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할아버지는 미나리를 즐겨 드셨다. 미나리꽝에서 뽑아 잘게 썬 뒤 고추장과 식초, 참기름을 넣어 버무려 드셨다. 간을 맑게 한다고 했다. 말년의 할아버지는 미나리로 간에 찌든 주독을 몰아냈다. 난 안 먹었다. 미나리에 거머리가 심심치 않게 꼬였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억지로 떠먹인 날 밤. 뱃속 거머리에게 피를 쪽쪽 빨리는 꿈을 꾸기도 했다. 깨끗한 물보다 더러운 물에서 더 잘 자란다. 물을 정화시키면서 제 줄기와 잎에 향을 키운다. 자연하수처리장이라는 별명의 이 채소는 맑은 생선탕에 어울린다. 비린내를 뚫고 특유의 향으로 입맛을 돋게 한다. 봄날, 삼겹살에 곁들여 먹으면 더 맛있다. 용인5일장에 가면 한 단에 3000원밖에 안한다. 영화 ‘미나리’가 영미권에서 관심을 받자 뿌듯해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낯선 땅에서 차별을 딛고 꿋꿋하게 뿌리내리는 한국인 가족은 ‘어디서든 잘 자라는’ 미나리와 단짝이다. 아내는 미나리 친척뻘인 고수를 좋아한다. 야근에 지쳐 찡그린 얼굴로 귀가했다가도 고수 곁들인 배달음식을 마주하면 웃는다. 오랜 외국 생활을 한 아내에게 고수는 아마 미나리 같은 존재. 고수는 한때 중국이나 동남아 음식에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도
[용인신문] 이사 왔다. 서울에서 용인으로. 14년만의 복귀다. 이곳에 부모와 누나들, 매형과 조카들이 오래 살았다. 대학 시절 용인은 안개가 잦았다. 텁텁한 안개. 술 깬 날보다 깨지 않은 날이 많았다. 용인에 살지만 서울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중심을 향해 달려가고 싶었다. 날마다 상경하고 싶었다. 돌아오지 않은 날들이 잦아지다 서울에 눌러앉았다. 서울은 용인보다 10배 더 사람이 많았다. 10배 더 경쟁해야 했다. 멈춰서면 뒷걸음질.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번잡한 도시에서, 번잡한 사람이 됐다. 이루지 못할 꿈을 꾸다 깼다. 코로나19가 한창 창궐하던 때였다. 문득, 둘러보니 먼 곳에서 부모는 늙어 있었다. 캄캄한 어둠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방역당국에서는 “찾아뵙지 않는 게 효도”라고 강조했다. 내게는 가능하지 않았다. 그동안 부모에게 기울이지 못한 관심을 벌충하려면 옷깃이라도 붙잡아야 했다. 그래서 이사 왔다. 용인, 안개는 걷혔을까. 이사 온지 일주 일만에 함박눈이 내렸다. 여섯 살 딸아이를 깨워 눈장난을 쳤다. 썰매도 타볼까. 아파트 주민들이 하나둘씩 나와 관리소장들과 더불어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딸아이와 힘을 보태지 않을 수 없었다. 주
[용인신문] 1991년 2월 15일. 딱 삼십 년 전, 그날은 눈이 참 많이 내렸다.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진천행 버스를 타고 무려 네 시간도 넘게 걸려 도착한 곳이 용인군 내사면(현재 양지면) 양지리. 그날은 커다란 가방을 들고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따라 내 인생의 첫 직장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물론 약속 시간보다 한참은 늦은 시간이었다. 첫 직장인 학교에 도착했을 땐 이미 선생님들은 모두 퇴근한 뒤였다. 그날 밤 벌판을 가로지르는 칼바람을 피해 시골 중학교 숙직실에서 불편한 잠을 아주 달콤하게 잤던 기억이 지금도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때는 이리 오래도록 용인과 인연을 맺을 것이라는 생각을 꿈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삼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용인과 인연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다. 아니, 놓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어찌 보면 행여 놓칠세라 더 꽉 움켜쥐고 있었는지도 모르리라. 이십 대의 청춘이 오십 대의 중년으로 멋지게 익어갈 수 있었던 터전이 바로 용인이었으니 말이다. 용인에 정착한 후 한 십 년쯤 지났을까. 시인이 되고 싶다던 청춘의 꿈이 점점 식어갈 때쯤 용인은 무심한 척 내 손을 잡아주었다. 그렇게 시작한 용인문학회와의 이십 년 동고동락. 그
[용인신문] “6·25전쟁은 전쟁도 아니다”라는 유머 아닌 유머가 있었다. 학생들은 학교에 가서 공부를 못하고, 확진자가 생기면 직장이고 사업장이고 모두 폐쇄조치를 한다. 밖에 나가면 불안해서 볼일도 채 못 보고 서둘러 돌아오는 이 사태는 정말 사변 중의 사변이라 할 수 있겠다. 운동하지 않으면 몸이 굳어지는 우리 장애인들의 상황은 더욱 안타까웠다. 공원에도 출입금지 줄을 쳐놓았다. 살다 살다 이런 경우를 만나다니 집에서도 소독은 필수, 밖에서 들어오면 현관에서 분무기 소독세례를 받아야 들어 올 수 있다. 그래도 연일 뉴스는 우리를 우울하게 하고 공포에 떨 수밖에 없었다. 교통사고로 뇌를 다쳐 뇌 병변 편마비 장애인인 나는 의욕도 입맛도 없어져 굶기를 밥 먹듯 하며 어서 하늘나라로 갔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너무 집에만 있으니 우울해져서 바람이라도 쐬러 가자는 가족들의 제의에 나가기 싫다고 주저앉는 나를 달래는 진풍경 속에 가족들도 지쳐가고 있었다. 나가도 불안하고 집에 있어도 답답한,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어이없는 현실을 이겨 나갈 길은 어려웠다. 마스크 잘 쓰고 집에 들어오면 손 잘 씻으면 괜찮다고 외출을 권하는 바람에 차를 이용해 산책했다. 더 힘
[용인신문] 우리나라에 코로나-19가 확산 된 초기, 우리 학교는 방학 연장에 이어 온라인 수업이라는 유래 없던 결정을 내리게 됐다. 정부에서도 외출을 최대한 자제해 달라고 당부했다. 그 뒤로 온라인 수업을 하면서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컴퓨터 화면만 뚫어지게 바라보며 책상 앞에 앉아 있기만 했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릴 수도, 밖에 나가서 공기 좀 쐬고 올 수도 없으니, 답답함은 날이 갈수록 더해져 갔다. 분명 집에만 있어도 행복했던 내가, 어느 순간 집에만 있으니 답답하기만 하고, 행복을 느끼기 어렵게 되었다. 무엇보다 나 스스로 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반강제적으로 집에 있다는 것이 더 괴로웠다. 편한 곳으로만 생각했던 집이, 마치 창살 없는 감옥처럼 느껴지게 되었다. 게다가 종일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으니 어깨와 목, 허리가 아팠고, 피곤이 쌓였다. 그때 나의 머릿속에는 온라인 수업이 끝났으면 하는 생각밖엔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확진자 수가 차츰 줄었고, 오프라인 수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또 다른 고난이 있었으니, 바로 종일 마스크를 쓰고 있어야 한다는 것. 처음엔 학교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마스크를 벗어버렸지만, 지금은
[용인신문] 코로나19와 긴 장마에 태풍까지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던 지난해 여름. 매일 수시로 오는 재난문자에 깜짝 놀라며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여러 번. 힘들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다. 그렇게 시달리고 보니 여름이 가는 줄도 몰랐는데 어느덧 일 년이 지났다. 우리는 남편과 막내딸, 나까지 세 식구가 한집에 사는 직장인들이다. 아침 시간은 유난히 빨리 가고 전쟁이다. 귀밑 흰머리가 부끄럽지 않을 나이 칠십, 식구들 뒷바라지하며 직장생활 하기엔 기운이 모자라고 힘들다. 어느 날이었다. 출근하는 남편이 식탁 위에 마스크를 두고 갔다. 난 방방 뛰며 마스크를 가지고 뛰어가며 소리소리 질렀다. 백미러로 내가 보였는지 차가 멈췄다. 숨이 차 말을 못 하고 마스크를 흔들었다. 남편이 빙그레 웃으며 차에 비상으로 두고 다닌다고 했다.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개인위생을 철저히 챙기는 것이 어이없어 나 역시 엷은 미소를 지었다. 마스크 품귀현상이 일고 구입하기 어렵던 때 스무번 째로 줄을 서서 마스크를 산 적이 있다. 가족끼리도 마스크로 티격태격하고 호주머니 돈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마스크가 금스크이던 시절,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고 고단하다. 내가 하는 일은 장애인
[용인신문] 나는 현재 용인시 기흥구에 위치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병원 병동에서 정신장애인 환자들을 돌보는 병동보호사로 일하고 있다. 대부분이 알 듯 정신과병원 병동은 환자들의 특성상 격리를 시켜놓는 폐쇄병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 환자들은 마음의 병으로 고통하고 신음하는 환자들이다. 폐쇄된 공간 그리고 규제된 생활 속에서 규칙을 지켜가며 자기 자신들의 마음대로는 생활이 안되는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의 본심을 외면당한 채 생활하고 있는 환자들이다. 그들의 유일한 낙은 그저 보호자들이 면회를 와서 잠깐이나마 세상 밖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해 12월부터 중국 우한성에서 지금까지도 방한 중인 별로 반갑지 않은 코로나라는 바이러스들 때문에 병동에 면회, 외출, 외박이 전면 금지되어 있는 상태에 있다. 환자들의 답답함은 극에 달해 있고 보호자들 또한 그냥 어쩔 수 없이 전화를 통해서 안부를 묻는 실정이 되었다. 얼마 전에도 몇몇 정신과 병원에서 환자들이 집단 확진 판정되는 불미스러운 사태가 발생한 바 있다. 병동 보호사의 의무는 비단 환자들의 안전만 책임지는 것에 국한되어지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진정한 보호사의 의무는 폐쇄된 공간 속에서 마음의 병
[용인신문] 용인시 백암면 소재에 있는 예아리박물관은 2017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경기도에서 실시하는 지역 문화예술 플랫폼사업을 4년 동안 시행해왔다. 2017년도에는 어울림이라는 주제로 지역연계 중심, 농촌특산물을 체험활동을 통해 백암지역 마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이를 토대로 지역민과 함께하는 참여 기획을 만들어 박물관에서 운영하는 기획전시 및 교육을 통해 서로 협업하는 체계를 만들어 지역 마을을 활성화 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2020년에는 지역 특성상 문화예술에 소외된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기획전시(주제-예아리에서 정조를 만나다) 토우(土偶) 미니어쳐 국장행렬과 애니메이션을 활용한 시각적 요소, 그리고 클래식 공연의 청각적 요소를 결합한 하나의 축제를 만들어 운영하였다. 문화 융복합 사업을 구상한 2020년도에는 용인지역 내에서 활동하는 예술인들을 섭외해 수준 높은 클래식 공연을 선사하였다. 코로나 사태로 운영 일정변경, 사업량, 사업내용의 변경 등 난제가 있었으나 잘 마무리가 되었다. 이렇게 예아리박물관 프로그램을 통해서라도 문화적 갈증 해소를 위해 노력했지만 전 시민들에게 골고루 혜택이 돌아갈 수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2020년 봄부터 급격한
[용인신문] 강원도에서 다음 근무지를 고를 때에 전국 지도를 펼쳐 놓으니 용인이 눈에 들어왔다. 서울에서 가깝고 지방 가기에도 편하며 특히 산이 많아서 좋아 보였다. 그전까지 용인과의 인연은 대학 동아리 회장으로 용인에서 MT를 가져본 것이 전부였다. 이후 원하는 대로 용인에 왔고 2년 정도 살다 가야지 한 것이 13년이 흘러 정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여행하다가 ‘용인’ 표지판만 보이면 마음이 편하고 고향에 와 있는 느낌이 든다. 용인에 살면서 몇 가지 특별한 일이 있었다. 용인문학아카데미 시창작반에서 처음으로 시를 배우고 나름 공부를 하다 보니 어느새 ‘시인’이 되어 있었다. 해마다 시창작반 문우들이 등단하여 기쁘다. 또한, 용인문화원 문화위원이자 봉사단원으로 지역축제와 문화행사에 참여하며 용인의 전통문화에 대해 이해를 하게 되었다. 색소폰 클럽을 다니면서 연주 실력을 다듬고 봉사를 했던 일, 단국대학교에서 주경야독하며 학위를 받았으니 용인은 내게 참 특별한 곳이다. 이러한 용인이 인구 110만 명 규모에 걸맞은 특례시가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도시가 커가면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분당이나 일산처럼 대규모 신도시로 개발되었다면 지금처럼 난개발
[용인신문]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나라를 만들겠다’라는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누가 지도자가 되어도 별반 달라지지 않던 세상에 대한 불신은 여전했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를 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코로나 19’라는 무서운 변수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이렇게 무서은 바이러스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길어야 3개월이라고 생각했고 마스크 수급이 좀 원활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다였다. 조금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재택 근무 덕분에(?) 한가족이 모이는 시간이 많아졌고 가족들 사이에 밀린 대화의 시간도 생겼다. 부모들의 답답함이야 어떻든 아이들은 학교를 가지 않는 자유를 즐기기도 했다. 과거에 경험했던 바이러스처럼 금방 백신이 개발되고 이 혼란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사람들은 ‘코로나 19’를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5월의 집단 감염으로 세상은 혼란을 겪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코로나 우울증에 시달렸다, 8월의 집단 감염은 사람들을 절망에 빠지게 했다. 뉴스는 늘 코로나 특집으로 방송되었고 ‘코로나 팬데믹’ 이전과 달라지지 않은 모습은 정치인들의 불협화음뿐이었다. 더운 여름까지 마스크를 쓸
[용인신문] 안빈낙도! 이게 안 된다. 마음을 다 잡았다가도 주변의 말을 들으면 마음이 들썩인다. 2006년 하룻밤 자고나면 몇 천 만원씩 집값이 오르던 때가 있었다. 그때 소위 뒷북이라는 걸 쳤다. 경제개념 없는 남편과 아내는 거액의 빚을 내 덜컥 집을 사고 말았다. 얼마나 비싸게 샀던지 집값이 고공 행진인 요즘에야 본전이다. 누가 빚을 다 갚고 나니 삶의 목표가 없어진 것 같다고 하더니. 우리도 대출을 갚는데 온 정신을 쏟으며 살았다. 다행히 끝이 안 보일 거 같던 긴 대출의 터널을 나왔다. 그리고 우리는 또다시 부동산을 기웃거렸다. 하지만 한 번 데인 경험 때문에 선뜻 결정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집값이 무섭게 오르고 있다. 텔레비전만 켜도, 핸드폰 통화만 해도 모두 부동산 얘기다. 남편과 나는 무릎을 치며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때 집을 보러 갔을 때 갈아탔어야 했어. 그랬으면 헉! 지금 몇 억을 손에 쥘 수 있었을 텐데. 그럼 20만km 넘은 자기 차 바꿔줬을 텐데. 소리만 들리는 텔레비전도 바꿀 수 있고. 애들 학자금 대출도 한 번에 싹…….’ 쥐어 보지도 못한 몇 억의 아쉬움은 잠자리에 들어서까지 이어졌다. 가뜩이나 갱년기로 잠도 못 이루
[용인신문]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2017년 승격)에 위치한 어비리魚肥里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정겨운 고향이다. 본래 어비울(村)은 1971년 12월에 어비울 저수지(이동저수지) 제방이 완공되기 전까지 600여 년의 전통과 역사를 지닌 마을이었다. 지금은 원어비울元魚肥村 마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수몰되어 경기도 최대 규모의 담수량을 자랑하는 ‘이동저수지’로 명명되고 있다. 어비리는 맑은 물이 흐르고 기름진 땅에서 해마다 풍작을 거두는 풍요로운 농촌 마을이었다. 세거가문인 강릉 김씨의 24세조 회와공 김언신은 ‘어동팔경魚洞八景’을 노래했는데, 그중 ‘어비낙조’는 현재의 ‘용인 8경’ 중 하나로 불리고 있다. 저수지로 변해버린 지금의 모습은 저수지 수면과 황금 들판을 동시에 붉게 적시는 낙조의 황홀함으로 표현된다. 마을에는 수령이 500년은 족히 넘은 신수神樹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수몰로 잘려서 땔감으로 팔려나가는 비운을 겪었다. 그 흔적으로 마을에서 보관하던 뿌리마저 도난을 당해 사라졌다. 수백 년을 살아온 마을에는 대동大同의 전통이 살아있었다. 마을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대동제大同祭가 해마다 열렸다. 집마다 축언을 하고, 천지 만물에 대한 감사함을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