈 두 시인의 붓글씨-2 붓글씨의 기준은 일감사미(一感四美)인데 붓글씨를 감상한다함은 첫째, 글자의 위 아래 균제미. 둘째, 좌우의 조형미. 셋째, 탈 속적인 고박미(古薄美). 그리고 넷째는 글 전체적인 조화미(美)를 볼 수 있다. 이런 연후에야 시각적 생동감이 몸으로 체화된다. 그래서 붓글씨는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이러한 이유로 붓글씨는 서예가가 아닌 방외지사 시인이나 고승의 글씨를 천하제일로 친다. 시인도 아닌데 고승의 글씨를 시인과 동격으로 놓는 이유는 시(詩) 자(字)가 절(寺)에서 하는 말(言)이 시(詩)이기 때문이다. 이는 시인이나 고승들의 마음은 자연에 가장 가까이 있다는 의미다. 창암(蒼巖) 이삼만(1770~1847)은 71세(1840년)때 서예 이론서 서결을 쓰는데 붓글씨는 자연에서 비롯되어 음(陰)과 양(陽)이 생겨나고, 형(形) 세(勢) 기(氣)가 붓에 실려 부드러움과 거침, 바름과 기괴함이 생겨나니 세참과 빠름, 느림과 껄끄러움의 묘미만 터득하면 서예는 끝이라고 했다. 창암은 조선 말기인 19세기 호남 서단을 평정하며 유수한필(流水閑筆)로 필명을 떨친다. 서울의 천재(天才) 추사(김정희1786~18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