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소설을 통해 위인을 공부한 책이 <운현궁의 봄>이다. 흥선대원군을 ‘상갓집의 개’ 로 만들어 버린 책이다, 소설을 역사라고 착각했던 중학생 시절의 필자가 받은 충격은 오래갔다. 소설 <운현궁의 봄>은 김동인이 썼다. 그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중에서도 으뜸이다.
안동김씨 세도 권력의 절정은 김좌근이 아니라 첩이었던 양 씨였다. 기생 출신이었던 양 씨는 김좌근의 총애를 바탕으로 국정에 개입한다. 조선의 방백 수령들이 그녀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 양 씨는 김좌근 몰래 빈객들을 만나면서 부적절한 소문도 끊이지 않았다.
어느 날 양 씨는 한강에서 밥을 쏟아 물고기에게 자선을 베푸는 행사를 주최했다. 명종 때 척신 윤원형의 첩으로 나라를 말아먹은 정난정이 한 시반선(施飯船) 행사를 재현한 것이다.
양 씨는 구경 나온 배고픈 백성들에게 “물고기가 밥을 잘 먹는지 강물 속을 살펴보라.”고 명령한다. 이때 배고픈 백성들 몇몇이 강으로 뛰어든다. 물고기 밥을 훔쳤다는 이유로 누구는 죽고, 누구는 뼈가 으스러지도록 맞았다. 가족들조차 연좌제로 태형에 처했다.
주위 사람들은 그녀를 합부인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정1품의 고관들을 칭하는 합하(閤下)의 권력을 가진 김좌근의 뒷배가 그녀에게도 주어진 것이다. 고향이 ‘나주인 합부인’은 줄임말로 나합(羅閤)이라 부르며 아첨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다수 사람은 ‘나주 조개’라고 비아냥거렸다.
1895년 10월 8일, 중전 민 씨는 무참하게 시해됐다. 이른바 ‘을미사변’이다. 1897년 10월,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된 고종은 중전 민 씨를 명성황후로 추존하고 11월 22일에 장례식을 치렀다.
“무덤 조성과 장례 의식 비용으로 100만 달러가 지출됐다.”라는 헐버트의 기록(1898년 1월 9일 자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지)에 따르면 성대한 장례식이었다. 황후의 억울한 죽음을 달래주기 위해서였다지만, 당시 조선의 재정 상태를 고려하면 어처구니없는 액수였다.
명성황후의 장례식 후 3개월이 되기 전에 흥선대원군이 죽었다. 1898년 5월 15일, 대원군의 장례 행렬이 경운궁 앞을 지나갔다. 고종은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흥선대원군은 죽기 전에 고종의 생일에 참석하려고 했으나 고종이 거부했다.
“주상이 보고 싶구나. 아직도 오지 않았는가.”라며 대원군이 애타게 기다렸던 아들 고종은 어머니 부대부인 민 씨에게도 조문하지 않았다.
지난 8일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사망했다. 영국은 물론 영연방 16개국을 포함해 영국과 깊은 관계가 있는 각국 정상들이 조문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부부도 조문을 위해 특별기를 타고 갔다. 대한민국이 영연방 국가는 아니지만, 정부 차원의 조문 사절단이 가는 것은 옳다. 다만, 오락가락 행보로 인해 발생한 문제들은 절대 가볍지 않다.
‘조문 외교’가 목적이었는데 ‘조문 취소’에 대한 해명의 이유도 어설프다. “현지에서 교통 통제를 해서 못 갔다.” “차 타고 가려 했는데, 차를 가져가지 못하게 해서 취소했다.” 프랑스의 마크롱도 30분 걸어가서 조문했고, 중국은 시진핑을 초청했지만, 서열 8위가 조문을 갔다.
엘리자베스 2세의 장례식과 관련해서 의전과 교통 통제, 차가 아닌 도보로 이동한다는 내용을 전 세계에 알렸는데 대통령실이 몰랐다고 고백한 꼴이다. 영국까지 가서 조문을 안 하고 온 정상들은 대한민국 대통령뿐이라는 보도가 사실이라면 누군가는 책임져야 한다. 현재의 경제 상황을 고려하면 심각한 세금 낭비였기 때문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은 가려지지 않는다. 가리는 방법이 있긴 하다. 그냥 눈을 감는 것. 눈을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다. 필자는 ‘아웅’을 ‘미봉(彌縫)’이라 쓰련다. 사전적으로 미(彌)와 봉(縫)은 모두 꿰매거나 깁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질적인 문제의 해결이 중요하고, 미봉은 속임수나 일시적 방도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가끔은 최소한 어떠한 행동은 하지 말아야, 중간은 간다.
사족, 그게 대통령 부부의 조문 외교든, 부끄러운 기자들의 글이든. 사족 추가, 바이든 48초 정상회담, 사적이라는 뉴욕의 비속어 발언도….